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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
 
 
 
카페 게시글
유학 인물편 스크랩 운암 김명일
아라 추천 0 조회 23 14.09.07 17: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명 : 김명일(金明一) , 1534년 ~ 1570년
본관 : 의성(義城)
: 언순(彦純)
: 운암(雲巖)
출생지 : 안동(安東) 천전(川前)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안동(安東) 아니산(阿尼山)
어려서부터 학문에 소질을 보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슬기로웠으며, 효성과 우애가 도타웠다. 글재주에도 뛰어나 형들을 따라 일찍 순흥의 소수서원에서 공부할 때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그 자질을 알아보고 장래에 크게 될 인물이라고 평가하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 그 학식와 행동을 칭찬하고 앞길을 격려하는 고풍시(古風詩) 한 수를 지어 준 일도 있다.

두 아우와 생원시에 함께 합격하다
바로 밑의 동생인 학봉 김성일과 도산으로 가 이황에게 배웠는데, 1565년(명조 9) 막내인 김복일까지 세 형제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여 고을의 화제가 되었다.
과거길에 요절하다
평소 몸이 약했던 데다가 공부에 너무 열중한 까닭에 건강이 여의치 않아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만 몰두하려고 하였으나 부친의 명으로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그러던 중 1569년(선조 2) 둘째 형 김수일과 막내 김복일과 함께 향시에 합격하였고, 다음 해 3월 회시를 보기 위해 다시 둘째 형과 함께 과거를 보기 위해 다시 상경하여 서울 객관에 머물렀다가 급환이 났다.
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바로 위의 형과 급거 귀향길에 올랐으나 과거시험을 엿새 앞둔 3월 16일 경기도 용인군 금량역에서 급사하였다. 향년 37세였다.
명리를 멀리하고 산수를 좋아하다
일찍부터 자연을 좋아했던 관계로 부친이 낙연(洛淵) 남쪽에 있는 도연(陶淵)이라는 곳에 선유정(仙遊亭)이라는 정자를 지어주었는데, 여기서 여생을 즐기려 하였으나 요절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운암(雲巖)’이라는 호는 자신이 살던 추월리(秋月里) 상류에 있던 운건암(雲?巖)이라는 바위 이름에서 딴 것이다. 김명일이 지은 시에도 천성적으로 명리를 멀리하고 산수를 즐기려 한 그의 이런 고매한 내면 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다음과 같은 시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 다시 두(頭) 자에 차운하여[又次頭字韻]

인간 세상 어디가 돌아볼만 할까 / 人間何處可回頭
늙어지면 이 골에서 여생을 보내리라 / 歲晩甘爲一壑謀
몇 이랑 개간한 밭 아침갈이로 맞춤이고 / 數畝山?宜曉駕
반쯤 절벽 달팽이굴 발길 놀리기 적당하네 / 半巖蝸構足淸遊
여름 비 그치면 낚싯대 드리우고 / 魚磯雨罷垂竿夏
약산 봉우리 가을 구름 걸치면 국화를 따지 / 藥峀雲深採菊秋
백발되어 물러나도 의지할 곳 있으니 / 白首??眞有地
속세의 번뇌에 빠지지 마세나 / 莫將塵惱苦淹留

가족이야기

: 김예범(金禮範)
생부 : 김진(金璡)
: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세경(閔世卿)의 딸
형제 :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김성일(金誠一), 김복일(金復一)
아버지를 도와 의성김씨 내앞파를 중흥시키다
의성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군(義城君) 석(錫)을 시조로 한다. 이 의성김씨가 안동에 터를 잡은 것은 시조로부터 9대손이 되는 김거두(金居斗)와 그 아들 김천(金?)이 풍산현으로 낙향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김천의 증손인 김만근(金萬謹)이 처가가 있는 임하(臨河)의 이웃인 내앞으로 이주하면서 의성김씨 내앞파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내앞파는 김만근의 손자대에 와서 실질적인 증흥기를 맞이하는데, 그 주역이 김극일의 아버지인 김진이다.
김진은 청운의 뜻을 버리고 일찍부터 고향에 정착하여 후학을 기르고 고장에 면학의 기풍을 진작시키는 한편, 자식 교육을 엄격히 하여 다섯 아들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키고 동기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등 집안을 일으켜 지역 사회에서 신망을 얻었는데, 김명일은 형제들과 함께 이런 아버지를 도와 의성김씨 내앞파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형제들과 함께 김씨오룡으로 불리다
형제가 모두 다섯이다. 장형은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이고, 둘째 형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이며, 바로 밑의 동생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고, 막내 동생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다.
이들 다섯 형제는 모두 대소과에 올라 ‘김씨오룡(金氏五龍)’이라 불렸고, 본가는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고 칭해졌다.

학문이야기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사빈서원(泗濱書院)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조목(趙穆), 이덕홍(李德弘), 정구(鄭逑)
이황에게 배우다
처음 소수서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후 부친의 권유로 바로 아래 동생인 김성일과 함께 이황에게 가서 배웠다. 이 때 이황은 손수 잠(箴)과 명(名)을 써주면서 격려하였다고 한다. 스승인 이황에 대해 깊은 존경의 마음을 지녔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 그의 그런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 퇴계 선생께 올림[上退溪先生]

삼십 년 좋은 세월 부질없이 보내다가 / 年徒負好光陰
때 늦어 모시게 되니 가슴이 벅찹니다 / 歲晩從遊感慨深
책 펼쳐도 어(魚)와 노(魯)를 구분 못하니 / 開卷未分魚魯子
열심히 한들 성현의 마음 깨달을 수나 있을지요 / 硏精何識聖賢心
방금 솟은 샘물 흐르려 하나 진흙이 다시 흐려 놓고 / 蒙泉欲達泥還混
낡은 거울 닦으려 하니 먼지 다시 앉습니다 / 舊鏡將磨塵復侵
어떻게 하면 평생 공부 닦을 수 있을런지요 / 爲問何修終事業
오늘부터라도 힘을 다해 찾아보렵니다 / 試從今日强推尋

저작이야기

문집명
『운암선생문집(雲巖先生文集)』
『운암선생문집(雲巖先生文集)』
『운암선생문집』은 1891년 필사 영인본 1책으로 간행되었다.
시 76수와 일기를 모은 계산일록(溪山日錄)이 실려 있으며, 부록으로 현손인 김학배(金學培)가 모은 「언행습유(言行拾遺)」, 김용(金涌)이 지은 묘지문,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묘표문, 김세환(金世煥)이 지은 묘갈명, 퇴계가 보낸 서찰 4편 그리고 금계 황중량이 지어 준 시(「봉증김언순행사(奉贈金彦純行史)」)가 수록되어 있다.

이 운암선생문집은 청계 김진과 그의 다섯 아들의 문집을 모아 의성김씨 문중에서 편집하여 발간한 『연방세고(聯芳世稿)』 권6에 수록되어 전한다.
시는 모두 47제(題)인데, 부형(父兄) 및 동문들과 주고 받은 증답시(贈答詩)가 대부분이다.

「계산일록」은 32세 되던 1565년(명종 20) 1월부터 1568년 5월까지 3년 6개월간 도산에서 이황에게 배울 때 스승 및 동문들과 주고받은 말과 그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소감을 적은 일기이다.

그 가운데 구체적으로 보면, 1565년 11월 20일 도산을 방문하여 12월 27일 천전(川前)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와 다음 해 8월 26~7일 양일간, 1567년 6월 6~7일 양일간, 1568년 1월 29~30일, 5월 20일·22일 등 모두 다섯 차례 도산을 방문했을 때의 일기가 실려 있다.

내용은 학문적인 것보다 스승인 이황의 언행에 대한 감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이황과 제자들 간에 오고간 대화와 그들 사이에 흐르던 사제 간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조목을 비롯하여 금응협(琴應夾)과 김부륜(金富倫), 금보(琴輔) 등 천전에서 도산으로 가는 길목인 와룡(臥龍)과 예안(禮安)에 거주하던 동문들과의 교유도 그려져 있어 퇴계 학파의 초기 모습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한다.

김명일은 1565년부터 죽던 해인 1570년까지 6년여 동안 일기를 기록하였는데, 현재 전하는 것은 문집에 실려 있는 것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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