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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죽음으로 가득 찬 잔혹동화(!?) 성경>의 줄거리: 잔혹동화란 대부분의 경우 기존의 동화들 속에서는 너무나 아름답고 단순하게 그려지는 바람에 감추어져 있는 인간 내면의 추악한 욕망을 파헤쳐 내어서 이야기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쓰는 동화를 일컫는 줄로 압니다. 성경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 인생의 가장 마지막에 맞이할 죽음을, 아예 신앙 생활의 시작부터 들추어내어 끝까지 짊어지고 가게 합니다. 이유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 중에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가득 찬 잔혹동화(!?) 성경 (사무엘상 26:1~25)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죽음’으로 가득 찬 잔혹동화(!?) 성경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죽음’으로 가득 찬 잔혹동화(!?) 성경 지난 주 화요일에 서울에서 말씀을 들으시는 성도님들이 오셨습니다. 두 가정이 오셨는데 한 가정에서 중학교 3학년 아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오늘부터 중간고사인데도 큰마음 먹고 학교까지 빠지면서 동참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성경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목사님을 만나서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왔다’고 합니다.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셨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에 대한 심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지금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고 그 상황이 아이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람이 살 때에 꼭 필요한 경제문제가 예수님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궁금해진 것입니다. 중학교 3학년 나이에 게임에 빠지지 않고 성경을 완독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부모님이 겪고 계신 경제문제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전되어 십자가 생활화 이야기를 하면서 ‘죽어야 된다.’고 하니 아이가 얼굴이 빨개지더니 나갔다 들어오면서 갑자기 이제 성경을 안 읽겠다고 합니다. 성경은 ‘잔혹동화’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겪는 경제문제가 예수님을 통해서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맨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잘 살자, 잘 살 수 있다, 잘 살 수 있는 길이 성경에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부족할 판에 ‘죽자’는 이야기만 두 시간 가까이 하니 아이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버린 모양입니다. 헤어져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성경이 잔혹동화’라는 아이의 말이 순간순간 떠올랐습니다. 예를 들어 백설공주 인어공주 신데렐라 피터팬 라푼젤 같은 동화들이 사실 너무 단순화 되고 미화된 것입니다. 신데렐라도 인간이라면 성경적으로 죄가 가득한 인간이고, 백설공주도 이름대로 순백의 여자이겠습니까? 잔혹동화는 이렇게 미화되고 단순화 되어서 감추어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다 들추어내서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잔인한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인식 속에서 아름답고 청순하기만 했던 이미지를 깨뜨리는 것이 잔혹동화인데 그런 면에서 성경이 잔혹동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곧 죽을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야기해주고 있고, 왜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죽는다는 이야기를 밤낮으로 때마다 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날마다 짊어지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잔혹동화입니다. 겉으로 서로 웃고 좋아하는 시간에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 속에 들어있는 추악한 욕망을 다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녀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성경 어디에서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요청이 나타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엔게디 동굴에 숨어있을 때에 사울 왕이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들어왔을 때에 몰래 옷자락만 베고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왕이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다윗의 태도를 보여주었고 이어서 나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바보, 쓸모없는 자, 무익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발에 대한 다윗의 태도가 아비가일에 의해서 올바르게 수정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엔게디 동굴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인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가 반복됩니다. 나발에 대한 태도를 사이에 두고 앞뒤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 왕에 대한 다윗의 태도가 샌드위치처럼 이루어진 것인데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봅니다. 도대체 기름부음 받은 것이 무엇이기에 다윗의 도피생활 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제시하십니까? 지금 2차 도피시기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우리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두 가지 사건입니다.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이지 않은 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 사이에 나발의 사건이 끼여 있는 구조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바는, 기름부음 받은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셨음을 기억하는 점입니다. 9절에 다윗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라고 하는데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 스스로 처리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인데 그 속에는 다윗 자신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는 내막이 있습니다. 소년 다윗이 양을 칠 때에 곰이나 사자가 새끼를 물어 가면 그 입을 찢고 양을 구해냈습니다. 스무 살도 안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전 군을 압박하던 283cm의 거인 골리앗을 죽이게 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를 얻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기름부음 받음으로부터 가능한 현상인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격적으로 제공하셔서 당신의 손으로 ‘나’라는 인격과 몸을 장갑 삼으시는 것이고, 이것을 중시하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인격이 들어오심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과 앗수르, 가룟 유다나 빌라도는 단순히 아이스하키에서 스틱으로 공을 다루듯이 용도를 위해서 쓰임만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였던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 것일까요? 다윗이 아비새의 권유대로 잠든 사울을 창으로 찔러 죽이게 허락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그 기름부음 받음이 중단되고 그 의미가 무효화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비새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고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가 기름부음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기름부음 받은 사울을 죽이는 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면 다윗을 따르던 신하들도 언제든지 기름부음 받은 다윗을 죽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이 사건의 내막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름부음 받음을 사울의 기름부음 받음과 동일시했던 것인데, 나를 죽이려는 원수와 일체가 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비밀이고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말씀의 방법입니다. 기름부음 받음의 그 의미의 완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사울 왕이 기름부음 받고 다윗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그리스도)로 모든 기름부음의 완성자이시고 종결자이신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저와 만난 아이가 부모님이 겪고 있는 경제문제를 예수님께 기도함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희망적인 기대를 갖고 성경을 보는 것과는 다르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나의 구세주가 되셔서 구원하시고 평강과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가실 예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도 사울 왕이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사역을 염두에 두면서 기름부음을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단기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바라고 찬양사역에 대한 기름부음을 바랍니다. 이러한 기름부음이 있으면 그 사역으로 인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감동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기름부음의 완결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우리를 십자가로 초대하시는 것은 나의 기름부음이 예수님의 기름부음과 동일시됨을 뜻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대할 때에 그의 신앙적 인격적 결함을 제외하고, 기름부음 받음 자체만을 두고 자신과 동일시하였기에 죽일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기름부음이 나와 동일시되는데 그 주님의 죽음으로 나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잔혹동화가 나오는 동기에서처럼 우리 인간들이 너무 치장되어 있고 미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꿈을 이루라, 긍정적인 힘을 적용하라’고 하는데 다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추악함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있는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추악함이 발동될 때마다 죽어야만 합니다. 이전에 엔게디 동굴에서는 사울 왕이 다윗에게 접근했지만 오늘은 다윗 스스로가 사울에게 접근하는 것처럼 두 가지 방식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나의 태도가 날마다 이렇게 반복되는 것인데, 사울 왕이 다윗에게 죽음을 요구했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다윗이 자기의 죽음을 요구하는 십 황무지에 진을 치고 있던 사울 왕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것처럼, 내가 말씀을 통해서 수동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지만 삶의 현장에서 찾아가야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전에 다윗이 숨었던 동굴은 삶에서 격리된 장소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는 시간이든지 기도하는 시간이든지 삶과 격리된 순간에 주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오늘 사울이 군인 삼천 명을 이끌고 진을 치고 잠든 장소는 다윗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인데 뛰어 들어갑니다. 나의 죽음을 요구하는 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치열한 현장인 직장에서 나의 죽음을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주님을 찾아가야 하는데 바로 그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 삼아 끼시는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내 속이 죽어야만 하는데 나는 비워질 수조차 없습니다. 돈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이미 내 인격과 돈은 살이 되어 연합한 것입니다. 이러한 돈과 연합된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끝이 나는 것입니다. 죽으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아버지 앞에 있는 나를 장갑삼아 끼시고 다윗이 곰과 사자의 입을 찢고 골리앗에게 이기고 블레셋을 물리쳤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의 사울에 대한 태도에서 사울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개인적인 신앙과 인격적 결함을 제외하고, 오직 공적으로 드러나 있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을 가지고 관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관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결정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엔게디와 십 황무지에 진을 치고 있는 사울의 두 경우에서 나의 죽음을 요구하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신 메시아에 대해 얘기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셔서 요구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이 두 관계 가운데 나발의 사건이 끼어있는 것은 내가 죽어 하나님의 장갑이 될 때에 무익한 자에게는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오직 기름부음 받음에만 신경 쓰라는 것입니다. ‘무익하다’는 것은 내 마음의 크기는 돈이나 왕위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게 무익한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우주를 다해도 그 크기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나발 사건을 가운데 끼어 넣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장갑으로 끼실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 그 어떤 것조차도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야로 율법을 묵상함으로 율법의 증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나발과 같은 바보 병이 도져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잊은 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마음을 채우려 노력하며 살고 성실하게 살고 꿈이나 비전을 갖고 삽니다. 이런 바보 병에 사로잡혀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사울이 다윗의 죽음을 요구했던 것처럼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요구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기름부음 받으심의 종결자이신 주님께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하는 나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요구에 응함으로서 진정으로 예수님의 기름부음 받으심이 나의기름 부음 받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