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안>
제목: 서울살이에서 배운 것
일자: 2023년 7월 16일 주일
[신명기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설교의 목적:
교회 창립 42주년을 맞아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점검해 보고 새로운 세대에게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당부하는 말을 하고자 한다. 설교 본문은 신명기 32장이며 모세가 광야시대를 마감하고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권면의 말이다. 그것은 모세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설교에서 한편으로는 암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중한 이 시기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주님이 이 메시지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부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설교 개요
1. 서울살이 몇 해런가!
2. 옛날을 기억하라
3. 우리들의 서울살이
4. 우리를 서울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
5. 서울살이로 우리가 얻은 것
6.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줄 유언 – 하나님의 경륜
1. 서울살이 몇 해런가!
작년 5월 어버이날 기념으로 뮤지컬을 보러 대학로에 갔습니다. 제목은 ‘뮤지컬 빨래’였습니다. 그 뮤지컬의 주제곡은 ‘서울살이 몇 핸가요?’입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저마다 이런 저런 곳에 방을 얻어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었습니다. 저도 서울살이 몇 해인지 세어보니 작년에 35년이었습니다. 이 기나긴 세월이 언제 지나갔는지 생각해 보니 마음이 뭉클해지고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일들이 마음의 장독대에서 고개를 내밀고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교회도 42년 전 서울 금호동과 행당동 산동네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이 동네가 말 그대로 산동네였습니다. 논골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서울에 있는 시골 같은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전국 각지에서 살 길을 찾아서 서울에 있는 이 산동네로 이주했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는 충남 온양에서 사업을 접고 올라오신 이인성 장로님 가정이 있고, 일거리를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녀를 낳고 양육하시다가 오신 최병길 장로님도 계십니다. 문정부 장로님 가정은 전남 신안군 도초라는 섬에서 올라오셨습니다. 장명옥 권사님은 6.25전쟁 때 평양에서 내려와 영등포에서 사시다가 시집와서 왕십리 토박이가 되셨습니다. 전남 보성에서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상경하신 김노순 권사님도 계십니다. 이덕순 집사님은 전남 광주 양동시장에서 태어나 강원도로 시집갔다가 행당시장으로 이사 와서 생선장수로 한평생을 사셨습니다.
우리들의 서울살이는 한 줄로 정리할 수 없는 너무나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 온 서울이주민들입니다. 어떤 분은 고향에 친척이 있고 어떤 분은 아예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온 고향이기에 다시 돌아갈 자리도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50대 이상의 세대가 서울에서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서울살이 몇 해런가 생각해 보신다면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낄 것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고 서울로 왔습니까? 서울에 와서 보니 우리는 이웃으로 만났고 그리고 저마다 절박한 소원과 사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특히 우리는 이제 42주년이 된 새소망순복음교회에서 지난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어떤 분은 여기서 태어났으며, 어떤 분은 여기서 결혼을 했습니다. 어떤 분은 여기서 자녀를 낳았으며, 어떤 분은 이제 손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의 장례식에 우리는 참석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새소망교회에서 만나 함께 기도하고 함께 노래하며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기쁨의 찬송을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가 손잡고 교회로 인도하던 아이들은 이제 다 자라 자기의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행당동 산동네에서 함께 지내던 이웃들도 하나 둘 살 길을 찾아 다시 경기도로 서울의 다른 곳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 남아서 오늘 우리가 처음으로 자리잡은 서울의 한 교회에서 기도하며 인생의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인생을 정리해 보아야 할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유언으로 남겨야 할까요? 오늘 교회 창립 42주년을 맞이하여 이런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설교는 지나간 우리의 한 세대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며, 앞으로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주는 유언과 같은 당부이기도 합니다.
2. 옛날을 기억하라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유언입니다. 유언의 노래입니다(신 31:30).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간절한 소원을 말할 때는 노래로 표현합니다. 제가 살던 시골 마을에는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와서 자녀를 낳고 농사를 지으며 얼굴에 깊이 패인 주름을 가진 여인이 드넓은 밭에서 혼자 김맬 때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이며 소원과 한이 담겨 있습니다. 모세도 한평생 이스라엘 자손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고 애를 썼으므로 당연히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명기 32장입니다.
그 노랫말 중에 모세는 다음과 같이 후대에게 말했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신명기 32:7
모세는 새로운 세대에게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부모나 어른들에게 물어서 알라고 권면합니다.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할까요? 요새는 옛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꼰대라고 부르며 조롱하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를 알아야 할까요?
과거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바탕이며 기초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과거는 뿌리에 해당합니다. 뿌리 없는 가지는 없습니다. 뿌리 없는 열매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왜 여기 있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모두 과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잊어야 새로운 미래를 비로소 꿈꿀 수 있으며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너무 쓰라린 상처를 입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조차도 자신의 일부임을 그는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이 노래를 듣고 이스라엘의 젊은이나 아이들이 부모나 어른들에게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질문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어른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그들은 어쩌면 지나간 40년 동안 광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들려줄 것입니다. 자신들과 선배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어떤 실수를 했는지 들려줄 수 있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홍해를 건너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있었던 열 가지의 재앙과 유월절의 신비에 대해서도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지낼 때 겪은 슬픈 과거입니다. 그때 출산을 앞둔 가정에서는 제발 자기 아이가 아들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자기 어린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더 먼 옛날 이야기를 들려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애굽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시절입니다. 야곱의 부인들과 열두 아들들의 이야기, 그리고 더 과거로 가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저 멀리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는 정말 먼 옛적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스라엘의 어른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주리라 약속하신 일과 그 자손이 어떻게 번성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기 위하여 시내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해마다 절기 때 되풀이되고 음식을 먹으면서 다시 기억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을 때 이스라엘의 어린 자녀들과 청년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여기에 와서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상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쉐마교육입니다. 여기서 쉐마라는 말은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한 세대를 보내고 새로운 세대에게 우리의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기 전에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유언을 남겨야 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3. 우리들의 서울살이
모세가 다음 세대에게 요청하는 것은 부모 세대에게 옛적 일을 물어보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부모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40년의 광야살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도 하고 자랑도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서울살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왜 서울로 올라왔으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요? 우리는 이 서울살이를 통해서 무엇을 배웠던가요? 그리고 우리는 이제 서울살이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면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건가요?
이 작업은 우리의 한평생을 돌아보는 작업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늘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 왜 그 일을 하는지 생각하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귀한 돈을 거기에 바칩니다. 우리는 언제나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저의 서울살이에 대한 저의 평가와 해석입니다. 서울에 와서 사는 각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서울살이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함께 이 행당동에서 살아왔고 같은 교회를 섬겼다는 점에서 저의 서울살이 해석에서 여러분도 참고할만한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모세처럼 노래를 부르면서 유언을 남기듯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노래하고 후손들에게 남길 당부의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왔던 1980년대 후반은 그 이전부터 많은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고 어떤 이들은 학교에 들어가 출세를 꿈꾸었습니다. 대부분의 청춘들은 시골에서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으므로 산동네나 변두리에 싼 월셋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올 때 마음에 품은 소원과 결심만은 절실했습니다. ‘꼭 성공해서 돌아가리라!’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많은 청년들이 시골 교회에서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고 후배들은 선물을 주면서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찻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저의 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기도와 함께 서울에 올라와서 자리를 잡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예배당입니다. 이제 서울살이가 시작되었으니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러 교회당에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 지역에 있는 새소망교회에 모였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서울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리를 잡고 일했습니다. 그 일은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생활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장사나 사업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공부하는 일입니다. 일의 종류는 달라도 모두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그 마음으로 일주일을 보내고 예배당을 찾아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때로는 작은 성공으로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일 가운데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또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다가도 실망하여 하나님을 등지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가 하면서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 아닐까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점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도 성장하고 우리의 삶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문득 둘러보니 우리나라도 부강해지고 왠지 선진국의 문턱을 넘은 것 같기도 합니다. 외국에 나가보거나 텔레비전으로 다른 나라 소식을 들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책을 싸는 보자기에 건빵을 받고 즐거워하던 추억은 마치 먼 옛날의 일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원조를 받는 나라의 어린이들이었으며 지금 필리핀이나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처럼 배급을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와 우리나라에 이렇게 복을 주셨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교회를 둘러보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우리의 삶은 나아졌는데 교회는 점점 비어 가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제 나이 든 세대만 남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서울살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지나간 40년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서울살이에 대하여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서울살이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요?
4. 우리를 서울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
여기서 다시 성경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브라함과 그의 부인 사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임(不妊)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은 그들에게 많은 후손이 생긴다는 의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고향을 떠났을 때 그는 어쩌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자손을 낳고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 부부에게는 후손을 얻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으니까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건져 주신 일과 하나님이 어떻게 이미 죽은 것 같은 자기 부부의 몸을 통해서 아들을 주셨는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정말 위대한 분이라고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점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올라가 아들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려는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모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다급하게 움직이게 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실 것을 다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계획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그를 향한 자신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고 천사를 대동하고 땅에 오셨을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방문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세기 18:17~19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강대한 나라로 만드시고 그 결과로 천하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정을 그들의 고향에서 떠나게 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살게 하신 이유는 단지 불임부부에게 자식을 주시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고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하만민을 생각하시는 이유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세상이며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세상의 공동선을 생각합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 만국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복을 받아 강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 후에 그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통하여 어떻게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할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식과 권속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고향에서 불러내셔서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복을 약속하셨을 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온 세상을 복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계획을 이루시려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신실한 분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올 때는 저마다 절박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는 서울에 왔고 서울에서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때로는 어려움을 겪었고 때로는 놀라운 은혜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제가 새소망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후로 여러분은 더욱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설교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성경이야기가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성경을 관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보여주는 해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단지 많은 자손을 주시는 그 목적을 위하여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녀들과 권속들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그와 함께 거주하는 가족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5. 서울살이로 우리가 얻은 것
여기서 우리의 서울살이를 다시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얼마나 성공했습니까? 우리는 서울에 올라올 때 기대하던 소원을 다 이루었습니까? 사실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의 노년에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아들 이삭뿐입니다. 아직 큰 민족을 이루기에는 너무 적은 규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뜻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자기와 자기 후손들을 통해서 성취될 것을 확신하고 아들 이삭에게 축복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한평생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씨앗을 마음에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자라 마침내 거목이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지금 전 세계 인구 중 절반 이상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존경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서울로 부르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서울로 올라올 때 우리는 가난했고 부족했으며 성공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분투와 노력을 기울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오늘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이 되고 그런 가문을 이루고 그런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약속으로 삼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신앙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대하던 후사 소식이 없이 나이가 들어갈 때 이렇게 하나님께 푸념했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창세기 15:2).
그로부터 시간이 또 흘러 이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결정적인 시간이 되었나 봅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언약을 상기시키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 하시고 많은 자손을 갖게 될 것이니 아예 이름을 바꾸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사라가 아이를 낳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속으로 말하기를 구십세 된 사람이 어떻게 출산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18
창세기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면 그렇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시간을 끌면서 그에게 자꾸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날에는 그 약속이 사실이라고 할례를 제정하시고 그 약속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그 부부의 이름을 바꾸게 하십니다. 마치 우리가 몇 년 동안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라는 인사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감질나게 하시는 걸까요?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는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이 불임부부인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손을 주시면서 그 과정에서 그 부부를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그 언약을 상속하며 유산으로 여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단지 아브라함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소원과 간구 속에서 아브라함이 진짜 구해야 할 것과 진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기다리시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지금 우리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에 집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하고, 또는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고 살아야 하는 팔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가 얼마나 가졌는지 늘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원이 얼마나 많은지 늘 비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서울살이로 얻은 것을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때로는 푸념하고 때로는 꿩 대신 닭이라는 말처럼 다른 것으로 안위를 삼으려 합니다.
과연 서울살이 40년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서울로 인도하실 때 과연 이 서울살이를 통해서 무엇을 주기를 바라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부인을 빼앗기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창세기 20장의 이야기입니다. 전에 아브라함은 애굽의 왕에게 아내를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2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으로 목숨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단지 오늘의 상식으로 쉽게 판단하는 것은 오해의 길로 빠지는 원인입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그 의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다시금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비멜렉 앞에서 높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인도 되찾고 재물과 명성도 더 크게 얻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1장에서 마침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아들 이삭을 품에 안으며 또는 두손으로 쳐들면서 아브라함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자신이 그토록 의심하고 갈망하던 일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아브라함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백세에 낳은 아들이 열댓 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아들이 중요하지만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아들을 그렇게 원하고 소원했지만 이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합니다.
그 아들이 이제 더 나이가 들어 결혼할 때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아들의 혼사를 위해 그의 종에게 단단히 맹세하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결혼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가 떠나온 고향으로 아들을 데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의 결혼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고향으로부터 떠나라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가나안살이' 40년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생명의 씨앗처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가는 어디서나 다시 새순을 내고 자라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서울살이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지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처음부터 계획하신 아니, 창조 이래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서울살이 36년을 통해서 얻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대학도 졸업하고 목사도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이삭과 같은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이 비로소 언약의 사람이 된 것처럼 저는 서울살이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저를 서울로 인도하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6.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줄 유언 – 하나님의 경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이 무엇을 자손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는지를 기억합시다.
어떤 노년의 부부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평소에 돈을 관리하며 부인은 남편에게 용돈을 타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중병에 들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불러 숨겨 두었던 은행통장을 내보이면서 어디에 얼마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남편은 병에서 나았습니다. 부인은 갑자기 횡재를 했다고 좋아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죽기 전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겨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 준비는 되셨습니까? 성경을 보니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그것은 죽을 때에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죽음이 임박했기에 자신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후손에게 남겨주고 알려주어야 하겠지요. 믿음의 사람들은 죽을 때 무슨 일을 했을까요? 히브리서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브리서 11:20~22
이삭도 부자요, 야곱도 부자요, 요셉도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을 때 한 일은 동일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믿음을 이어갈 후손들에게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말하고 축복했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반드시 자신의 유골을 이곳에 두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땅으로 가져가서 거기에 장사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서 결코 하란으로 그를 데려가지 말 것을 당부한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들의 유언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굳게 믿었으며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장차 이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유언은 40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말은 400년 동안이나 요셉의 후손들은 그 유언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요셉의 유언은 400년 간 전해져 그 후손들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어 칠흑 같은 절망의 밤에 그들을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죽을 때 어땠는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변변한 교회당 하나 짓지 않으시고 겨우 열두 명의 사도와 120명의 제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말년에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하나 둘씩 그의 곁을 떠나가고 오직 의사 누가만 남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이 실패하셨다거나 사도 바울이 실패한 목회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붙든 하나님의 언약은 그들의 믿음 그대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의 소망으로 승천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이 성취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세상이 올 것을 바라보고 그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보듯이 이렇게 수많은 민족과 백성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산을 남겨준다면 얼마나 많이 남기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많은 유산을 남겨준 것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불행하게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우리의 서울살이 40년 결론이 단지 눈에 보이는 건물과 재산뿐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건물도 재산도 돈으로 환산하면 사람에 따라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날아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서울로 인도하시고 오늘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지도하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을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진짜 유산으로 여기고 살기를 바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저와 함께 하나님의 경륜을 배우고 깨닫고 그것을 발견하고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터득했으며 그것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때 말년에 우리가 푸념을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사도 바울처럼 이제 내가 달려갈 길을 마쳤으니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도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을 다 마치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을 다 이루고 삶의 경주를 마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교회 설립 42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들의 지나간 40년 서울살이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잘 정리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물려줍시다.
그리고 다음 세대 여러분은 옛적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부모나 어른들에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들로부터 하나님의 경륜과 언약을 물려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이 위대한 믿음의 반열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후손들도 다 장차 성도들의 행진에 동참하여 함께 영광 중에 들어갈 것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