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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태양을 올라타는 태양의 후예>의 줄거리:
드라마 제목이 왜 '태양의 후예'인가라는 질문에 담당PD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각각 구조를 위해 재난 지역에 파송 받은 군인과 의사다....그들은 태양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온기를 준다" 즉 스스로 작은 태양들이 된 사람들의 사랑을 그린 멜로 드라마라는 것이지요. 다윗도 태양의 후예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태양의 후예는 스스로 작은 태양이 되는 대신에 유일한 태양을 올라탑니다. 그리고 그 태양빛을 중간에서 타인에게 전달합니다.
태양을 올라타는 태양의 후예
(사무엘하 23:1~39)
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6.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태양을 올라타는 태양의 후예>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태양을 올라타는 태양의 후예’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시청률이 무려 40%까지 육박한 것으로 보아 굉장히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내용을 대충 풍문으로 들어서 알만큼 유명했고 아직도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을 광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수입한 중국의 한 매체가 드라마 연출을 맡았던 PD중의 한 명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왜 하필 제목이 태양의 후예냐고 물었더니 “태양은 눈이 부시도록 사람들에게 빛을 준다. 남녀 주인공은 각각 구조를 위해 재난지역에 파견된 군인과 의사이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돕고 태양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온기를 준다. 군인과 의사는 사명감을 가진 직업이고 이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며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스토리로 대중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심어주고 싶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태양의 후예’라는 제목이 정해진 이유는 아비규환의 재난현장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명감의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고 이런 태양의 후예들이 서로 사랑을 하는 내용입니다. 즉 인본주의적 인류애를 바탕으로 깐 멜로드라마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태양의 후예는 태양이 발열체인 것처럼 나 스스로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들을 향하여 사랑을 발하는(열을 발하는) 작은 태양(작은 발열체)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다윗은 사무엘 상하를 마치면서 또 다른 메시아를 예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이 노래가 특별히 성령의 영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다윗 스스로 강조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영감을 통한 메시아를 향한 예언의 노래 속에서 태양의 후예가 언급되는데, 이 태양의 후예는 드라마에서처럼 스스로 발열체가 되어 타인에게 온기를 전파하는 자가 아닙니다. 다윗의 노래에서의 태양의 후예들은 유일한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중간에서 통과시킴으로 타인에게 전달하는 자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비규환의 재난현장을 보고 스스로 사랑이 우러나왔다면 이들은 작은 태양으로서 태양의 후예인 휴머니스트들이고 여기에 인본주의적 인류애라는 말이 붙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이 노래하는 메시아의 예언 속에서 나오는 태양의 후예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나보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들에게 전달하는 의미에서의 태양의 후예들입니다. 이 말은 태양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중간에서 받아서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므로 자랑이나 명예가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인본주의적 인류애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본주의적 인류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태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이 태양에 올라타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육체가 있으므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태양이신 하나님께로 가면 육체로 관계 맺는 영역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고 우리는 중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의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지금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한민국을 비롯한 온 세상은 심각한 재난현장입니다. 아무리 평화스러워 보이는 재벌의 집안도 재난 현장일 수밖에 없는데, 다윗이 앞서 노래했던 것처럼 사망의 물결이 덮고, 무가치한 것들의 홍수가 함몰시키고, 스올의 줄에 묶여서 끌려가며, 사망의 올무에 걸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제로 지진이 일어난 곳도 재난의 현장이고, 지진이 없이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재난의 현장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비규환의 재난의 현장이 태양의 후예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작은 태양이 된 태양의 후예가 아니라 유일한 태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심부름꾼으로서 태양의 후예들입니다.
오늘 다윗의 노래는 메시아 예언으로 예언의 핵심은 3절과 4절입니다.
3절에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라는 말은 메시아 왕국의 통치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4절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4절에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어떻게 메시아의 예언이 되는 말씀인지 살펴봅니다.
우선 이 4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구름 한 점 없는 아침에 돋는 해와 같다’라는 말입니다. 즉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일출이 일어나는 것인데 이 간단한 내용이 다윗의 기독론, 그리스도론, 메시아론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여러분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아침에 떠오르는 일출의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실제로 바닷가에서 구름 없는 날은 쉽지 않습니다. 구름이 있으면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가 구름에 걸치기 때문에, 구름이 없는 날 어두움을 뚫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음이나 눈 뜨고 볼 수 있는 가장 황홀한 빨강으로, 이루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로 아름답고 크게 보이는데 이것이 어떻게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너무나 평범한 자연현상에 이렇게 깊고 심오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함축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특별히 성령의 감동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은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태양은 어둠을 뚫고 올라오는 일출이거나 어두움을 드리우기 위한 일몰뿐인데 메시아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비유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시선을 따라 황홀해 보이거나 좋아하는 것을 따라 가게 되는데, 태양빛은 나의 시선과 떠오르는 태양 사이를 잇는 다리이고 빛이 곧 시선이 가는 길인 것입니다. 즉 떠오르는 태양은 우리 눈높이에 맞춰진 태양을 말하는데, 메시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눈높이에 맞춰진 하나님이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입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이 중천에 떠오를 것인데 떠오르기 전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부지런히 보는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면 중천에 떠서 비칠 때는 볼 수가 없고 마음을 보낼 수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사건을 ‘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아침에 떠오르는 해’라는 한 마디의 비유로 함축한 것인데 놀랍지 않습니까?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태양이 중천까지 떠오르는 것 같이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게 되면 아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는데, 이 부활과 승천 사이의 40일 동안에 주님께서는 공생애 때의 사역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만나시고 마가 다락방의 백이십 문도와 고전15:6절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셔서 이들의 마음을 끌어 모으셨는데, 이 기간이 지평선 위로 올라온 태양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기간입니다. 이때에 마음이 주님께로 올라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떠오르는 태양이신 메시아에게 올라타서 하늘로 올라간 자들은 그들의 육체로 관계 맺는 영역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과 사랑의 빛과 역사의 빛이 비춰지게 됩니다.
그 얘기를 오늘 다윗의 메시아 예언 이후에 관계없어 보이는 다윗의 삼십인 용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 삼인과 둘째 삼인 세 명씩 묶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첫 번째 삼인이 월등한 능력한 가진 자들이었고, 두 번째 삼인은 똑같이 충성하였으나 첫 번째에는 능력이 미치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탁월한 자들이었고, 세 번째로 그 외의 삼십인 용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갑자기 이들의 이야기가 왜 메시아 예언에 이어서 나오게 된 것일까요?
이들의 일을 사울 왕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대치했을 때에 거인 골리앗에 의해 심리적으로 모든 군대가 제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목동이었던 다윗이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사울 왕에게도 천부장 백부장의 장군과 장관들이 많이 있었는데 모두 골리앗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 뒤에 앞서 본 21장에 다윗의 부하들도 골리앗 같은 거인 장수들을 죽였는데, 이 얘기를 여기서 덧붙이는 이유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올라탈 수 있는 태양, 눈으로 볼 수 있는 태양, 떠오르는 태양에 마음을 싣고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사실 햇빛을 비추는 태양은 아닙니다. 중천에 뜬 태양이 햇빛을 비추면서 생명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우리의 눈으로 태양을 바라볼 수가 없고 마음을 실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에는 마음을 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장갑으로 쓰임 받았고, 다윗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부하들 또한 쓰임 받았던 것처럼 떠오르는 태양이신 주님께 마음을 실을 때에 우리도 쓰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4절 후반부를 보면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비가 내려 촉촉한 땅에 해가 비치자 싹이 돋습니다. ‘싹’은 생명의 최초의 단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메시아에게 마음을 실은 태양의 후예들의 삶은 생명의 최적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생명과 같은 가치로 보는 것이 기쁨과 만족과 행복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어서 활동함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려고 하지만, 본래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곧 기쁨입니다. 즉 기쁘고 만족한 상태에서 일도 해야 하는 것이고, 계획을 이루어가야만 하는데 생명현상에 최적화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떠오르는 해가 되셔서 눈앞에 비칠 때에 즉 십자가에서 부활까지의 기간 동안에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해가 떠오르듯이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마음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육체가 머무는 이 땅의 삶은 생명에 최적화된 삶이 되고,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도 태양빛이 번져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주인공들이 스스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재난을 당한 곳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마음을 다 보낸 자들입니다. 이웃을 향해 보낼 수 있는 마음이 없을 그 때에 우리 마음이 가있는 태양은 우리 몸이 남아 있으면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영역으로 비추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가있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에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메시아 예언의 내용입니다.
바닷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 마음이 설레고 황홀합니다. 그 태양은 중천에 떠올라버린 태양과는 완전히 다른 가서 안기고 싶은 태양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그리고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신 것은,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어둠을 뚫고 지평선 위로 올라오신 태양이신 주님께 마음을 실어 보내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로 가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께로 올려 보냅니다. 그렇게 마음을 주님께 드려서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마음이 올라가버린 사람들에게는 오순절 역사와 초대교회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빛이 계승되어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열두 제자와 백이십 문도와 오백여 형제들을 통과하고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를 지나 로마의 서방교회와 중세교회를 통과하고 통과하여서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그 하나님의 빛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나를 구해야만 합니다. 내가 건강해야만 재난현장에 투입될 수 있기 때문에 나를 죽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제 어둠을 뚫고 올라오시는 태양이신 주님께 나를 싣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연합하게 되면, 내 몸과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단 한 절로 기독론을 완결시키는 다윗의 노래가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눈앞의 태양이시자 땅으로 내려오신 하늘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두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만을 붙잡습니다. 내 마음을 끌어안으시고 어떤 순간에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길이 재현되게 해주셔서 태양을 올라탄 태양의 후예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