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독자성에 갇혀 맥락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데니스 맥도널드의 《The Gospels and Homer》를 읽으며
최근 데니스 맥도널드 교수의 저작 《The Gospels and Homer: Imitation of Greek Epic in Mark and Luke-Acts》를 읽으며 성경 해석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그리스 로마 세계의 교과서였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같은 영웅 서사의 수사학적 틀을 차용하여 예수를 설명했다는 미메시스 비평을 접할 때, 우리는 흔히 거부감을 느끼곤 합니다. 성경은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온 독자적이고 거룩한 책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 속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거부감과 무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세기의 유스티누스나 3세기의 오리게네스 같은 교회의 위대한 선배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로고스 개념이나 그리스 신화 속 동정녀 탄생과 같은 유사성을 직면했을 때, 자신들이 발딛고 서 있던 헬라 문화의 영향력을 직시하기보다는 아전인수 격으로 해명하기 바빴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가 인간의 허구적 상상력에 불과하다는 단서를 달며 성경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애썼지만, 정작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던 언어와 수사학의 그릇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직하게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무의식은 교리에도 그대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음부강하, 즉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대목은 외경인 니고데모 복음서 속 서사와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지중해 문화권에서 위대한 영웅이라면 모름지기 저승에 내려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돌아와야 한다는 하강 서사라는 문화적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문화적 그릇을 통해 선포된 신학적 진리를 고백하면서도, 그 그릇이 만들어진 배경은 잊은 채 살아갑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동일한 독단과 오류가 오늘날 창조과학회의 활동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은 21세기 자연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창세 신화라는 고대 근동의 문학적·세계관적 틀 속에서, 태양과 달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하며 인간은 신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파격적인 신학을 선포한 고대 서사입니다.
그러나 창조과학회는 성경의 무오성을 지키겠다는 명목 아래 고대 근동의 문학적 맥락을 통째로 잘라내 버립니다. 그리고는 현대의 과학적 잣대를 성경에 강제로 뒤집어씌우는 우를 범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내용물과 그 진리를 담아낸 고대의 그릇을 구분하지 못하는 명백한 본말전도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문화적·역사적 위치를 알지 못하고, 성경의 독특성과 무오성만을 고집하느라 텍스트가 태어난 풍토를 잘라내 버리는 일.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배경에서 나왔는지조차 모르는 이 상황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로 인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극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복된다고 해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참된 과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의 거룩함과 진리 됨을 수호하는 길은 문화적 맥락을 은폐하고 부정하는 맹목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자신이 속한 시대의 언어와 문학, 문화라는 그릇을 어떻게 기꺼이 빌려 썼는지, 그리고 그 익숙한 그릇을 통해 어떻게 시대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아냈는지를 정직하게 밝혀내는 것에 있습니다.
역사적 무지를 벗어던지고, 텍스트가 숨 쉬던 진짜 무대를 직시하며, 그 속에서 빛나는 참된 메시지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어내는 것. 그것이 시대를 넘어 반복되는 오류를 바로잡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지성적이고도 신앙적인 임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