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광복의 기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징병으로 끌려갔던 젊은이가 돌아와 풍악을 울리며 동네잔치를 벌이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 강산은 38선으로 분단되고 급기야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남한이 1948년 국회에서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결정하고 있을 때, 북한은 공산주의자들을 남한 전역에 침투시켜 지하공작을 펴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면과 리까지 지하조직이 확대되었다. 민족청년단과 남로당은 극과 극의 막다른 대립을 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념 때문에 죽이고 죽임을 당했다. 그 어디에도 가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당도 저 당도 들어가지 말라는 “차당피당불입당”(此黨彼黨不入黨)이란 말이 떠돌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어느 당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살았다. 우리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산당은 특히 종교인들을 숙청 대상으로 생각했다. 가택수색을 해서 성경과 찬미가가 나오면 학살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이웃집 친구의 모친은 겁을 먹고 밤중에 성경(원산번역)과 복음찬미를 아궁이에 넣고 불을 붙였다. 이상한 냄새를 맡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묻자, “조용히 해라. 성경과 찬미가가 탄다” 하면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 모친은 세상을 떠났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7:25)는 말씀이 생각났다. 사실 온 동네의 기독교 신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처럼 몸과 마음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편집자주] 동생 김정수 시인은 2004년에 당시 상황을 “작은 예배들”이라는 시(詩)로 이렇게 남겼다:
“호주기 편대들의 호들갑이/ 심한 밤이면/ 냇둑에선/ 동네 장년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었다./ 불 꺼! 불 꺼!/ 마을의 모든 등잔불이 꺼지고/ 동네는 적막강산/ 밤고야이들마냥 발자욱을 죽이며 모여 든/ 십여 명의 교인들/ 두 칸짜리 우리 집 사랑채에서/ 문마다 두꺼운 솜이불로 불빛을 가리고서야/ 아버지는 성경 인도를 하시었고/ 가만가만 부르던 교인들의 복음찬미와 기도 소리/ 너무나도 작은 소리들이어서/ 카랑카랑 오래 남는 말씀들/ 반드시 하나님께서도 흡족하게 받으셨을/ 그 시절의 작은 예배들/ 육이오때 숨어드리던 그 작은 예배들. (김정수, 「김정수시선집」 [서울: 월간문학출판부, 2008], 23),
우리 집도 숙청 대상이었다. 이 일로 나의 두려움은 컸다.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고 순식간에 온 지역이 공산당 치하로 돌변했다. 원당리는 양화면에서 가장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교회도 있고, 인근에서 가장 큰 부자와 국가공무원들도 살고 있었다. 우리 마을도 3개월 동안 공산당의 손에 들어갔다. 공산당원들은 사람들을 모으고 사상교육을 시작했다. 그들은 자유도 주고 토지도 무상으로 분배한다고 말했다. 부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주민들은 그들의 말에 현혹되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모두 평안히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속임수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들의 정치는 천륜을 끊고, 사람을 불신하게 하는 무서운 정치였다. 그들은 곧 교회당을 몰수하여 자신들의 사무실 또는 모임장소로 사용했다.
어느 날 부여군 정치보위부에서 교회지도자들을 불렀다. 교인 명단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교인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당시 원당교회 책임자로 있던 아버지를 통해 교인명부를 보내기로 했다. 아버지는 교인명부를 지참하고 출발하기 전에 가족들과 작별기도를 하셨다. 그들에게 가면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 하나님, 저는 부득이 집을 떠나오니 저희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정치보위부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그 때 아버지가 순교하시는 줄 알았다. 우리 모두는 기도했다. 아버지 다음에 또 누가 끌려갈 것인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며칠 후에 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오셨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으니 피하라고 권면했고, 아버지는 부락인민위원장에게 조상묘지를 사초하러 간다며 통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은신처를 찾아 떠나셨다. 그리고 9ㆍ28수복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인민군은 철수하고 지방좌익분자들은 검거되어 처벌을 받았다. 불과 3개월 정도지만 공산당 정치를 경험한 우리들은 공산당의 실체가 어떠한 지를 뼈아프게 경험했다. 그들의 선전과 실제는 다르다는 것과 비밀공작이 많아 항상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아무도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불응하는 자들을 과감히 숙청했고, 결과적으로 자유를 박탈하고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했다. 3개월간 공산정치 경험은 대한국민으로서는 좋은 양약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