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영운 -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3. 말씀의 첫 씨가 뿌려진 ‘오리건’주 ‘유진’시
1 서구에 원리 말씀을 선포하려는 일념으로 학생(오리건주립대학)의 신분을 택하여 미대륙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59년 1월 4일이었다. 그리고 말씀의 씨가 처음으로 뿌려진 곳이 ‘오리건’주 ‘유진'시였다.
2 나는 어린 4남매와 살아가고 있는 과부의 댁에서 아이를 돌봐주는 조건으로 기숙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게 됐다. 처음에는 1주일에서 5일은 공부와 아이를 돌보는 데 시간을 빼앗기고 토요일과 일요일만 전도를 할 수 있었다.
3 그러다가 그 해 5월, 70개의 기독교 잡지에 원리를 소개하는 글을 투고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소집회를 찾아다니며 마음이 클클하여 새로운 진리와 영적 체험을 갈구하고 있는 개인들을 찾아서 말씀을 들려주었고, 또 그러한 개인들을 통하여 찾아진 소‘클럽’에서 원리를 가르쳤다.
4 경우에 따라서는 소교회들과 접촉이 되어 원리 강의를 부분적으로나 혹은 전체적으로 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얻어진 식구를 데리고 정기집회를 하면서 개인지도하고 심령을 길러주며 원리를 서서히 무장시켰다. 처음에 들어온 식구들은 ‘도리스 월더’ ‘폴린 필립’ ‘아일린 웰치’ 부부 ‘패티와 게일린 펌프리’ ‘죠지 노튼’ 등 수인이었다. 이후 직접 선교 일선에서 뛰었던 경험을 토대로 뜻의 세계적인 발전 과정을 증언하고자 한다.
5 1960년 4월 14일, 유진시에서 오크 힐로 이사했다. 식구들을 기르면서 순회하는 한편 원리의 재번역을 하여 ‘IBM 이그제큐티브’로 원고를 타이핑하며 매일 16시간씩 일을 강행했다. 그리하여 1,200권을 인쇄하여 출판했다.
6 또한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포틀랜드’ ‘캔지’ ‘세일럼’ ‘고발 리스’ ‘레바논’에 산재해 있던 구도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원리강의를 했다.
7 1961년 11월, 식구들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고서 본격적인 전도에 나섰다. 유진시는 보수적인 도시이나 샌프란시스코는 국제도시로서 새 종교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개방적 도시이기 때문이다.
8 3층으로 된 집에 2층과 3층을 세 얻어 미국 최초의 센터를 열었다. 교회라고 부르지 않고 센터라고 부른 것은 청년층에게는 교회라는 말은 전혀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7~8인이 센터 안에서 기거하면서 집회를 하고 사람들을 초대해서 강의를 들려주게 됐다.
9 이 최초의 센터는 샌프란시스코 콜 스트리트 410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다. 데리고 있던 식구들은 30세 전후의 청장년들이다. 모두들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저녁시간과 주말에 전도하여 사람을 찾고 직장에서 받는 수입으로 센터의 생활을 운영, 일체의 활동비와 출판비를 충당했다.
10 1961년 9월 18일, ‘The Holy Spirit Association for the Unification of World Christianity’를 법인단체로서의 인가를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신청하여 법의 보호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위에 올려 놓았다.
11 1962년 1월, 처음으로 3층 건물을 식구들이 번 돈으로 사서 센터로 쓰게 되었는데 그곳은 샌프란시스코 머서닉 애비뉴 1309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12 1963년 10월 19일, 나의 영주권을 받았다. 이때까지 전도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다.
• 교회로 찾아가서 예배 후에 사람을 만나 전도.
• 아무 곳에서나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개인전도.
• 가정방문 전도.
• 신령하거나 좀 색다른 소집단들을 찾아가서 그 지도자들에게 강의.
• 소강당을 개설, 신문에 광고를 내어서 강연.
• 여기저기 초빙 받아 가서 강연.
• 녹음기를 사용하여 여러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시 강의도 들려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창조원리, 또 다른 사람에게는 타락론 등을 들려주었다.
• 라디오로 12회 강의.
•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시가행렬하며 가두 전도.
• 전도지를 나눠주며 사람들을 초대하여 강의.
• 대학 캠퍼스에 가서 전도.
• 기성 신학교 특강 시간에 가서 강의, 토론.
• 저녁이면 유니온 스튜던트 학생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전도.
• 공원을 찾아다니면서 개인 전도와 노방전도 및 강의.
• 직장에서 친구를 사귀어 전도.
이런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전도를 하였다. 그 후로 내 뒤를 따르던 여러 식구들은 이런 방법들을 그들의 개척지에 가서 되풀이했다.
13 1962년 6월부터 식구들을 캘리포니아 주 내의 여러 도시에 파견하여 개척 전도를 시키고 나는 계속 순회하면서 강의를 도왔다. 그 결과 ‘산 호제’ ‘버클리’ ‘포틀랜드’ ‘벌링감’ ‘해이 워드’ ‘로스앤젤레스’ ‘프레즈로’ ‘새 클라 멘토’ 등으로 확장되었다.
14 1963년 9월 3일에 ‘뉴에이지 프론티어’라는 월보를 발간하여 산재한 식구들의 신앙 관리를 위해 힘썼다. 거기에는 선생님의 말씀과 동향, 나의 설교, 한국과 일본 식구들의 활동보고, 복음서의 연구, 세계 대종교의 소개, 기타 교육적 가치가 있는 재료들을 실었고, 산재한 식구들에게서 온 간증과 은혜스러운 편지와 활동보고를 포함하여 1973년까지 10년간 계속했다.
15 1963년 5월 첫 주말, 3일간의 원리 연구와 간증과 원리강의 연습, 육체 운동, 기도, 화동 등의 프로그램을 갖고 수련회를 개최했다. 이것은 개척 나간 식구들이 원리를 대강 들은 식구들을 데리고 주말에 샌프란시스코로 오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이 수련 기간에 은혜받고 기뻐하면서 입교를 결심하였다.
16 1963년 말까지 입교한 식구들 중에는 ‘오즐라 슈만’ ‘페이터 코흐’ ‘오라 스쿤’ ‘에드윈 앙’ ‘어네스트 스튜워드’ ‘존’과 ‘샌디 핑커 톤’ ‘파울’과 그의 아내 ‘크리스텔’ 그의 아들 ‘클라우스 워너’ ‘메리’와 ‘짐 플레밍’ ‘고든 로스’ ‘로웰 마틴’ ‘테디 베르하엔’ ‘죠 메이슨’ ‘필립 벌리’ ‘더글라스 번스’ ‘엘케 밴더스톡’ ‘레베크 살로넨’ ‘요한 밴더스톡’ ‘바아바라 코흐’들이 차례로 입교했다.
17 그리하여 ‘도리스’는 1,500리 떨어진 ‘산 호제’로 보내고 ‘게일린’은 500리 떨어진 ‘벌링감’으로, ‘폴린’은 120리 떨어진 ‘버클리’로 파송했다. 가는 노자는 자기들이 벌어서 준비하였고 어떤 식구에게는 소형자동차 한 대씩 주어서 내보냈다. ‘도리스’와 ‘폴린’은 가자마자 식당의 여급이 되어서 자립의 길을 찾으면서 전도를 하였고,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게일린’은 우체부로 취직하여 ‘벌링감’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18 ‘산 호제’에서 식구들이 늘어나 자체적인 힘으로 그곳을 지킬 수 있게 되었을 때 ‘도리스’와 ‘오라’(‘도리스’가 전도한 여자 식구)를 미국에서 셋째로 큰 도시인 ‘로스앤젤레스’로 보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찾아진 식구가 ‘테디’라는 화란 청년이었다. 그는 2년 후에 조국 복귀를 뜻하고 화란으로 귀국하여 ‘암스테르담’에서 개척을 시작했던 것이다.
19 ‘버클리’에도 북가주 대학교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대학생 전도가 시작되어 전도의 기반이 굳혀지자 ‘폴린’을 ‘캘리포니아’의 수도 ‘새크라멘토’로 보냈더니 그곳에서 얻어진 식구가 ‘파울 워너’ 부처였다.
20 ‘루터’ 교인이었던 탓으로 그들은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싸우다가 드디어 식구가 되었고, 1년 후에 가산을 정리하고 조국 독일을 복귀하겠다고 귀국하였다.
21 그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계속 식구들이 들어왔는데 ‘오즐라 슈만’이라고 하는 독일 여자식구가 들어오면서 그의 전도로 ‘페이터 코흐’가 들어왔고 그의 누이 ‘바아바라’가 1년 후에 들어왔다. ‘폐이터’는 대학에서 토목과를 전공하고 있었고 ‘바아바라’는 실내 장치를 공부하여 취직해 있었고 ‘오즐라’는 회사 사무원으로 모두 실력 있고 재간 있는 사람들이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