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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35
히브리서 9장 25-26절
성찬에 있어 주의해야 할 해석 가운데 하나가 가톨릭의 화체설입니다. 그들은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는 말씀을 떡과 포도주 위에다 반복하는 성별의 행위를 통하여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거나 바뀌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형체와 부수적인 요소, 즉 외양이나 냄새, 맛, 무게 등은 떡과 포도주로 남아 있지만 그 외에는 다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의해야 할 해석 가운데 또 다른 하나가 있는데, 루터파의 공재설입니다. 이들은 화체설에 대해서는 거부합니다. 변하거나 바뀌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장소에 두 본질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재 하되 떡과 포도주 그 자체의 속이나 밑에 임재 한다고 믿습니다. 떡과 포도주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본질적으로 떡과 포도주와 함께, 그 속에, 그 밑에 임재 하여 있어서 입으로 먹고 마신 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은 화체설의 의미도, 공재설의 의미도 아닙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8문은 화체설과 관련해서만 떡과 포도주가 정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지에 대해 묻고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하지만, 가톨릭의 해석이나 루터파의 해석은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요리문답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요, 그 자체가 죄를 씻는 것도 아닌, 다만 그것에 대한 신적인 증표요 확증이듯이, 성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의 떡이 실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도 아니요, 성찬의 포도주가 실제 그리스도의 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례의 본질과 속성, 다시 말해 성례적 환유법에 따라 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로 부를 뿐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부르는가? 떡과 그리스도의 몸,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피 사이의 유비 때문입니다. 즉 떡과 포도주가 이 땅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그의 몸과 흘린 피가 우리의 영혼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를 기념하여 이 거룩한 표들을 육체의 입으로 받아 먹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것과, 또한 우리 자신이 친히 고난을 당하여 우리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보상을 치른 것이 될 만큼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이 눈에 보이는 표와 보증을 통해서 확신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0문은 주의 성찬과 교황주의자들의 미사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80문은 초판(1562년 12월)에는 없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 배경을 보면 16세기 독일의 선제후(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가 다스리던 팔츠(Pfalz)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당시 팔츠를 다스리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가 성경 본문을 기반으로 한 신앙고백을 작성하도록 했는데, 이 일을 위해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요리문답의 내용을 작성하게 됩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우르시누스가 주된 저자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80문이 없었다가 프리드리히 3세의 요청으로 이 문항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판(1563년)부터 나오게 되는데, 김병훈 교수님의 책을 참고하면 당시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로마 가톨릭은 트렌트 공의회를 열어 화체설에 따른 미사에 대한 교리를 강조하고 이를 어기는 자들에 대해 저주를 선언하게 됩니다(1562년 9월). 이런 악영향에 대한 경계심으로 80문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80문 때문에 가톨릭이 핍박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그만큼 80문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내용은 무엇인가?
80문. 주의 성찬과 교황주의자들의 미사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신 유일한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해졌음을 증거하며(마26:28, 눅22:19-20, 요19:30, 히7:27, 9:12,25-28, 10:10-18),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고전6:17, 10:16-17), 그는 그의 인성에 따라서는 이제 땅에 계시지 않고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사(요20:17, 행7:55-56, 히1:3, 8:1-2) 거기서 우리에게 경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마6:20-21, 요4:21-24, 빌3:20-21, 골3:1-3, 살전1:10, 히9:6-10). 그러나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날마다 사제들에 의해서 베풀어지지 않으면 산 자든 죽은 자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라는 형체 아래에 몸으로 계시므로 그것들 속에서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와 고난을 부인하는 것이요 또한 저주받을 우상숭배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히9:26, 10:14,19,22-30).
가톨릭에서는 우리와 달리 일곱 가지 성례를 주장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중생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는 세례성사, 신자를 은혜 가운데 강하게 하는 견진성사, 신자를 은혜 가운데로 회복하게 하는 고해성사, 신자를 은혜 가운데 유지시키는 성체성사, 죽음과의 투쟁에서 신자를 강하게 하는 종부성사 혹은 병자성사, 그리고 결혼과 관련된 혼인성사, 사제직과 관련된 신품성사가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것은 성찬과 관련된 것으로 성체성사입니다. 이것을 미사라고도 부르는데, 우리시누스는 미사가 교회에 갖가지 오류들과 끔찍한 남용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 질문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하면, “어째서 미사를 제거해야 하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성찬과 교황주의자들의 미사가 서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사를 제거해야 할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사가 성찬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갖가지 것들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미사를 성찬으로 혼동해서도 안 되고, 성찬을 미사로 대치시켜서도 안 되고, 경건한 관리들이 교회에서 미사를 허용해서도 안 되고, 미사를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미사(Missa)란 무엇인가? 일단 ‘미사’라는 단어 자체는 라틴어를 한국 발음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물론 ‘미사’라는 용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히브리 단어와 관련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지지를 받는 입장은 아닙니다. 라틴어와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일단 라틴 교부들이 ‘사함’ 혹은 ‘씻음’을 의미하는 “remmisio”[레미시오]를 “remissa”[레미사]로 표현한 것처럼 “mittendo”[미텐도]에서 파생된 “missio”[미시오], 즉 보냄, 파견, 발송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missa”[미사]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미사란 보냄, 파견, 발송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어떤 이들은 고대 교회 예식에서 설교와 강론이 끝나고 성찬을 거행하기 전에 집사가 큰 소리로 “교회 내에 초신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나갈지라”라고 외침으로써 기본 교리를 공부하는 초신자들 등을 내어 보내는 한 가지 관례에서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의 집회나 회중이 폐회라는 방식에 근거하여 “가라, 이제 떠나도 좋다”(Ite, missa est)라고 외쳤던 것에서 유래를 찾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가라. 이제 구제를 위한 연보 순서다”라는 뜻으로 이해하여 보냄을 받는다, 혹은 가난한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던져진다는 뜻으로 그 유래를 찾기도 합니다.
무엇에서부터 왔는지를 분명하지 않지만 보냄, 파견이라는 뜻의 미사가 5세기쯤부터 교회에서 사용되면서 7세기경에 성체성사를 나타내는 용어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에 따라 주의 성찬을 파견을 위한 거룩한 제사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이 성사에 대해 어떻게 불리는가 할 때 성찬례, 주님의 만찬, 성찬 모임,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기념, 거룩한 희생 제사, 하나님의 거룩한 전례, 친교 등으로 불린다고 하면서 마지막에(1332항) 거룩한 미사로도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구원의 신비를 이루는 이 전례는 일상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신자들을 파견(missio)함으로 끝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찬과 가톨릭의 성체성사, 즉 미사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우선 성찬은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단번에 십자가에서 이루신 유일한 제사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값없이 사해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 준다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5절과 26절입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여기서 사도는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제사가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들의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들의 경우는 해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것의 피, 즉 황소와 염소의 피를 흘려야지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구약 제사에서 짐승을 잡아 피 흘렸다고 할 때 그 피 자체가 죄를 없이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10장 4절은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증거 합니다.
물론 이런 비교가 구약 성도의 경우 신약 성도에 비해 죄 사함에 있어 부족하다고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제사 제도를 통해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다는 측면에서는 신약 성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죄 사함과 신약의 죄 사함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 비교할 수 없음을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하고 또 제물인 짐승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지금 히브리서의 설명입니다.
어쨌든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특별히 히브리서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히브리서 7장 27절입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브리서 9장 12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0절, 12절, 14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미사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제사 혹은 희생제사로 이해합니다. 물론 가톨릭에서도 오직 십자가 대속만이 ‘유일한’ 제사임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1545항). 속량을 위한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에 완결된 유일한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제사는 오늘날 교회의 성찬 제사 안에 현존한다고 설명합니다. 사제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사제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유일성이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사제들을 통해 그 직무가 현존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참 사제이시고, 다른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사를 ‘제사’라 부르는 것은 미사가 ‘십자가 대속’이라는 ‘유일한 제사’의 재현 혹은 현재화요, 기념이요, 적용이기 때문입니다(1366항). 그래서 희생 제사라고까지 표현합니다. 하나님이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속량을 실현하시려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중개자로서 돌아가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단 한 번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셨지만, 그분의 죽음으로 그 사제직이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찬을, 눈에 보이는 제사를 남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제사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이루어진 피의 제사가 재현될 것이며, 그 기념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 구원적 효과는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죄의 용서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런 미사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사제들에 의해서 날마다 제물로 드려지지 않으면 산 자와 죽은 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가르친다고 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미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와 고난을 부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들도 유일한 제사라는 표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단번에 십자가에서 이루신 유일한 제사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값없이 사하셨습니다. 다시금 희생제사를 드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되새길 뿐 되풀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가 있다면 그것은 예식으로서의 제사가 아니라, 도덕적 행위로서의 제사, 즉 감사의 제사 혹은 찬송의 제사밖에 없습니다.
성찬과 가톨릭 미사의 차이에 대하여 요리문답은 계속해서 주의 성찬은 우리의 믿음의 조목에 따라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에 있어서 지금 하늘에서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며, 또한 떡과 포도주의 부수적인 요소들 밑에 숨겨져 계신 것이 아니라 그가 성찬에서 그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사 믿음으로 먹고 마시게 하시며, 또한 우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에게 접붙이셔서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하신다는 것을 증언해 준다고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8장 1절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그리고 4절은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은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심으로 그의 인성은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성찬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임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전 그리스도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임하시되 육신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셔서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고 또한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찬은 하늘에서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즉 성찬은 그리스도를 위에서 찾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고 권면합니다. 스데반의 경우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던 것입니다(행7:55,59).
그러나 미사는, 떡과 포도주가 성별의 덕분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 그의 몸과 피가 성별의 행위 속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진다는 것, 그 몸과 피가 육체적인 방식으로 떡과 포도주의 형체 밑에 숨겨져 있다는 것, 사제의 손이 진정 그 몸과 피를 다루고, 운반하고, 또 그것들을 교회원들이 받아 입으로 먹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또한 미사는 떡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배할 것도 가르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받을 때 성체에 대한 공경으로 무릎을 꿇거나, 주님에 대한 숭배의 표시로 깊이 몸을 숙여 절하는 모습을 취하게 되는데, 이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378항).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저주 받을 우상숭배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예배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신 일이 없는 이상, 그 어떠한 피조물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어느 한 물건이나 장소에다 제한시킬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임재 한다는 사악한 논리를 폐하여야 하고, 가증한 것으로 여겨 배격해야 합니다. 이런 논리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살필 때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형상숭배와 관련해서도 나타납니다. 가톨릭의 경우 하나님과 더불어 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까지 형상을 만드는 것에 대하여 허용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들에게 경배할 목적이 아니라 평신도를 위한 책처럼 여기거나 다른 목적들로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공의회인데, 787년 제 2차 니케아 공의회 혹은 제 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는 다음의 결정들도 있었습니다. “형상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형상 그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형상을 바라보라. 그러나 그 속에서 보는 것을 마음으로 경배하라.”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다음의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날 때마다 항상 그것에 경의를 표하라. 그러나 형상을 경배하지 말고 그것이 그림자로 보여주는 그것을 경배하라.”(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 p.831)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따라 오직 참된 것만 고집해야 합니다. 가톨릭은 한편으로는 참된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거짓된 것을 섞습니다. 거짓된 것이 비판을 받으면 수정하기도 하지만 결코 거짓된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참된 것에 교묘하게 거짓 것을 섞어 마치 참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말할 뿐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볼 텐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1문입니다.
81문.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답. 자기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하면서도 자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음을 신뢰하며 또한 자기에게 남아 있는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가려진다는 것을 신뢰하는 자들과, 또한 자기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고 자기의 삶이 바르게 고쳐지기를 사모하는 자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과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은 자들이 성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그들 스스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고전10:19-22, 11:26-32).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로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자기들의 죄를 시인하고 그것에 대해 진정 가슴 아파하는 자여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들의 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자여야 합니다. 셋째는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고 그들의 삶이 더욱 거룩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자여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오직 참된 믿음과 회개 가운데 사는 자만이 주의 성찬에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성찬 제정과 관련하여 언급하고(고전11:23-26) 난 뒤, 이어지는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7-29) 특히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권합니다. 살피지 않고 먹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연 자신에게 이런 것들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묻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로 인한 양심의 평안이 있는지, 나아가 겉으로나 속으로 나타나는 참된 믿음의 결과들 혹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에 순종하고자 하는 신실한 바람과 갈망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성경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마7:20),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 있어서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열매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반면 요리문답에서도 설명하는 것처럼 외식하는 자들과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은 자들은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자가 성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고린도전서 11장 29절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 안에는 자기 죄를 먹고 마신 결과 30절에서 너희 중에 약한 자가 생겨나고, 병든 자가 생겨나고, 잠자는 자 즉 죽는 자도 적지 않았다는 말씀까지 하고 있는데, 그만큼 성찬에 참여하는 일에 대하여 주의를 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이 일을 위하여 교회도 성찬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도록 권하겠지만, 결국 최종적인 분별은 성찬에 참여하는 각 개인의 몫으로 있습니다. 다만 자신을 살펴야 한다고 할 때 성찬 참여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 상태나 내 기분에 따라 결정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도 주의 성찬 앞에서 합당한 자들이 아니라, 언제나 부족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을 제정하시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되 아무렇게나 나와서는 안 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점검하고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2문은 성찬 참여에 있어 배제되어야 할 사람은 누군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자신을 살피고 난 후 성찬에 참여하도록 했다면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주의를 요하고 있지만, 특별히 교회적으로 성찬 참여를 금해야 할 자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82문. 자신이 믿지도 않고 불경하다는 것을 자신의 고백과 삶으로 친히 드러내 보이는 자들에게도 이 성찬이 허용됩니까?
답.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이 더럽혀지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온 회중을 향하여 임할 것입니다(시50:14-16, 사1:11-17, 66:3, 렘7:21-23, 고전11:17-32).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는 그런 자들이 삶을 회개했음을 보이기까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규례를 따라서 천국의 열쇠들로 그들을 성찬에서 제외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일단 교회는 다음과 같은 자들을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용합니다. 첫째 자신을 살피고 주의 죽으심을 기념할 수 있는 적정한 연령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린 아이들은 신자의 수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주의 말씀에 따라 주의 성찬을 기념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까지, 그리고 자신을 살필 수 있는 나이가 되기까지 성찬 참여를 금합니다. 그러나 적정한 연령이 되면 무조건 성찬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둘째 세례를 받은 자에 한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세례를 받은 자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유아세례를 받았다면 적정한 연령이 되어 성찬 참여를 위한 공적 신앙고백을 통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셋째, 진정으로 참되게 하든, 혹은 은밀한 외식으로 하든 말과 행실로 참된 회개와 믿음을 드러내 보이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이후 성찬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지상 교회 안에는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있기 때문에 말과 행실로 회개와 믿음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 때 그것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외식인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판단에 따라 세례를 주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지상 교회의 한계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은밀하게 감추어진 것에 근거하여 판단할 수는 없기에 적어도 말과 행실로 회개와 믿음을 드러내 보이는 자들에 한해 세례를 주고 성찬에 참여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을 믿는다고 공언하면서도 계속해서 불경하고 죄악 된 삶을 사는 자들, 돌이키려고 하지 않는 자들, 그리고 그것이 교회에 알려진 자들에 대하여 교회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82문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성찬 자체를 행할 수도 없지만, 교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믿음을 고백하지도 않고 불경하다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또한 삶으로 드러내 보인다면, 혹 그가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런 사람에게 성찬을 허용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그런 사람을 권징 해야 합니다. 권하고, 권해서 돌이키지 않으면 징계까지 해야 합니다. 징계의 한 부분이 성찬 참여를 금하는 것인데, 만약 이런 자임을 알고도 권징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 가운데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런 자들이 삶을 회개했다는 사실을 보이기까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규례를 따라서 천국의 열쇠들로 그들을 성찬에서 제외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여기서 천국 열쇠들에 대한 부분은 다음 주에 살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