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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진짜 직업과 위장 직업>의 줄거리:
소위 실직 상태입니까. 그러면 직업이 없다 말고, 위장 직업이 없다고 하십시오. 예수님 믿는 사람에게 진짜 직업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진짜 직업 활동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가 있을 뿐이지요. 위장 직업이나 위장 신분조차 실은 진짜 직업과 진짜 신분 활동을 위한 것입니다. 진짜 직업에 탈 많은 세상에서의 태평성대가 뒤따라옵니다.
내 진짜 직업과 위장 직업
(스가랴 3:1~10)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진짜 직업과 위장 직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진짜 직업과 위장 직업’
“극한직업”이라는 영화를 소개하며 말씀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극한직업은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대한민국에 웃음꽃을 피우게 한 코미디 영화입니다. “낮에는 치킨장사 밤에는 잠복근부 지금까지 이런 수사는 없었다.”라는 광고문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기발한 수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내용을 보면 경찰서의 마약수사반 형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마약사범 체포실적은 바닥이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다보니 상부에서는 해체압박을 해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인 고 반장이 국제범죄조직이 국내로 마약을 밀반입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하게 됩니다. 이제 죽기 살기의 비장한 각오로 팀원 네 명을 이끌고 잠복수사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벽한 잠입을 위한 특단의 조처로 범죄조직의 아지트 앞에 장사가 잘 되지 않았던 치킨집을 인수해서 위장창업까지 합니다.
그런데 팀원 중에 마형사는 어렸을 때 치킨 집을 했던 경력도 있고 절대미각의 소유자였습니다. 마형사가 만드는 치킨이 너무 맛있어서 입소문이 퍼지고 일약 맛집으로 발돋움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결국 연일 밀려오는 손님들 때문에 형사노릇은 잊고 치킨집 운영에 매달리게 됩니다. 본래라면 형사노릇을 하면서 여력으로 치킨집을 해야만 했지만 치킨집이 너무 잘 되자 형사노릇 20년 30년을 해봐야 손에 쥘 수도 없는 돈을 벌기까지 합니다.
점점 수사가 뒤로 밀리던 중에 우연히 범죄조직 소탕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제 고반장과 팀원들은 형사로써 범인을 잡을 것인가 사업가로써 치킨을 잡을 것인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내용은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영화 극한직업에서 드러나는 진짜 직업과 위장 직업 사이에서의 갈등이 오늘 본문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고반장과 동료들 같은 갈등을 겪는 일은 별로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진짜 직업과 위장 직업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갈등이 없었다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해보아야 합니다.
현재 신앙인들의 상태를 보자면 십중팔구를 넘어서 백중구십구는 진짜 직업을 버리고 위장 직업에 전념하여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신앙인의 진짜 직업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해주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8절을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학개 선지자의 촉구를 통해 중지되었던 성전재건 작업이 개시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와 그 동료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싹은 구약성경에서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이사야서 4장 2절에서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라고 하였고 11장 1절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 동료 제사장들이 싹과 함께 언급된 이유는 바로 이들의 행적이 예수님 시대의 예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오실 예수님을 믿고 연합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연결되고 결합된 모든 사람들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나 그 동료들과 같이 제사장을 진짜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평생을 성전에 머물면서 제사 업무를 담당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제사 중에는 절기 제사도 있고 개인별로 드리는 특별한 제사도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제사는 상번제였습니다. 1년 365일 빠지지 않고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어린양을 잡아 드리는 상번제야 말로 이들의 핵심 업무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과 같이 된다는 것은 곧 매일 상번제를 드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이런 말씀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특이하고도 기가 막히는 본문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환상은 스가랴서의 네 번째 환상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앞부분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모습도 나옵니다.
더러운 옷은 죄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악 된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육체를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더러운 옷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옷은 흔히 직업과 신분을 가리키는 소재로써 사용됩니다. 그리고 직업이나 신분은 관계로부터 주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아내 앞에서는 남편이라는 신분의 옷을 입습니다. 자녀들 앞에서는 아빠라는 신분의 옷을 입습니다. 부모님 앞에서는 아들이라는 신분의 옷을 입고 직장에서는 직장인의 신분의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을 상징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이 더럽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내게 주어진 신분들이 더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분이 더러워지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진짜 직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으로써 아내와 관계할 때에 마음에는 아내를 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남편과 아내로 지어졌기 때문에 부부관계는 인류최초의 인간관계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앞선 관계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본래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아담은 아담대로 하나님과 관계함이 우선되어야만 했고, 하와는 하와대로 하나님과 관계함이 우선되어야만 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이들의 실제 직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실 때에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아내와의 관계도 수행해 나가십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위장 직업을 진짜 직업으로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편으로 아내를 마음에 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제 남편이라는 신분의 옷은 더러워지게 된 것입니다. 아빠로써 자녀를 마음에 담았기에 아빠라는 신분은 더러워지게 되었고, 사장으로써 사업을 마음에 담았기에 사장이라는 신분의 옷은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신분은 어떤 것이든지 관계를 통해 주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그 관계를 마음에 담을 때에 신분에 더러움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더러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라는 신분이 더러워지면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개입하실 수가 없습니다. 부부관계를 하늘나라로 만들어 가실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마음에 담음으로써 아빠라는 신분이 더러워지게 되면 자녀와 아빠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늘나라가 임할 수 없게 됩니다. 가족 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서로의 신분의 옷이 더럽혀짐으로써 하나님이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직업이 제사장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사장의 주 업무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남편으로써 아내를 만날지라도 진짜 직업은 제사장이기에 제사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남편으로써 아내를 기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아내 앞에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대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아내가 들어옵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에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이 날마다 어린양을 잡아 상번제를 드렸던 것처럼 제사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 예수님과 아내가 들어온 나의 마음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가 들어온 마음이 죽었음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진짜 내 직업입니다.
남편이라고 하는 것은 위장 직업이고 위장 신분입니다. 이것이 위장인 이유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나는 여전히 아내의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극한직업 영화에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형사들이 치킨집 직원들로 보였던 것과 같습니다. 한 여자와 결혼해서 부부되어 살아가니 법적으로 남편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제사장을 진짜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기에 남편은 나의 위장 신분인 셈입니다.
나는 제사장입니다. 마음속에 아내가 들어온 나 자신을 제사물로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나의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아내로 채워졌던 마음이 비게 되자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아내에 대한 관계는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무 차이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육체는 하나님의 장갑이 됩니다. 내가 아내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내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아내에게 잘 해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말씀하시고 극진히 사랑해 가실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제사장으로써의 진짜 직업을 수행하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이는 남편에게만 해당되는 요구가 아닙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아내를 극진히 사랑한다고 하는데 내 남편은 나를 구박하고 윽박지르기만 합니다. 이럴 때에 아내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남편이 위장 직업이었던 것처럼 아내 또한 위장 직업입니다. 아내의 진짜 직업 또한 제사장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부족한 남편을 둔 아내로만 보겠지만 나의 진짜 직업은 남편이 들어온 마음을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이는 제사장입니다. 그럴 때에 부족한 남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대처해 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내라는 위장 신분을 주신 이유는 나를 통해 남편과 관계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신 이유는 잘 키워서 사회의 대들보로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빠와 엄마는 위장 신분입니다. 우리의 진짜 직업은 자녀를 담게 되는 마음이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자녀를 어루만지고 그 삶을 이끌어 가시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빠와 엄마라는 신분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9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돌은 싹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편을 인용하셔서 마태복음 21장 42절에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돌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기초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통해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이 관계가 벽돌처럼 쌓여가며 내 삶을 건축물같이 세워갑니다. 부부관계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관계하는 시간들이 모여서 삶을 쌓아갑니다. 제사장의 직업을 가진 우리의 삶의 기초석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날마다 어린 양을 잡아 상번제를 드리던 제사장들처럼,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세상이 들어온 나의 마음을 제사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마음을 제사로 드리고 나면 이 세상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 돌에 일곱 눈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써 나의 마음에 들어온 관계를 죽이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죽이는 제사장으로써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지켜보시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말씀에서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맺는 모든 관계를 바라보시며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으십니다. 그 뜻을 돌에 새기셔서 반드시 성취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등 돌린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일곱 개의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그것들이 작든 크든 성취해나가실 것입니다.
또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이라고 했고,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던 바와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의 죄악을 단번에 제거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을 날마다 복용함으로써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마치 암을 치료하는 약이 발견되어도 먹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담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죄악입니다. 이 죄악을 날마다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는 구약성경에서 태평성태를 상징합니다. 솔로몬 시대를 상징하였고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 시대를 예언하며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제사장을 진짜 직업으로 삼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일곱 개의 눈으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고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온 평강 가운데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초청하는 삶이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진짜 직업은 바로 제사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나의 직업은 위장 직업일 뿐입니다. 그 위장 직업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 위해 주신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놀랍고 참으로 기적이 따로 없음을 느끼며 한계가 없는 감사를 하게 됩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대로 주님을 믿음으로써 나의 직업이 제사장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들어온 나를 날마다 죽은 자로 고백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일곱 개의 눈으로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에 의해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며 끝없이 이웃을 초정하는 복지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