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사는 박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건립과 유실을 거듭하다가 1972년 12월에 현재의 위치인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515에 재건되었다.
사당이 위치한 밀양박씨 복야공파 문중의 선산(先山) 일대에는 박연을 비롯한 6인의 위패를 봉안한 세덕사, 그의 사촌형인 국당, 박흥생의 묘비, 박연의 묘소, 쌍효각 등이 있다.
난계사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악성인 난계 박연(1378∼1458)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세종을 도와 음악을 정비하는 데 많은 공을 세운 박연은 악률에 정통하여 세종 7년(1425) 아악의 율조와 악기의 그림, 악보를 같이 실은 <악서>를 편찬하였고, 1427에는 편경 12매를 만들어 자작한 12 율관을 따라 직접 연주하기도 하였다.
사당 일대에는 박연을 비롯한 6인의 위패를 봉안한 세덕사와 박연의 묘소, 그의 사촌형인 국당 박흥생(朴興生)의 묘비, 쌍효각(雙孝閣)등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난계사 蘭溪祠’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난계의 동상과 비가 방문객을 맞이하는 사당 입구부터 외삼문까지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나무도 많아 휴식하기도 좋다.
난계사 주변엔 1965년부터 시작된 난계예술제라는 칭호로 행사를 추진하는 여러 시설물들이 있다.
초창기에는 경연대회를 하는 정도로 소략하게 출발했지만 1975년부터 전국적인 행사로 승격되었다. 1998년 제31회 행사부터 명칭을 난계국악축제로 교체하였다.
국악의 거리에서 외길을 따라 고당리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난계 박연 선생이 태어난 가옥이 있다. 난계 박연은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손꼽힌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음악가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타계했다. 박연은 악보와 악기를 정리한 악서를 편찬하고 대고와 석경 등 아악기를 제작했다. 또, 궁중악을 완성하고 악기를 조율하는 편경을 만드는 등 국악을 발전시키고 완성한 국악의 아버지다.
세조 2년(1456년)에 삼남 계우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할뻔하였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화를 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 4년(1458년) 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박연이 낙향할 때 강을 건너며 배 위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그 피리 소리에 가던 배도 멈추고 쓸쓸한 느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5월 안채와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생가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측면 1칸은 퇴칸 구조이며 정면 2칸만큼 우물마루를 설치하고 한쪽에는 부엌과 곡식창고를 부설한 고미 반자에 우진각의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다.
용마루가 짧고 내림마루가 길게 늘어진 모습이 특이하다. 부속 채는 1동으로 외양간, 광과 방 1칸인 초가지붕으로 되어있다.
이 심천면은 서부에 월이산(551m)·국사봉(502m)·어유산(480m) 등이 솟아 있다.
면의 남부와 동부에서 각각 흘러든 금강과 송천·영동천이 심천리 일대에서 합류하여 면의 서쪽으로 곡류한다. 평야는 면 중앙의 영동천 연안과 서부의 금강 연안에 소규모로 발달했다. 수박·딸기·사과 등이 생산된다.
심천유원지·옥계폭포·원각사 등의 관광유적지가 있으며, 순복음기도원이 들어서 있다.
행정구역은 심천리·단전리·길현리·구탄리·장동리·고당리·마곡리·기호리·명천리·금정리·약목리·각계리·초강리·용당리 등 14개리가 있다
그중 고당리에는 이런 다양한 유적지들이 분포한다 이곳엔 또 다른 난계 박연 관련 유적 그 후손이 세운 호서루가 있다
금강과 영동천 합수지점에 건립한 정자로 1553년 처음 건립된 뒤 소실된 것을 밀양박씨 종중에서 1959년 중건하였다.
1553년 읍청 박사종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1996년 4월 15일 영동군 향토유적 제37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고당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원추리, 쑥부쟁이 등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