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목사 설교 전달 대신 내 예수를 전하자>의 줄거리:
어느덧 기독교 세계 내에서 예수님 전도는 사라지고 설교 잘하는 목사님 전달만 남은 상태입니다. 관계의 상대방에게 내가 가진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듭니다. 은과 금은 혹시 없어도 내가 가진 예수님은 있어야 하지 않나요? 내 책임하에서 내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가 가진 내 예수님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목사 설교 전달 대신 내 예수를 전하자
(사도행전 10:9~23)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목사 설교 전달 대신 내 예수를 전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목사 설교 전달 대신 내 예수를 전하자’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어떤 목사님의 설교가 좋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 설교가 정말로 좋다면 분명히 예수님을 가져야 한다는 설교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말 좋은 설교를 들었다면 내가 갖게 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3장 6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설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설교 자체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진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개신교에는 예수님의 이름보다도 목사님의 설교가 중시되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설교를 들음으로써 내가 갖게 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풍토가 되어서 그래야 되는 것인 줄로만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계셨다면 이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근본적으로 바뀌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와 고넬료가 만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역사하시는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일컬어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이라고 불러보고자 합니다. 복음전파 시스템이란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방식입니다. 당시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이 이방세계로 전파되어야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통해 복음전파의 모범을 제시하십니다. 우리 또한 이방인으로서 이 시스템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사는 동안에는 이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놓아버리면 모를까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고 특별히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한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을 벗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시스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야 될 사람과 예수님의 이름을 전해야 될 사람의 만남을 준비하심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수도 없이 많은 고넬료들과 베드로들의 쌍방 만남을 통해 복음은 전파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쌍방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서만 복음전파를 위한 만남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준비시키시지 않은 고넬료와 베드로는 만나는 법이 없습니다.
당시에 베드로가 머무르던 욥바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굳이 욥바에서 50km나 떨어진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를 찾아가게 하십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동안에 그들을 다 전도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아무에게나 복음을 전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앞서 욥바에서 죽었다가 살리심을 받은 도르가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역을 마무리한 후에 그곳에서 계속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50km나 떨어진 가이사랴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에 앞서 철저히 준비시키십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상징적입니다. 도르가의 부활을 보고 믿게 된 사람들도 사실은 고넬료와 같은 입장에서 준비시키셨고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서 이루어진 일을 보면 싱거울 정도로 별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만나기 전에 나타난 일들이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고넬료에게 환상이 보여서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찾으라 하였고, 베드로 또한 세 번이나 환상을 보며 고넬료에게 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렇듯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동원됨으로 엄청난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이들이 실제로 만나서 한 일은 이제까지 다른 교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예수님이 하늘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증언하였고 고넬료는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일은 모든 교인에게서 일어났고 일어나야 하는 일이기에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매순간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엄청난 일입니다. 이에 대해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오늘 다시 본문을 통해 강조해보고자 합니다.
인간에게는 주체성이 있습니다. 이 주체성을 발휘해서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기를 원하고,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갖기를 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일입니다. 단 하나만의 욕구와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는 유일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응답은 바로 십자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없다면 상달되는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소원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원과 기도가 없으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응답으로 주실 수도 없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넬료의 마음에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세상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갈증이 준비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넬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알고는 있지만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음에 대한 갈증을 자기도 모르게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은 세상을 탈출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세상을 탈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우리 곁에는 고넬료와 같이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익명의 고넬료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자들이 바로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향한 갈증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나의 예수님을 통하여 점점 더 하나님을 많이 소원하고 하나님과 많이 친해져서 하늘을 향한 갈증이 해결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은 이 땅에서 전파되어 가게 됩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아닌 사람은 즉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세상을 빠져나가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없다면 설령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하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종교의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성경말씀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대한 갈증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고넬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려고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결정하신 자들이 또 다른 고넬료이고, 고넬료와 같은 자들에게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베드로입니다. 다만 현재의 상황을 보면 고넬료와 같은 사람은 많으나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자리는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삶에서 고넬료이기도 하며 베드로이기도 합니다.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은 전파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에 두고 현재 우리의 상태를 관찰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현재 개신교 내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형태의 전도가 있습니다. 전도하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 대신에 전하는 것은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그나마 예수나 천국이라는 단어는 노방전도에서만 간간히 들려오는 구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풍토는 전달, 전도, 전파라는 단어가 적용되는 상황을 보면 내가 가진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은 설교를 전하거나 내가 다니는 예배당의 목사님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누구나 언급하는 단골 소재 정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마치 유명한 가수들이 외국에 나가서 교포들을 위한 공연을 하고나면 으레 아리랑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의 화두는 목사님의 설교를 전달하고 목사님의 이름을 전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언급되는 노방전도가 적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주제가 노방전도의 효과를 따지는 것이 아니기에 이에 대해 따로 말씀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기본적이고 원칙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시는 방식이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세계에 대한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고넬료의 사건은 제2의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예수 이름이 전파되는 과정입니다.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의 핵심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야 될 고넬료나 예수님의 이름을 전해야 될 베드로나 모두가 다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이 시스템 밖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은 전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개신교에서 이 시스템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현재 풍토가 그러하기에 똑같이 해왔고 그나마 그러한 과정에서 다행히도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은혜를 받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생각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목사님을 소개하고 싶고 목사님의 설교를 전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면 그 설교를 통해 갖게 된 나의 하나님의 좋음을 마음에 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갖게 해주시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설교가 좋다는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는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예수님은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좋았다면 마음에 예수님이 남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전한다는 것은 목사님의 설교를 좋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목사님의 설교 속에 나오는 예수님을 좋아하고 있지 않다면 문제입니다. 목사님 설교 덕분에 예수님을 가지게 된 것이 너무나 좋다면 예수님을 전해야지 설교를 전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설교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내 것으로 가지고 좋아하기보다는 목사님을 좋아하고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는 설교가 좋은 것이지 예수님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을 가졌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 예수님이 좋았어도 지금까지 개신교의 풍토는 스타 목사님의 이름을 전달하는 것이고 스타 목사를 발굴하는 일에 교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생각과 태도가 바뀌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복음방송과도 관련하여 마찬가지 이야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저에게 “목사님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 말씀을 가르쳐주고, 어떤 분은 USB에 설교를 복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신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설교를 나눠주어도 계속해서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원칙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십자가복음방송의 말씀이 좋았다면 그것은 나의 예수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십자가복음방송을 듣는 고넬료이지만 삶의 현장에 있는 다른 고넬료들을 위해서는 베드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것이 된 예수님을 전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내 것으로 가지게 되었다면 이제 베드로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모든 교인에게는 “고넬료-베드로 시스템”이 동시에 작용하여 고넬료도 되고 베드로도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복음방송을 아침마다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친해짐이 조금씩 진보되어 가게 됩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해짐을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를 가늠해보면 됩니다. 당장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에 하나님께로 가는 것과 세상에 대한 아쉬움의 비중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고 싶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하나님과 친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받아들였어도 십자가 생활화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하나님 아버지의 좋음을 확신하는 말씀을 나눌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친분은 발전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도 머리에서 원칙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와 실천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말씀을 계속해서 듣지 않는다면 십자가 생활화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 것들에 대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에 먹혀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고넬료의 입장을 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입장만이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과 금은 없어도 나의 예수님을 가졌다면 베드로의 입장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로부터 예수님을 들어야 할 고넬료들을 위한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가진 베드로가 되었다면 세상에는 내가 가진 예수님을 반드시 들어야 할 고넬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나로부터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 듣고자 준비된 고넬료가 있습니다. 그러한 고넬료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에 전해져야 될 것은 목사님의 이름이나 설교에 대한 자랑이 아닌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입니다. 풍토를 따라 목사님과 설교를 자랑하는 것에 머무른다면 하나님이 정해두신 전도의 방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목사님이 만난 예수님이 아닙니다. 물론 목사님께는 본인이 만난 예수님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도는 여러분도 예수님을 가지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책임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책임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심을 확신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전하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당신은 따르지 않을지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전도는 “십자가복음방송을 들어보라.”는 권유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예수님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갖게 하셨고 소원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님과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라는 심정으로 증언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지고 전하는 내 예수님이 없다면 신앙의 진보는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십자가복음방송과 십자가온라인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 이전에도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다만 그 신앙생활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마술사 시몬처럼 세상을 찬란하게 보았고,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어둠 속에 모셔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만을 부르며 살다가 이제야 영광의 광채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세상을 탈출하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말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삶의 개념을 바꾸는 것에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을 탈출하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상태만을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가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다면 이제 베드로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 책임지는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목적으로 십자가온라인교회를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붙잡고 살다가 죽을 것이다.”라고 결심하게 되는 상태까지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졌다면, 이제 그 예수님에 대해 들어야 될 고넬료가 있음을 아는 단계에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복음방송의 설교나 십자온라인교회의 모임이나 태승철 목사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모임을 통하여 나의 예수님을 가진 뒤에는 나의 예수님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예수님을 듣도록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고넬료에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전해서 받아들인다면 날마다 하나님과 더 친해지기 위한 과정에서 십자가복음방송을 함께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말씀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 생활화는 삶에서 잊히고 망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머리에서 십자가 생활화의 원칙을 기억할지라도 몸이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적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듣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만 전도에 있어서 전파되어야 할 것은 설교 자체가 아닌 설교를 통해 내가 갖게 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온라인교회에 참석하시거나 녹화로 들으시는 분들이 100명이든 200명이든 여러분들은 고넬료이며 동시에 베드로입니다. 전해야 할 것은 태승철 목사도 아니고 십자가복음방송도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갖게 된 “나의 예수님”을 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땅바닥에 내팽개친 주님의 교회를 다시 윤곽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계획해나가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나의 예수님”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날마다 고넬료이며 날마다 베드로이어야 합니다. 날마다 고넬료로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더욱더 돈독히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내 것이 된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고넬료들에게 전하는 베드로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은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한 죽을 때까지 따라붙게 될 하나님이 만드신 시스템입니다. 나에게서 이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갈 때 이 세상 모든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도 나를 그릇으로 삼으셔서 원활하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친분이 두터워지게 해 주시옵소서. 고넬료로서 말씀을 듣는 사역이 중단되지 않게 하시며 또한 나의 예수님을 고넬료들에게 전하는 베드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으로써의 삶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