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관해옹(觀海翁 관해는 이민구(李敏求)의 호)의 장석(丈席)에서 글을 읽다가 보니, 헌걸찬 장자(長者) 한 분이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내게 와서 다정하게 물어보고, 또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친구로 삼겠다.”
하므로 나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 성(姓) 자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뒤에 나는 서울의 남쪽에 우거하면서 이자징 덕하(李子徵德夏)씨 형제를 만나 종유하게 되었는데, 그가 나에게 자기 선군의 묘갈명을 부탁한즉, 그 선군이 곧 내가 어렸을 때 뵈었던 장자 바로 그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황연히 기억이 떠올라 마음속에 감동됨이 있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방익(邦益)이고 자는 사흥(士興)이며,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우리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8대손이다. 증조는 황해도 관찰사로 이조 판서에 추증된 휘 억손(億孫)이고, 조는 형조 좌랑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완계부원군(完溪府院君)에 추봉된 휘 유정(惟貞)이며, 고는 평난공신(平難功臣) 좌참찬 전성군(全城君)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준(準)이다. 비 정경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병사(兵使) 중기(重器)의 딸이며 고려시대 시중(侍中) 송례(松禮)의 후손이다.
공은 만력 경인년(1590, 선조23)에 태어나서 경술년의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인조 때에 전설사 별좌가 되었다가 이윽고 어버이 상을 당하였다. 정묘년에는 사직서 참봉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가을에는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겨울에는 장원서 별좌에 제배되었으며, 호종의 공로로 전생서 주부에 승진되었다가 공조 좌랑에 전임되었다. 임신년에는 진잠 현감(鎭岑縣監)으로 나갔다가 갑술년에 그만두었다. 을해년에는 충훈부 도사에 제배되었고, 정축년에는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재차 충훈부 도사 겸 훈국랑에 제배되었다. 무인년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이 49세였다.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 남쪽 기슭의 정향(丁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공은 상모(狀貌)가 헌걸차고 기국(器局)이 준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집안에서는 행실이 돈독하여 종족이나 인척들의 친애함을 받았고, 궁한 이를 도와주고 급난 당한 이를 구해주는 것이 지성에서 나왔다. 일찍이 성균관에 다닐 적에 명성과 인망이 매우 높았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사를 만나서 10여 년 동안이나 집에만 들어앉아 종적을 감추었다. 공의 집이 얼신(孼臣) 한찬남(韓纘男)의 집과 골목이 연접해 있었으나 그와는 서로 접촉하지 않았고, 종유하거나 섬긴 이로는 오직 이지봉(李芝峯 지봉은 이수광(李睟光)의 호) 부자와 한 서평(韓西平) 형제들뿐이었다.
인조반정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태학에서 공을 추대하여 공에게 사론(士論)을 주창해서 소위 유관(儒冠)의 무리로 간신들에게 붙어 폐모(廢母)의 논의를 선동했던 자들을 가려내도록 하였으니, 대개 인망이 공에게 모였던 것이다. 이윽고 사적(仕籍)에 들고 또한 가끔 해액(解額)에 오르기도 하였는데, 전성공(全城公)이 작고함에 미쳐서는 공이 말하기를,
“내가 급제를 하면 누구와 함께 기뻐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러자 제공(諸公)들이 공의 재능을 애석하게 여기어 누차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공은 이를 탐탁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공이 진잠 현감으로 나갔을 적에 관곡(官穀)의 포탈이 매우 많은 토호(土豪)를 체포해다가 형벌로써 그를 독촉하였다. 그 결과, 그 사람이 자기 족당을 사주하여 공이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하자, 공은 인끈을 풀어 던지고 돌아와버렸다. 인조가 그것이 무함임을 알고 특별히 함사(緘辭)로 공을 추고하게 했는데, 함사가 올라가자 인조가 진노하여 언자(言者)를 내쫓고 그 토호를 장류(杖流)시켰다. 또 공에게 임지로 돌아갈 것을 재촉하였으나, 공은 끝내 다시 부임하지 않았으니, 공이 일에 임하여 구차하게 하지 않는 것이 이러하였다.
공은 성품이 엄하여 혹은 남의 과실을 면전에서 힐책하기도 하였으나 마음속에는 간격을 두지 않았고, 만년에는 또한 남들과 친근하게 왕래하는 일도 드물었다. 집이 남산(南山) 밑에 있었는데, 조용하고 경치 좋은 터를 잡아 집 한 칸을 짓고 그 안에 기거하면서 매양 손이 올 적마다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않고 손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어 도도히 즐기었다. 서법(書法)은 조송설(趙松雪 송설은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서체를 본받았는데, 수시로 붓을 휘둘러 글씨를 써서 흥을 부칠 뿐이었고, 이것을 남들에게 과시하지는 않았다. 지위는 덕에 차지 못하였고 나이는 5, 60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슬프다.
공의 초취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진사 우준(友俊)의 딸이며 기묘유현(己卯遺賢)인 달원(達源)의 증손이다. 후취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사인 몽위(夢渭)의 딸이며 판서로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진 계선(季瑄)의 증손이다. 심씨는 유순하고 인자하고 신실하여 위로는 시부모를 잘 섬기고 아래로는 비복들을 잘 어루만져 거느리니, 송 부인이 항상 ‘우리 어진 며느리’라고 칭찬하였다. 무자년에 태어나서 정사년에 별세하였다. 어씨 또한 부덕이 있어 남편을 섬기는 데 있어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고 여러 전취 소생들을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들처럼 돌보아 길렀다. 임인년에 태어나서 을유년에 별세하였다. 두 부인 모두 공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다.
3남 3녀를 두었다. 큰아들 덕하(德夏)는 진사로 전임 선산 부사(善山府使)이고, 덕상(德商)은 학생이며, 덕주(德周)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었고 딸은 조사창(趙嗣昌)에게 시집갔으니, 이상은 심씨의 소생이다. 그리고 목림춘(睦林春)과 이자번(李自蕃)에게 시집간 두 딸은 어씨의 소생이다. 부사는 2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찬(纂)ㆍ관(筦)이고, 딸은 목림중(睦林重)ㆍ윤정주(尹楨周)ㆍ이급(李汲)ㆍ조우망(趙宇望)에게 시집갔다. 학생의 1남은 전(𥰸)이다. 현감은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요(
)ㆍ부(符)ㆍ보(𥮉)ㆍ저(箸)이고, 딸은 권위(權瑋)ㆍ민장도(閔章道)에게 시집갔다. 조사창ㆍ목림춘ㆍ이자번에게도 모두 자녀들이 있다. 자손 남녀가 모두 50여 명이나 되어 이루 다 기재할 수도 없으니, 아, 이것이 어찌 그 유덕(遺德)에 대한 복록을 미처 누리지 못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자손이 그리도 번성하단 말인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공은 기가 호걸하고 자품이 돈후하여 / 嗚呼公氣豪而質厚
악한 무리들과는 서로 사귀지 않았으니 / 不交迹於匪類
오직 그 지킴이 있었기 때문일세 / 惟其有守也
권세 있는 자에게 의지하지 않았으니 / 無藉馮於勢右
권세에 맹종하지 않았음을 알겠도다 / 知其不詭隨也
나는 이 사실을 기록하여 / 我則識之
그 후손들에게 고하는 바이다 / 以告其來疇也
[주-D001] 한 서평(韓西平) : 한씨(韓氏)로 서평군(西平君)에 봉해진 사람을 가리킨 듯한데, 시대적으로 보아 광해군ㆍ인조 연간 사람으로는 서평군에 봉해진 한씨가 없으니, 아마도 글자의 착오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