5. 요, 금, 송 관계
걸단이 다시 나라 이름을 요(遼)라 고치고 또 제국을 세워 인국을 침략하여 고려에도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자주 변경을 침입하는 고로 고려에서는 여러 번 항의도 하고 싸우기도 하여 어디까지 대항하다가 다시 여진족의 영웅 아골타라는 사람이 일어나 완안부(完顔部) 부장이 되어 요의 쇠미한 틈을 타서 부근 여러 부락을 통일하고 크게 세력을 확장하여 요의 국경을 자꾸 침식하니 요에서는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되 고려에서는 듣지 않고 도리어 여진을 동정하더니 예종(睿宗) 10년에 아골타가 다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국도를 시방 길림성에 두고 지라 송과 협력하여 요를 칠 새 요의 천조제(天祚帝)가 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되 우리나라에서는 걸단을 구시하는지라.
걸단은 이것을 모르고 청병하는 것은 참 어리석다. 무고히 발해를 멸한 것을 깊이 원망하고 또 종종 출병하여 우리를 괴롭게 한 죄를 깨닫지 못하니 도리어 반감을 사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틈을 타서 래원(來遠)과 포주(抱州=의주義州) 두성을 도로 찾아 점령하였다.
평장사 김록(金綠)을 보내여 북변의 일을 조처할 새 마침 금병이 개주(=봉황성鳳凰城)에 들어와 성을 함락하니 요의 장수 야율녕(耶律寧)이 도망하며 요원 두성을 고려에 환부하였다. 김록이 돌아와 이 일을 예종께 아뢰니 나라에서는 이 땅에 방어사를 두어 지키고 이제로부터 압록강으로 국경을 정하고 이때의 요의 청원사가 와서 구원병을 강청하거는 우리나라에서 이것을 의논하던 중 김부철(金富轍) 등이 절대 불가를 주장하여 의론이 정지되다.
국토 회수운동이 비록 성공하였다 할 수 있으나 그 후에 금이 점점 강성하여 지라 송을 쳐서 휘흠(徽欽) 두 임금을 사로잡아가니 송 고종(高宗)이 다시 남경에 가서 위에 오르니 이것을 남송이라 칭한다. 이때에 송이 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거늘 조금 전에 송이 요를 칠 때 고려에서도 항상 송의 편을 들어 도와주었으나 이번에는 금을 해할 수 없는 고로 그 청원을 응치 못하였다. 금은 두려워함이 아니라 그들이 일찍이 고려를 부모국이라 하던 말을 생각하고 적할 생각이 적었다. 이때 요와 송과 금이 어우러져 싸울 때 고려의 천지가 자못 중대하였다. 상당한 수완가가 있었다면 고려의 국경이 비약적으로 소득이 많았을 것을 겨우 래원 두어 성만 차지한 것은 퍽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