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35
요한복음 1장 1, 14절 [8장 2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은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1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고 정하시길 기쁘게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중보자이신 예수를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그리스도가 되도록 하셨는데, 선지자 직분, 제사장 직분, 왕의 직분을 행하도록 정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와 구원자, 만유의 후사, 세상의 심판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고 정하셨는데, 바로 그에게 택자를 그의 씨(후손)가 되도록 영원 전부터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택자는 처음부터 정해지기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역사 속에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지만 선택된 그들도 예외 없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8장 1항 나머지 내용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해진 때에 구속되고, 부름 받고,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영원 전부터 예수에게 그의 씨가 될 자들에 한해서 소위 구원의 서정이라고 하는 이 모든 내용까지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2항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는데, 핵심은 하나의 위격(인격)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2항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이며, 성부와 한 본질이며 동등하신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때가 찼을 때 인성을 취하시되(요1:1,14, 요일5:20, 빌2:6, 갈4:4) [사람의] 모든 본질적 속성들 및 그것들로 말미암은 공통적 연약함을 지녔으나 죄는 없으셨습니다(히2:14,16,17, 4:15). 성령의 권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 안에 잉태되어 그녀의 본질로부터 출생되셨습니다(눅1:27,31,35, 갈4:4). 그러므로 완전하며 구별된 두 개의 전 본성들, 즉 신성과 인성은 변환이나 혼합 없이 한 위격 안에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결되었습니다(눅1:35, 골2:9, 롬9:5, 벧전3:18, 딤전3:16). 그 위격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지만 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롬1:3,4, 딤전2:5).
이 부분은 기독론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과 관련해서 교회 역사 안에서 다소 많은 이단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250/256-336년)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아리우스와는 반대로 아폴리나리우스(310-390년)는 결국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네스토리우스(386?-451년)는 한 위격(인격) 안에 두 본성과 관련해 하나의 위격(인격)임을 부인했습니다. 두개의 위격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유티케스(에우티케스, 380?-456년?)는 예수님의 두 본성을 부인하고 하나의 본성임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모든 주장에 대하여 교회사 안에서는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통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를 통하여, 또 에베소 공의회(431년)와 갈케돈 공의회(451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했던 겁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살피려고 하는 제8장 2항은 이런 내용의 핵심 부분과 관련되어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신앙고백서는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이며, 성부와 한 본질이며 동등하신 삼위일체의 제 2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때가 찼을 때 인성을 취하시되’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부분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먼저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3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신성의 통일성 안에서 한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으로부터 세 위격들인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신성의 통일성 안에서 한 본질이라는 것은 동일본질이라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세 위격이 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동등하십니다. 그러나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질서가 있는데, 성경은 성부가 성자나 성령으로부터 존재하지 않고 발생하거나 발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반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런 관계성 때문에 신학자들은 성부를 제1위격, 성자를 제2위격, 성령을 제3위격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겁니다.
지금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부터 말씀이 계신다고 하면서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후 내용을 통해 말씀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는 것은 시간의 시작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 이전부터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전합니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이며,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부와 한 본질 즉 동일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사의 이단 가운데 아리우스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리우스는 말씀이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했는데, 골로새서 1장 15절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보다는 먼저 나셨지만, 나셨다는 것은 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영원하지 않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특히 그는 성자가 성부와 유사하지만 성자의 존재가 성부의 존재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단 골로새서 1장 15절에 대한 해석은 모든 피조물처럼 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제2위격이신 영원하신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기 때문에 피조물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성자도 성부와 한 본질입니다. 한 본질이라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결코 유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었는데, 거기서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으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이시오’, 또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니’란 표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창조되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요’란 표현까지 쓰고 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신조를 조금 더 수정하여 고백하였는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입니다. 거기서는 ‘만세 전부터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독생자이신’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지면서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한 본질, 다시 말해 동일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등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자는 제2위격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요,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습니다. 나셨다고 해서 아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되지 않은 분으로 나셨습니다. 우리처럼 피조물이 아닌 분으로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때가 찼을 때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4장 4절 표현을 가지고 온 것으로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바가 때가 되어 실행되는 역사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었는데, 오늘 본문으로 읽은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6절과 7절은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다시 말해 동일한 본체셨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이 사람으로 오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그것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인 겁니다.
신앙고백서는 여기서 좀 더 분명하게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시되, 사람의 모든 본질적 속성들 및 그것들로 말미암은 공통적 연약함을 지녔다고 고백합니다. 인용되고 있는 성경 구절을을 통해 보자면, 우선 히브리서 2장 14절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여기서 혈과 육은 문자적으로 하자면 육신을 의미하지만,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뜻하는 환유법으로 보는 것이 정당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영혼과 함께 육체를 가진 인성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성자 역시 동일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16절고 17절도 보시면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붙들어 주려 하신 대상은 택하신 백성입니다. 혈과 육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비교하기를 천사와 비교합니다. 천사는 혈과 육이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영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처럼 혈과 육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자께서는 소위 ‘천사성’을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야지만 자기 백성을 붙어들주기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속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사에 보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참된 몸과 이성 있는 영혼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급한 인간의 육신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몸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몸을 취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현설(Docetism)입니다. 여러분, 1세기에서 3세기에 활동했던 영지주의(Gnosticims)는 물질은 악하고 열등하며, 영은 선하고 완전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이들은 그리스도가 저급한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해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우스 이후 아폴리나리우스라는 사람은 아리우스에 반대하여 신성을 강조하되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축소하고 말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는 혼과 육으로만 오셨고 사람의 영을 대신하여 ‘말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는가 하면 인간의 죄성은 혼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을 취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죄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영 대신에 신성의 로고스를 둠으로써 그리스도께는 죄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참 사람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폴리나리우스에 대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조금 더 수정하여 고백할 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그는 우리 인생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내려 오시되, 육신이 되사, 인간이 되셨으며’라는 내용에서 ‘그는 우리 인생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오시되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이 되사, 인간이 되셨으며’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다’는 사실과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이 되사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첨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취하셨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와 같은 연약함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셨다고 해서 배가 고프지 않고 목이 마르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함을 지니셨기 때문에 배도 고프고 목도 마릅니다. 피곤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쉬셔야 했습니다. 밤이 되면 주무셔야 했습니다. 육체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실제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비록 수없이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셨지만, 처음부터 장성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태중에 계셨고 태에서 나오셨으며, 우리처럼 자라기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의 증거가 그것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 그래서 사람의 모든 본질적 속성들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연약함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동정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지만 죄는 없으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공통적 약함을 지녔으나 죄는 없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미 제6장 3항에서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살필 바 있습니다. 어떻게 전가되는가? ‘그들은 일반적인 출생에 의해’ 그렇게 됩니다. 일반적인 출생이란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의 수정을 통해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출생을 따라 난 자는 누구도 예외 없이 아담의 죄가 전가됩니다. 원죄인 죄책과 부패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일반적인 출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 안에 잉태되어 그녀의 본질로부터 출생이 되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십시오. 27절에서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은 했지만, 처녀임을 말씀합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하는데 31절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여기에 대하 천사가 대답합니다.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정요석 교수의 책을 보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더 놀라운 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체는 마리아의 태속에서 자라나 태어나셨다고 하면서 마리아로부터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으시며 무럭무럭 자라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을 인하여 마리아의 죄로부터는 차단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위해 공급되는 모든 것을 받으면서도 죄에 대해서는 결코 공급되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와는 달리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의 무흠수태 교리, 즉 마리아가 원죄 없는 잉태를 하였다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원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게 보호되셨다는 것을 주장하는데(가톨릭 교회 교리서 491항 213), 하나님은 죄인인 사람 마리아 안에 죄 없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두시고 거기서부터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출생하게 하시되 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어떻게 못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톨릭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마리아조차 죄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리아에 대하여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 ‘성령께서 빚어 만드신 새로운 인간’이라고 칭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주장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91항 214).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마리아조차 중보자가 되는 것처럼 그의 이름으로도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신앙고백서의 내용으로 오면, 하나님이신 분이 인성을 취하시되 죄가 없는 분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결국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계시는가에 대한 문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 앞에서 말씀드린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에우티케스)의 논쟁이 있었는데, 신앙고백서는 “그러므로 완전하며 구별된 두 개의 전 본성들, 즉 신성과 인성은 변환이나 혼합 없이 한 위격 안에서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결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희생하지도 않으며, 역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나머지 신성을 희생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성은 신성대로 그리고 인성은 인생대로, 완전하며 구별된 두 개의 전 본성들, 즉 신성과 인성은 변환이나 혼합 없이 한 위격 안에서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것은 ‘때가 차매’ 이후의 일입니다. ‘때가 차매’ 이전에는 인성을 취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으로만 계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부터는 완전하며 구별된 두 개의 본성, 신성과 인성이 변환이나 혼합 없이 한 위격 안에서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 35절에서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는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으로 나셨지만 그분은 죄가 없으신, 그래서 거룩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9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인성을 취하셨다고 해서 인성 안에 신성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어지는 10절은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충만을 우리에게 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변환이나 혼합 없이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데, 교회사에서는 이와 관련해 네스토리우스파와 유티케스파가 있었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먼저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이 하나가 아니라 신격과 인격이라는 두 개의 위격으로 되어 있고 서로 분리되고 구별된다고 보았습니다. 한 위격에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의 연결이 아니라, 두 위격에 두 본성이 서로 분리되고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사람 예수에게 임한 존재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임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451년 칼케돈 신조에 보면 헬라어 Θεοτοκος[테오토코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교부들은 마리아에 대하여 이러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을 낳은 자. 번역에 따라 ‘하나님의 어머니’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결코 ‘테오토코스’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Χριστοτόκος[크리스토토코스], 즉 그리스도를 낳은 자라고 해야 한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단지 인성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낳은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낳은 자라는 표현을 거절했던 겁니다.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이 되었고, ‘테오토코스’라는 단어는 적합한 것으로 인정이 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대변하는 말의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번역할 때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초점이 되기보다는 마리아가 초점이 되어 마리아를 신격화하기까지 한 것이 가톨릭 안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번역은 이런 가톨릭의 오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낳은 분’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기는데, 분명한 것은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는 것은 마리아를 통해 낳은 분이 바로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계속해서 유티케스(에우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비판하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두 위격에 대하여 말하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판정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두 위격으로 분리한 네스토리우스와는 달리 유티케스는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였지만, 바다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다에 흡수되듯 인성 역시 신성에 흡수되어 신성만 남는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한 위격에 두 본성이 아니라, 한 위격에 결국 한 본성만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는 동일본질이나 사람과는 동일본질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결국에는 인성은 사라지고 신성만이 남아 있게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두 본성이 아니라 한 본성이라고 하여 단성설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유티케스는 451년 갈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하였는데, 이때 작성된 것이 갈케돈 신조입니다. 거기 보면 두 본성에 대한 중요한 고백이 나오는데, 전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부들을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한 분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또한 사람으로서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으로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그는 만사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그의 신성은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셨고, 그의 인성은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그녀는 하나님을 낳은 분이시다.
우리의 유일하신 한 분 성자시요, 주시요,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는 두 본성으로 인식되지만, 두 본성은 혼합이나 전이나 나눠지거나 분리가 되지 않음을 인정한다. 인격적인 연합은 각 성의 특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성은 각 본성의 특이성을 보존하면서 하나의 품성과 자질로 연합되어 있다. 두 품성은 분열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한 분이시고 유일한 독생자이신 로고스 곧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선지자들이 이렇게 증거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가르치셨으며, 교부들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가르치셨고, 교부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신조도 우리에게 이와 같이 가르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갈케돈 신조의 내용을 가지고 와서 완전하며 구별된 두 개의 전 본성들, 즉 신성과 인성은 변환이나 혼합 없이 한 위격 안에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결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칼케돈 신조에서도 고백하고 있는 내용,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라는 내용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위격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지만 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계시되,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라고 해서 두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은 변환되지 않습니다. 신성이 인성이 되거나 인성이 신성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혼합되지도 않습니다. 신성와 인성이 혼합되어 새로운 뭔가가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성은 언제나 신성 그대로입니다. 인성 역시 언제나 인성 그대로입니다. 완전하며 구별된 두 개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는 이렇게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겁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켰다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다시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단지 연결시켜주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또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 오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