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았다. 왜 열광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나이가 벌써 쉰 고개를 넘은 지 오래지만 고루한 영화는 마치, 1980년대의 한국 상황이 배경 같았다. 떠나온 88년 이전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2020년을 살고 있는 한국에서 이 같은 상황이 불쾌하다는 평이 나오는 것, 아니 이것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생경했다.
1985년. 한국이 서슬퍼런 군부의 정치로 목소리를 죽이고 있을 때, 오한숙희 라는 여성을 만났었다. 여성단체라는 이름도 제법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였다. 성이 하나가 정상인 그 사회에서 그녀는 성을 오씨와 한씨를 같이 붙여 쓰고 있었다. 호적에는 한씨가 존재하지 않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같이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당당했다. 그녀 앞에서 나는 여자라고 말하기 버거웠다. 커다란 산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포함해서 당시의 여성단체들은 앞장서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나같이 소극적인 여자들을 계몽시키며 자존감을 세워주려 애썼다. 그곳을 다녀오면 사회 초년병의 내 사고는 유리벽 속에서 혼돈상태가 되곤 했다. 업무 때문에 가끔씩 가야 하는 그곳에서 기사가 된다면 과히 사회를 뒤흔들, 대단한, 남성 사회에서는 듣기 거북하고 기분 좋지 않은 주장들이 나왔지만 나 조차도 소화되지 않은 얘기들을 억지로 포장해서 쓰곤 했다. 오한숙희님의 주장을 이제와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영화 속의 김지영에게는 상대방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영들이 빙의하여 그녀의 입을 통해 우리를 후련하게 했다. 그리고 영화는 끝났다. 호주에서 사는 내게는 정말 낯선 얘기들, 불편한 상황이 전개되고 나는 시간을 죽이며 그 영화를 끝까지 보았다. 영화가 끝났지만, 왜 나는 그 영화에서 감흥을 못 느낄까. 왜 한국에서 나오는 그 많은 평판에 하나도 동조를 하지 못하는 걸까. 감정이 닫혀버린 세상에 살고 있지나 않은지 집으로 오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음날 출근하여 사무실에 들어서자 내 의자 뒤로 서너 개의 액자들 속에서 긴 이름들이 보였다. 네 개의 단어가 액자마다 들어있다. 내 자격증들이다. 이름이 꽤나 길게 늘어져 있다. 두개의 성이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성운동가라는 이미지가 보일까?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내 결혼 전의 성을 붙인 것은 아닌데. 문득 ‘82년생 김지영’이 가지고 있는 갈등을 겪은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았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시집살이를 하지 않은 혜택이라고 같이 영화를 본 친구는 말했다. 가족이 만들어지면서 새 식구와의 관계는 한국의 전통 습관에서 대물림 된 거라는 친구의 주장이다. 수긍하게 된다.
결혼을 하면 자동으로 남편의 성으로 따라가는 풍습이 호주다. 자신이 일부러 이름을 바꾼다고 신고하지 않아도 결혼신고서를 제출하면 자동적으로 운전면허증부터 이름이 바뀐다. 물론 결혼 전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자격증을 가진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성씨를 사용하기도 한다.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세상이 바뀐 탓 인지 젊은 여성들은 요즘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혼한 여성들은 이혼 절차 중 자신의 성씨를 가져오기 위해 많은 절차를 거친다. 이혼 못지 않은 불편한 시간이 흘러야 모든 것이 결혼 전의 상황으로 된다. 주변의 지인은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이름이 불리었다. 이혼을 하여 자신의 성을 사용하였지만 자기 스스로도 낯설어 예전의 성을 그대로 붙여 지금도 쓰고 있다. 결국 내 이름을 갖는 다는 것이 이곳서도 한국 못지않게 험난한 것 같다.
도리어 한국에서는 버젓이 결혼 전 이름을 그대로 쓴다. 가족과 같이 있으면 XX 엄마, OO댁 이라고 불리지만 사회에 나가면 오롯이 나로 불러준다. 남편 성씨를 따라가는 호주와 다르다. 사임당 신씨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다. 사임당 이씨가 아니라 그녀의 성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성을 존중하는 사회는 서구사회가 아니라 한국이었다는 것을 오한숙희씨는 말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여성들의 지위 향상이 아직 가족 속으로 안착되지 못했다는 것을 ‘82년생 김지영’은 말하고 있다.
표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이 다를 뿐.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소속되어야 한다는 사회 생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다.
하미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