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어미 '니'>의 사용에 대하여
‘니’는 현대어에서도 많이 쓰는 연결어미이다. 그런데 왜 고어 투(예스러운 느낌)의 말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우선 고시조에 찾아보면
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 종장 후구 ‘언제 갈려 하나니’
성삼문의 “수양산 바라보며” 종장 후구 ‘뉘 땅에서 났더니’
성삼문의 “이 몸이 죽어가서” 초장 후구 ‘무엇이 될꼬하니’
임제의 “청초 우거진 골에” 중장 후구 ‘백골만 묻혔으니’
송순의 “풍상이 섞어 친 날에” 중장 후구 ‘옥당에 보내오니’
이존오의 “구름이 무심탄 말이” 종장 후구 ‘따라가며 덮나니’
'하나니'는 '하다'의 물음형이다. '하니?'해도 될 말을 '나니'라는 연결어미를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났더니' 역시 물음 형이다. '될꼬하니'는 옛말이다. '될'은 '되다'라는 말의 미래형이지만 ' '꼬하니'라는 연결어미가 붙어 있는 고어이다. '오니'도 역시 옛말투이다. '덮나니'도 고어 이다.
반면에 길재의 작품 "오백년 도읍지를"의 초장 후구는 '필마로 돌아드니'는 '드니까"의 준말이다. '까'를 생략하여 4자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조식의 "듀류산 양단수를"의 초장 후구 '예 듣고 이제 보니'의 '니'도 '까'자를 줄인 말이라 보면 된다. 이 때 사용된 '니'는 모두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는 연결어미로 사용된 것이다.
같은 '니'이면서도 다른 의미의 말이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에서 이런 유형의 말마디가 나타난다.
현대시조에서도 연결어미로 붙이기 쉬운 말이 ‘-니’이다. 물론 ‘니까’라는 원인을 나타내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옛말 냄새가 풍긴다. 이는 우리가 많은 고시조 작품에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현대어 사례를 보면
어느덧 돌아보니(까) → 어느덧 돌아보면
받은 날짜 코앞이니(까) → 받은 날짜 코앞이라(서)
색깔을 입혀보니(까) → 색깔을 입혀보면
이런 말들은 대개 ‘까’라는 어미가 생략된 것으로 보이지만
‘온 맘을 적시더니, 당신께 보내오니, 몇 밤을 새우더니’ 같은 종결어미 마감은 ‘니’ 다음에 ‘까’를 넣어보면 말마디가 더욱 어색해진다. '온 맘을 적시니까', '보내니까' '새우니까' 같은 의미로 읽히지만 '더니', '오니', 뒤에 '까'를 덧붙일 수는 없다.
따라서 예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고어라 해서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시조는 현대적인 감각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현상은 작품을 쉽게 쓰려는 안일함이나 조급함에서 나온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니’는 ‘면’이나 ‘며 ’같은 말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욕먹으니 배부르다.’ ‘욕먹으면 배부르다.’, '여름 되니 매우 덥다,; '여름 되면 매우 덥다.'처럼 동일한 의미가 있다. 둘 다 원인과 결과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 뉴앙스는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니’자를 무조건 쓰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문장의 내용상 꼭 필요한 경우도 종종 있다.
반면에 ‘귀막고 사시더니’ ‘당신께 보내오니’ ‘몇 밤을 새우더니’ 같은 말은 ‘까’자를 넣으면 '사시더니까', '보내오니까', '새우더니까'처럼 말마디 연결이 어색해진다. 이런 경우는 고어 투인 '더', '오' 같은 말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현대적 느낌을 준다. '사시니까', '보내니까'처럼 하거나 앞 뒤 문맥을 보아 다른 말로 밖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귀막고 살아가면' , '몇 밤을 새워 가며.' 처럼 할 수도 있다. 이러힌 조치는 단순히 고어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국립 국어원 자료에 따르면 ‘으니’ ‘오니’ 등은 예스러운 말로 서술문이나 공손함을 더하는 말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해진 규칙(rule)이나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해도 옛날 시조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온 탓에, 신선미가 떨어져서 현대시조로서의 <낮설게 하기>나 <참신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작품은 작가의 품격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첫댓글 좋은 글
배독합니다.
잘
봉독하여
유의하겠습니다
감사히
배람합니다
늘 강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