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목반야회 성지순례
지리산 화엄사/사성암/노고단트레킹
2009.10.31
경목반야회가 발족한지 어언 1년반이 지났다. 금년도 세번째 성지순례지는 지리산에 있는 화
엄사로 정했다. 한창 단풍철인 10월말일(토), 회원들 그리고 불교에 플렌드리한 동문들 28명이
이른 새벽(6시30분) 교대역에 모였다. 모처럼 떠나는 순례길인데 일기예보가 겁을 주고 있다.
중부지방부터 전국적으로 비가 내려 내일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옷,우산 추울것에
대비한 옷가지를 배낭에 챙겨넣었다.
아침해가 빨갛게 떠올라 비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종일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 일행을 태운 버스는 경부선을 달리다가 천안 풍새IC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를 달린다.
차 안에서 미리 최윤호법우가 준비한 김밥과 김지택법우 부인 김정옥보살이 준비한 떡으로 배
가 부르다. 이날 순례길에는 처음으로 참여한 박삼옥법우 부부도 동승했고 조상희법우,유재원
법우도 처음이다. 모두들 반갑게 맞이해준다.
오늘 순례순서는 화엄사 참배 전에 네분의 성인이 수도했다는 사성암(四聖庵)을 먼저 찾은
다음 오늘의 목적지 화엄사를, 그리고 중식후 노고단 트레킹 순으로 바꾸었다.
사성암(四聖庵)의 절경
사성암에 도착하니 벌써 10시반. 어지간히 다녀보았다고 하는 필자도 이곳은 처음이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오산(鰲山:해발 531m)에 메달리듯 달라붙은 암자는 마치 처마
밑에 지어놓은 제비집을 연상케 한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과 구례읍의 풍경도 일
품이다. 자라 오(鰲)자를 쓴 오산이라는 산의 이름도 이곳의 생김새가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
의 물을 자라가 먹고 있는 모습이어서 붙여졌다. 암자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백제 성
왕 22년(544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오산에 있어 원래는 오산암이었는데 '원효, 의상, 도선,
진각'이 수도한 후 4대 성인이 수도했던 곳이라 하여 사성암으로 불린다.
타고온 버스를 세워두고 마을버스로 사성암까지 간다. 왕복요금은 3천4백원.
10분가량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 사성암까지 도보로 걸어오른다.
사성암의 약사암이 올려다 보인다. 산전체가 바위다. 바위에 암자가 붙어 있다.
바위산 옆으로 돌담을 쌓아 만든 길로 사성암에 오르고 있다.
약사암 안에서 보이는 마애여래입상/원효스님이 손톱으로 음각했다고 전한다.
법당 뒤로 소원을 들어준다는 소원바위가 엄청 크다. 소원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도선굴/ 도선굴 옆에 산신각이 있다.
버스가 오를 수 있는 곳까지 가니 사성암까지 가는 마을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편도 1,500원
왕복 3,000원이라는데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버스를 타고 얼마 안있어 그게 아니구나
고쳐 생각했다. 급경사에 S자로 꼬불꼬불한 험한길이 무려 4.2km나 오른다. 기사의 운전솜씨
가 보통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라 추켜주니 신이 나서 싱글벙글이다. 기사의 설명에 의
하면 사성암으로 오르는 길은 절소유가 아니라 사유지이며 이곳에 도로를 내면 자라모양의 오
산(鰲山)에 허리를 자르는 것이 되어 풍수지리상 반대가 심했는데 3~4년 전에 겨우 도로를 냈
다고 한다. 아직 포장을 허용치 않아 도로포장도 안된 상태이다. 내년도에 새로 방영될 역사
드라마의 촬영지로 선정되어 벌서 이곳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고 좋아들 한단다. 관광객이 엄
청나게 몰리겠지-- 버스가 정차한 곳에서 다시 걸어서 100여m 오르면 넓은 마당 대신 허리높
이의 돌계단이 이어지고, 양옆의 돌담 위에 이름과 소원을 적어놓은 기와들이 눈길을 끈다.
기둥 세 개에 의지한 채 바위벽에 매달린 약사전(藥師殿)은 법당까지 흙을 채워 절벽을 메우고
공사가 끝난 다음 다시 흙을 파내는 고생 끝에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만든 암자다.
구불구불 돌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25m의 암벽에 조각된 마애여래입상(전남문화재 제22
2호)이 자비로운 미소로 맞이한다. 선정에 든 원효스님이 손톱으로 그렸다는 입상은 음각으로
놀라울 만큼 선이 뚜렷하다. 약사전 안에서만 보이는데 바깥벽면 옆으로 보니 마애여래입상의
옆면이 약간 보이는데 금분으로 칠해져 있었다.
약사전에서 지장전으로 가는 길의 언덕에 수령이 800년도 더된 귀목나무가 섬진강을 굽어보
고서 있다. 그 위에 있는 지장전의 돌담에도 소원을 적은 기왓장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지장전 위에 뜀바위로도 불리는 소원바위가 서있다. 이 바위에 하동으로 뗏목을 팔러갔던 남
편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내를 잃은 설움에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전설이 깃들
어 있다. 소원바위를 쳐다보니 엄청난 크기의 바위다. 나지막한 돌담길을 돌아서면 큰 바위 사
이로 아담한 산신각이 나타난다. 산신각 옆의 바위틈이 도선국사가 좌선하던 도선굴의 입구다.
안으로 들어가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어두운데 중간쯤에 좌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수행에 정진했을 도선국
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우측 약사전(유리광전) 왼쪽 옆은 지장전이다.
80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귀목나무
왕복표를 끊어서 왔기에 요구한 시간에 버스가 왔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단체사진을 찍
었다. 사성암에서 찍어야 되는 단체사진을 못찍어 여기서라도 찍었는데 포토샾으로 합성하여
일행을 사성암으로 옮겨놓으란다. 재미있는 작업을 요구한다. 결코 부정한 일이 아니니 그렇
게 라도 해서 추억을 남길 수 있다면--내려오는 길에 시간을 재보니 9분여가 걸렸다.
첫 순례지 사성암의 절경에 모두들 탄사가 그치지 않았다.
화엄종의 중심사찰 화엄사(華嚴寺)
사성암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버스는 오늘의 성지순례 목표지인 화엄사에 도착했다.
화엄사의 창건이나 창건주,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
사에서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발문에 의하면 754년(경덕왕 13) 황룡사
(皇龍寺)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화엄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절의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졌으며 절의 이름은〈화엄경〉에서 2자를
따온 것이다. 그뒤 신라말 이곳에서 출가한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
고려 광종대에는 홍경선사(洪慶禪師)가 당우와 암자를 중축했으며, 문종대에는 곡물을 저장하
기 위한 사고(寺庫) 2채를 일주문 밖에 건립했다. 인종대에는 정인왕사(定仁王師)가 중수했으
며, 충숙왕대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1424년(세종 6) 선종대본산으
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이때 장륙전의 벽을 장식했던 석경
도 파손되어 지금은 각황전(覺皇殿)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1630년(인조 8)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중건하기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완공되었다. 1702년(숙종 28) 벽암선사의 제자였던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고 다
음해에 삼존불과 보살상 4구를 완성하고는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숙종이
각황전이라 사액하고 화엄사를 선교양종대가람이라 했다.
가람배치는 대웅전과 누문을 잇는 중심축과 각황전과 석등을 연결하는 동서축이 서로 직각을
이루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동서5층석탑이 비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 절은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화엄사상을 펼쳐나간 곳이기도 하다.
현재 경내에는 17세기 이후의 건물만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각황전(국보 제67호)을
비롯하여 대웅전(보물 제299호)·영산전·나한전·원통전·명부전·적조당(寂照堂)·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4사자3층석탑
(국보 제35호), 동5층석탑(보물 제132호), 서5층석탑(보물 제133호), 석경, 원통전 앞 사자탑
(보물 제300호), 노주(露柱) 등이 있다.
지리산 화엄사의 일주문
화엄사 경내 위치도
템플스테이수련원으로 사용되는 요사채로 가는 반야문
금강문이 먼저 우리를 맞이한다.
금강문을 지키는 두금강역사와 코끼리와 사자를 타고 있는 보현,문수동자
천왕문의 사대천왕
마당 저편에 만월대가 있다.
밑으로 못가게 돌아가도록 설계된 보제루
범종루와 운고루
화엄사 본당 마당 맞은편에 각황루가 보인다.
대웅전 앞 좌우로 보물로 지정된 두개의 5층석탑이 서있다.
화엄사 대웅전
원톤전 앞 사자탑
나한전
300년 수령의 홍매화
화엄사 매표소 근처에 새로 만든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버스가 달린다.양옆으로 단풍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었다. 제법 길지만 산책을 하면서 가도 좋겠구나 생각을 했다. 올라가면
본래의 일주문 격인 불이문(不二門)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절안으로 들어간다.
불이(不二)란 생과 사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 선과 불선(不善)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
미한다. 불이문을 통과하여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면 부처가 된다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부른다. 작은 크기지만 속세의 업을 꾸짖는 듯한 위엄이 느껴진다.
불이문을 지나 금강문과 천왕문을 거쳐야만 법당 마당이 나온다.
일주문에서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절 진입로를 걷다보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화엄사는 규모가 커서 인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금강문을 갖추고 있다. 그곳에는 어느 절에서도 보지 못했던 금강역사와 동자들을 모시고 있
었다. 흔히 인왕(仁王)이라 불리는 두 명의 금강역사는 불법을 훼방하려는 세상의 사악한 세력
을 경계하고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잡신과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두구의 인왕상 옆에는 문수와 보현보살이 동자의 모습으로 각각 사자와 코끼리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어 천왕문에는 잡귀를 막는 4대천왕(西方 廣目天王,北方 多聞天王,南方
增長天王,東方 持國天王)이 무서운 모습으로 지켜보고 서 있다.
대웅전에 법우들과 보살 모두 경건히 부처님께 참배를 하러 들어간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
전(보물 제299호)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지었다고 전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
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든 우물 천장
이며, 삼존불 위쪽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띠는 지붕 모형의 닫집을 놓아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화엄사상의 삼신불인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불을 표현한 것인데, 도상면에서 법신, 보신, 화신(응신)을 나타내는 매
우 귀중한 예이다. 이러한 삼신불은 불화에서는 많이 보이지만 조각으로는 드문 편이다.
대웅전 내 영산회상 괘불탱은 효종4년(1653년)에 제작된 영산화상도로 거대한 규모이면서 짜
임새 있는 구도,균형잡힌 형태,치밀한 선 등이 뛰어난 불화로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황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국보 제67호이다.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覺皇殿)’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
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화엄사 각황전은 건물
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각황전 앞에 국보 제12호인 석등이 주목을 끈다. 높이가 무려 6.36m나 되며 꽃잎 형태는 우담
바라이며 8정도4성제를 표현한 국내최고의 석등이다.
화엄사에는 보제루(普濟樓)애도 특별함이 숨어있다.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용인 2층 누각건물
로 대개는 그 밑을 지나 대웅전에 들어서게 되지만,화엄사 보제루는 1층의 기둥높이를 낮게
만들어 옆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각황전,대웅전,대석단 등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중심영역
의 경관을 강조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장식을 배제하고 단청도 하지않아 절제된 아름다움
을 느낄 수 있다.
대웅전을 옆뒤로 돌아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국보 제35호인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이 있다. 석등과 마주보고 서있으며,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
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3층사리석탑과
차공양을 올리는 효사상의 공양탑을 세웠는데, 가장 주목되는 사리탑 윗층 기단은 암수 네 마
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
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
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
다.특히 윗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
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10월24일부터 11월3일까지 보제루에서 네팔 관광청 주최로 ‘네팔 만다라 특별전’이 열리고 있
었다.이번 특별전에는 네팔 만다라 최고 작가로 꼽히는 노루브 라마 등 칼라차크라 만다라 35
점과 탱화 2점이 선보인다.만다라는 산스크리스트어로 ‘완전한 세계’, ‘치유능력을 가진 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칼라차크라 만다라는 시간(Kala)과 바퀴(Cakra)의 합성
어로 ‘영원한 시간의 수레바퀴’를 뜻한다. 칼라차크라는 티베트 고승들이 그린 것으로 초기 불
교의 전통이 잘 보존돼 있다. 달라이라마 스님이 그린 칼라차크르 만다라는 천만원에 이미 팔
린 것으로 리번이 붙어 있었다. 네팔이 불교국에 순회전시를 하면서 난민구호금으로 작품을
매각한다고 한다.
각황전 앞에서 단체사진을 남기고 버스가 있는 입구까지 산책을 하며 걸었다. 화엄사 경내외
는 한창 단풍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빨강색과 노랑색이 너무나 선명하여 시선을 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시간이 점심때를 넘겨서인지 배가 고프다. 미리 예약한 식당으로 가서 단체로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를 맛있게 먹었다.
모처럼 기회가 된듯 싶어 필자가 점심공양 스폰서를 맡았다. 점심식사 후에는 오늘의 하일라
이트 중의 하나인 성삼재~노고단 트레킹을 남겨두고 있다.
노고단트레킹
양정웅회장이 미리 사전답사를 하여 아주 평탄한 산책길임을 강조는 바람에 모두 편한 마음으
로 산책기분으로 나섰다. 시발점인 성삼재로 가기 위해서는 천은사입구를 거쳐야 한다. 천은
사도 시간이 되면 들러고 싶은 사찰이다. 성삼재에 도착하니 2시45분. 왕복 2시간은 잡아야--
노고단(老姑壇)은 해발 1,507m의 고봉으로 천왕봉(1,915m),반야봉(1,734m)과 함께 지리산 3
대봉의 하나로 신라시대 화랑국선의 연무장이었다. 한편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냈던 지리
산의 영봉(靈峰)이다.
성삼재(1,4040m)를 떠나 삼삼오오 노고단 산책길에 나섰다. 넓다란 산책길이 시원히 뚫혀있
다. 집사람이 산에 오르면서 먹으려고 배낭에 넣어온 깎은 밤과 대추를 필자가 비닐봉투에 들
고 가니 보는 사람마다 묻는다. 들고가는 게 무어냐고. 노고단에서 산신제를 지낼 밤과 대추라
고 했더니 누구는 한수 더떠 산신제 지내고 밤,대추 먹으면 아들 낳는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노고단 고개에 올라 밤과 대추를 한사람에 2개~3개씩 나누니 모두들 맛이 좋다고 야단이다.
노고단까지 가는 길에는 중간에 계단을 이용할 수 잇는 지름길이 있었다. 노고단까지는 2.6km.
단풍이 한창시즌일 거라고 예상하면서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이미 이곳은 한겨울이다.
앙상한 나무가지에는 잎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단풍구경은 화엄사에서 좋은 단풍구경을 했기
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노고단 고개에도 돌탑이 서 있다. 여기서 노고단정상까지는 시간과 인원통제를 하고 있었다.
아침 9시,10시,11시,오후1시,2시,3시 정각에 인원을 모아 출발시키고 그 이후는 절대 출입이
안된단다. 지금시간이 4시이니 이미 한시간도 넘었다. 출입이 허용되는 노고단정상 개방기간
도 10월12일부터 11월16일까지이다. 이길을 개통한 것도 얼마안된다고 한다.
너무 아쉬워 사정을 해봤지만 헛일. 정상까지 10분도 안걸릴 거리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아쉽기만 했다. 아쉬운 심정을 노고단고개 돌탑앞에서 단체사진으로 대신했다.
하산길도 계단길과 둘러가는 길이 있어 일부는 빠른길로 몇몇은 둘러가는 길로 들어섰다.
필자도 안가본 길로 가고싶어 둘러가는 길을 택했다. 아무래도 경치를 구경하며 가고싶은 심
정 때문이게지--가는 도중에 있는 전망대에 서니 구름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전혀 안 보인다.
바람이 안개를 씻어내니 잠시 보이던 풍경도 또 금새 문을 닫아 버린다. 이곳 노고단의 운무
그리고 겨울의 설경은 구례의 10경중 2개를 차진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오니 이미 먼
저온 법우들은 소주 한잔을 하고 있었다. 성삼재 전망대에서 보이는 지리산 명산들도 많다.
필자는 수년전 지리산을 많이 다녀보아 아! 저곳이 만복대구나, 고리봉이 저기네-하면서 감회
에 젖기도 햇다. 시간은 벌써 5시20분. 서울로 돌아갈 길이 바쁘다. 잘못하다가는 전철시간이
아슬할까봐 모두들 마음이 급해진다.
정상가는길은 기간도 시간도 제한이 있다.
출입이 제한되고 있는 노고단 정상 가는 길
서울로 오는 길에 이인휴게소에서 단체로 국수류로 저녁식사를 하고 지루한 시간을 메우려고
노래방시간을 가졌다. 필자를 포함한 몇몇은 노래방시간만 되면 죽을 맛이다.다행히 강제는
아니어서 듣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새로 등장한 박삼옥법우의 독무대라 할 정도로 앵
콜곡을 많이 불렀다. 창원에 오래 근무하면서 신곡도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다고 한다. 소질도
있어야 하지만 노력도 대단한 것 같다.
희한한 것은 서울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순례시간이나 노고단 산책시에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최상의 컨디션을 가졌다. 노고단에서는 약간 추울 정도로 시원한 산책을 했다.
서울로 오는 버스에서 비가 오고 있었는데 버스에 내릴 때는 말짱하게 그쳤고 집에 도착하니
또 비가 쏟아져 친구들 걱정을 했는데 그 시간은 지하철을 타고 있을 시간이라 안도-
걱정했던 비는 한번도 우산을 쓰지않고 잘 견뎌 주었다. 우리 반야회의 신심이 깊은 법우들의
기도 때문인지, 부처님의 가피 덕분이지 어쨋든 좋은 성지순례에 날씨까지 일조를 해 주었다.
양회장의 천수경과 반야심경 암송에 모두들 탄사를 보냈다. 상대적으로 느낀 반성도 --
양회장의 사전답사를 비롯,김보친,최윤호동문도 진행에 수고 많았고 찬조금을 낸 서융덕법우
를 비롯한 여러법우들의 물심양면의 후원으로 모두 만족하는 순례를 마치게 되어 감사를 드린
다. 몇몇 사진은 합성과정에 약간의 보기가 안좋은 사진도 있음을 양해바란다.
먼 여행길을 마치고 편안히 휴식을 취하며 본 후기를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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