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른 이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조복시켜야 합니다.
‘쬐’ 라는 것은 자르는 것, 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끊고 무엇을 자릅니까? 사과를 자를 자릅니까, 바나나를 자릅니까? 야채를 자를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안에 있는 에고를 끊고 에고를 자르는 것입니다. 주된 핵심은 바로 에고를 끊는 것입니다.
티벳에서는 비구니 스님들이 쬐수행을 많이 합니다. 비구 스님들은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데 제가 어릴 때 저의 아버님은 쬐수행을 매일 밤마다 하셨습니다. 쬐수행에서 자른다는 것은 에고를 자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나, 나, 나, 내 것, 내 생각, 내 몸 이런 식으로 내 집, 내가 원하는 것, 그런 나라고 하는 것을 끊어내는 것이 쬐수행의 핵심입니다.
쬐수행에는 내적, 외적, 비밀의 쬐가 있습니다. 외적 쬐는 아주 한적한 화장터 같은 곳에서 수행 하고 있을 때 외적인 그 모습을 외적인 쬐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화장터나 무덤 같은 데 가서 쬐수행을 하나요? 그렇게 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습니까?(대중 웃음)
(지덕스님 : 한국에서는 허가를 하든 안하든 잘 안가지요).
티벳이나 인도에서는 화장터 같은 곳에 가서 할 수 있으니까 해보시면 좋습니다. 무섭고 아무도 없고 무언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한적한 곳에 가서 쬐수행을 하는 것이 외적인 쬐수행입니다. 외적인 쬐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화장터나 무서운 곳, 한적한 곳, 아무도 없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무서워지는 그런 곳에 가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수행을 할 때는 귀신들이나 주위의 다른 영가들이 시험을 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외적인 쬐수행을 하고 있는데 정말 마음이 그런지 안 그런지 시험을 한다고 합니다. 한적한 곳, 무서운 곳에 가서 수행을 할 때는 자신의 마음을 정말 잘 컨트롤 하고 잘 잡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위험합니다.
한적한 곳에 가서 누가 쬐수행을 하고 있는데 연기가 나가는 굴뚝(밥을 해먹고 차를 끓이고 나무를 때고 하니까 굴뚝이 있지요)에서 풍선 같은 것이 둥~둥~ 내려왔다고 합니다. 굉장히 신경 쓰이지요. 쬐수행을 열심히 집중적으로 하고 있는데 풍선이 딩~딩~ 내려오니까 너무 신경이 쓰여서 저것을 칼로 한번 찔러서 터뜨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참고 먹물로 글씨를 써서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풍선이 사라졌더랍니다. 풍선이 사라졌는데 그게 사라지고 나서 다시 보니까 자기 배에 그 글씨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그 풍선을 찔렀더라면 자신이 스스로 배를 찌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여러 가지 쓸데없는 환영들이 다 일어납니다.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쬐수행이 계합되지 못하면 한적한 곳에 가서 쬐수행을 할 때 착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국 쬐수행이란 아집과 마음, 에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 안이비설신의와 반영되어져 있는 색성향미촉법 그러한 의식의 생각들,
그것을 다 잘라내는 것이 쬐수행입니다.
쬐수행은 여러분이 해보셔서 알지만 라마 이담 귀신들 호법 신장들, 모든 분들께 내 몸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내 팔 가져가시고 다리 가져가시고 목 가져가시고 뼈도 다 뼈대로 발라드리고 살은 살대로 가져가신다고 관상을 합니다. 진짜 관상을 제대로 잘 하시는 분이 관상을 하면 귀신이나 빚쟁이나 이런 분들을 그것을 가져가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어떤 스님이 정말 관상을 잘 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앉아서 관상을 하면서 내 목도 가져가서 귀신이 먹는다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짜 목이 없어졌습니다. 귀신이 가져갔습니다. 목을 가져가니까 눈이 없어져서 안보여서 기도로 관상을 하고는 목을 찾아서 붙이려고 목을 잡고 있는데 귀신이 목을 또르르 굴려주어서 스님이 목을 다시 붙였습니다. 그렇게 관상을 잘 하는 그것이 내적인 쬐라고 얘기를 합니다. 자신의 오근, 몸을 다 주는 것이 내적인 쬐입니다.
비밀의 쬐는 제일 쉽습니다. 여러분 다 ‘나’가 있나요?
(지덕스님 : 한국말로 제가 (응아가) ‘나’ 라고 얘기했어요.)
티벳말로 ‘나’는 ‘응아’ 인데 애기들은 발음이 제대로 안되니까 ‘나’ 라고 발음합니다.
(대중들 : 아하~)
나라고 하는 것,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비밀의 쬐입니다.
애기들이 ‘나’ 라고 하면 어른들이 ‘나’가 아니고 ‘응아 다’ 라고 알려주십니다. 애기들이 쓰는 말하고 한국말하고 똑같습니다. ‘집착을 없애는 것이 비밀의 쬐입니다. 내가 만일 여러분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면 바로 이렇게 막지요?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있다’ 라는 증거입니다. 밖에 사람 동상이 있을 때 그 동상에 돌을 던지려 하면 동상이 방어를 합니까? 동상은 나라는 생각이 없어서 방어를 하지 않는데 우리는 나라는 생각이 있어서 무엇을 던지면 바로 피하고 가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나’ 라고 하는 것은 표시하고 끄집어내거나 지시하고 가리킬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던질 때 스스로 막는 것, 수비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내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할 것이 없습니다. 내일 아침 아추노장께서 오셔서 쬐수행 구전을 주실 것입니다. 쬐수행 구전은 내일 아추노장님이 하실텐데 제가 오늘 마음을 얘기하다보니 쬐까지 갔습니다.
우리들 마음에서 ‘나’ 라고 하는 것을 놓지 못하면 안됩니다. 우리들 마음에서 ‘나’ 라고 하는 것을 놓아야 하고 마음을 조복시켜야 합니다. 몸을 조복시키고 몸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조복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반드시 바꿔야 합니다.
승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하는 그것은 문화와 법이 섞여서 그렇게 된 것이지 그것으로 ‘나’를 버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옷을 바꾸거나 머리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살피고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무문관이나 산, 또는 한적한 곳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마음을 조복할 줄 안다면 말입니다.
마음을 조복하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조복해야 되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다른 이의 마음을 조복시키고 다른 이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여러분들의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조복시키십시오.
우리는 매일 늘 밖을 보고, 타인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이 사람이 왜 저러나, 저 사람이 왜 저러나하고 매일 마음의 초점을 그곳에 맞추고 얘기들을 하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밖에는 수백 만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을 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조절해야 합니다.
마음은 항상 자신과 함께 있습니다.
마음은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고 늘 같이 있으니 다스리기 쉬운 것이 마음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조복시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그냥 그대로 두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늘 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도 조복하지 못하면서 계속 바깥의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정말 옳지 않습니다.
적천보살께서 말씀하시기를 ‘익힌다면 그 어떠한 것도 어려운 것이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잘 조복시켜 나가는 것 그것 이상의 큰 공덕은 없다고 적천보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조복하지 못한 수행자들이 많으면 불법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다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조복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별로 의미도 없고 자신도 불편하게 하고 타인에게도 자꾸 해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까담파 수행자를 보면 그분들은 매일 명상을 하는데 명상을 하다보면 나쁜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에 흰 돌과 까만 돌을 갖다놓고 나쁜 생각이 일어났을 때는 까만 돌을 하나, 좋은 생각이 일어났을 때는 흰 돌을 하나 이렇게 놓으면서 명상을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는 까만 돌은 엄청나게 많고 흰 돌은 한 두 개 정도 밖에 없는데 나중에는 흰 돌이 엄청 많고 까만 돌이 한 두 개 밖에 없게 됩니다.
수행을 하면서 저녁에 밥을 먹기 전에 돌을 본다고 합니다. 까만 돌이 많으면 ‘너도 까맣고 나도 까맣구나 밥을 먹어서 무엇하겠는가?’ 하면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냥 잡니다. 그 다음에 흰 돌이 많아지면 ‘너도 희어졌고 나도 희어졌구나’ 하면서 ‘그래 맛있는 차, 좋은 차를 끓이자’ 하고 좋은 차를 마시고 잠을 잡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번뇌는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것이지 타인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번뇌를 다스리는 것은 자신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법을 성취한다, 법을 수행한다’ 고 할 때 경전을 많이 읽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큰 절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수행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은 수행이기는 하지만 수행의 가지입니다. 법의 곁가지입니다. 법의 진정한 주된 줄기와 둥지는 마음을 조복시키는 것입니다.
‘뽀또와 링리탕빠’ 라는 분은 늘 강가에 가서 우셨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 –세 가지 고통 고고, 괴고, 변고- 그 고통을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늘 그렇게 우셨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느 큰 스님께서 ‘아 정말 그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짭수치요’ 하시면서 귀의를 하셨습니다.
어떤 스님들은 경전에 대해서 법문하고 지혜를 밝히게 하는 말씀들을 많이 해 주시고 제자를 많이 두기도 하는데 그것은 법의 곁가지로서, 이루어지면 좋고 안되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 마음에 자애나 연민 그리고 보리심 등을 가지고 우리들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번뇌나 안이비설신의에 끌려가는 마음이 우리 본마음을 조절하고 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래의 마음이 원숭이 같은 마음을 조절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수행의 본체이고
그것이 최고로 공력이 큰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2018년 4월 9일 캄따시링에서 하신 켄보로쌀스님의 법문입니다.)
[출처] 불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4) (캄따시링 수행자의 길) | 작성자 khamtashi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