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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교수님께서 1993년 4월부터 1994년 4월까지, 월간 [해인]에 12회에 걸쳐 연재하신 내용 중 10회의 내용 입니다.
어록해설(10) -『벽암록』
「벽암록(碧岩錄)」은 설두중현(980~1052) 스님이 옛부터 내려오는 선사들의 언행 가운데에서 수행에 지침이 될 만한 이야기를 백 가지(본칙) 뽑고, 그 이야기를 소재로 노래를 지은 것[頌]이다. 우리는 이것을 「설두송고」라고 한다. 이「설두송고」를 교재로 해서 원오극근(1063~1135) 스님이 납자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이것을 제자들이 기록하여 「벽암록」으로 지금에 전한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선림고경총서’의 「벽암록」(전3권)이 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에 만든 청동활자로 인쇄된 원문도 부록으로 실려 있어 자료적인 가치가 한층 높다.
다른 어떤 선서보다도 「벽암록」은 읽기 어렵다. 그 까닭을 몇 가지로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벽암록」에 나오는 원오스님의 논평 곧 ‘하어(下語)’는 너무 짧아 갈피를 잡기 힘들다.
예를 들어 어느 비오는 날 찻집에서 젊은 여자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앞에 앉은 사내에게 “도둑놈”이라고 했다고 하자. 우리는 이 여자가 무엇을 잃었다고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둑놈!”소리를 한밤중에 들었다면, 이는 분명 물건을 훔쳐 가는 사람에게 지르는 외침일 것이다.
「벽암록」에는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곳이 많다. 그래서 어렵다.
Ⅱ
두 번째 어려움은 「벽암록」에 종횡무진하게 나오는 구어(口語) 내지는 속어(俗語)이다. 선서에 구어가 많이 쓰였다는 이야기는 그 동안의 연재에서 누누히 강조했으므로 그치기로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구어로 쓰인 문헌을 문어의 안경을 통해 보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너무나도 두드러진 잘못을 하나만 지적하면, “~불방(不妨~)”이라는 말이 구어에서는 “참으로”라는 부사어인데, 문어에서는 “~해도 무방하다”의 뜻이다. 선서에서의'~불방(不妨~'은 거의가 구어로 쓰인다. 나는 아직 선서에서 이 말이 문어의 뜻으로 쓰인 용례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선서를 제대로 읽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은 없을까? 그것은 현대 중국어도 익히고, 또 고전 중국어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못하는 필자로서는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지만 우리의 과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목수가 연장을 사용하여 가구를 만들고 집도 짓듯이, 문헌을 연구하는 데도 연장이 필요하다. 그 연장의 하나인 「세설신어사전(世說新語詞典)」(張萬起, 北京, 商矜印書館, 1993년 5월)을 소개한다. 「세설신어」는 위진시대 사조 연구뿐만 아니라 구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사전과 함께 ‘아래아 한글 1.52’로 입력한 「세설신어」를 이용하면 효과적이다. 간단하게 참고할 분은 한글 워드프로세스의 ‘바꾸기’기능을 이용하고, 좀 더 입체적으로 이용할 분은 MS-DOS의 FIND 명령을 써서 검색할 수 있다.
Ⅲ
세번째의 어려움은 개성과 말투가 서로 다른 여러 스님들이 한 책에 등장하는 점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느끼는 바이지만 정신이 없다. 말 그대로 ‘진짜 보물’만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거기에 실린 문체는 저마다 가락이 다르다.
「벽암록」이 그렇다. 한칙한칙이 모두 묵직한 공안인데다가 한 사람의 말투와 그 내력에 좀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주인공이 바뀐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설두스님의 천재적이 언어 씀씀이이다. 설두스님은 그 다양한 선사들의 가풍과 말투를 또렷하게 드러내 준다. 물론 언어와 문장을 통해서 말이다. 설두스님은 언어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그것을 ‘송(頌)’이라는 문학장르를 통해서 드러낸다. 주옥같은 언어로 엮어진 문학만이 선의 경지를 드러낼 수 있는 모양이다.
이 점에 있어서만은 원오스님은 설두스님만 못하다. 설두스님은 긍정의 논리[遮詮]로 일관한다. 구태의연한 부정의 논법이 계속된다. 「벽암록」100칙 중 가운데에 앞 부분은 그래로 신선하다. 뒤로 갈수록 이 두 스님이 선문의 근본 정신인 돈오무심(頓悟無心)을 천양하는 점에서는 같다.
Ⅳ
네 번째 어려움은 논리의 전환과 말의 생략이 심한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문장과 무장 사이 이른바 ‘행간(行間)’이 벌어져 있다. 이’행간’은 책을 읽는 독자쪽에서 채워 가야 한다. 이 ‘행간’을 채워 가는 작업을 나는 ‘읽는다’라고 이름 붙인다. 선서는 ‘읽어야만 한다’고 늘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이번 연재의 전체 제목을 ‘선서를 읽자’로 정했다. 많은 책 가운데에서 선서만을 읽자는 책 선전 구호는 아니다.
이제 그 읽는 작업을 해 보자 「벽암록」29칙의 ‘평창 (評唱)’에 소개된 위산영우(潙山靈祐 : 771~853)스님과 대수법진(大隋法眞 : 생몰연대 미상)스님과의 대화를 보자 대수 법진 화상은 대안선사의 법을 이은 사람으로 동천 염정현 출신이다. 그는 육십 여 명의 선지식을 찾아 뵈었다. 전에 한번은 위산스님의 회상에서 불때는 일을 맡았다. 어느날 위산스님이 대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내 밑에서 몇 년 살았지만, 나에게 전혀 묻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자 대수가 대답했다.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이렇게 되묻자 위산스님이 대답했다.
“만일 그대가 무엇을 물어야 좋은지 모르겠으면, ‘부처란 무엇입니까?’하고 묻게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수스님은 손으로 위산스님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위산스님이 말했다.
“이후로 일제의 모든 관념을 싹 쓸어버린 수행자를 만날 수 있을까?[以後覓箇掃地人也無]”
밑줄 친 부분의 “!야무(~也無)”는 문장의 끝에서 의문을 표시하는 구어이다. 이것을 문어로 읽어 “~마저도 없다”고 부정문으로 번역하는 이도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문제의 관건은 “소지인(掃地人)”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다.
곧 “소지인”을 ‘땅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어 ‘시중 드는 제자’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처럼 ‘부처니 깨달음이니 하는 일체의 생각을 싹 없애 버린 참 수행자’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Ⅴ
먼저 “소지인”의 뜻을 밝힐 필요가 있다. 한 단어의 뜻을 추정할 때는 무엇보다 같은 책에서 그 용례를 모아 공통된 뜻을 추려 내야 한다. 중국의 경학가들이 한나라 정현(鄭玄 : 127~200)의 주(註)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다음에 동시대의 문헌, 그 다음에 같은 계통의 문헌에서 그 용례를 찾아 의미를 밝혀야 한다.
먼저 「벽암록종전소(碧巖錄種電銷)」를 대본으로 한 「벽암록색인」(경도, 선문화연구소. 1992년)을 이용해서 “소지인”의 용례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용례는 이 곳 한 군데뿐이다. 단 ‘소지(掃地)’라는 말은 몇 군데 나왔다. 제12칙의 송의 평창과 19칙의 본칙의 평창에 보면
“만약 그렇게 이해했다가는 달마를 스승으로 받드는 선종은 싹 쓸려 없어지고 만다.
[若恁麽會, 達磨一宗掃地而盡]”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소지’는 ‘싹 쓸려서 없어지다’의 의미이다. “소지이진(掃地而盡)”은”소사이진(掃土而盡)”(제74칙 본칙의 평창)으로도 쓰인다. 한편, 52칙의 본칙의 평창에는
“하루는 조주스님이 땅을 쓰는데, 어떤 승려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선지식이신데 어찌 먼지가 있습니까? ‘[一日趙州掃地次, 僧問, 和尙是善知識爲什麽有廛]”
라고 나온다. 여기에서의 ‘소지’는 말 그대로 땅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지’의 뜻은 ‘땅을 쓸다’이고, 이 의미가 확대되어 ‘청소하다’나아가서는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다’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소지인’을 ‘청소해 주고 시중드는 제자’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관념을 싹 없앤 참 수행자’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면 이 이야기의 근원이 되는 이야기를 찾아보자. 「조당집」권 19에 대수법진장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경덕전등록」과 「송고승전」에는 항목조차도 없다. 시대는 좀 떨어지지만 「오등회원」권4에는 「벽암록」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단 밑줄 친 부분이 “위탄왈, 자진득기수(僞歎曰, 子眞得其髓)”로 되어 있다. 즉 “대수 그대는 참으로 핵심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위산스님의 입을 막은 대수스님의 행동은 잘한 것임이 확인된 셈이다.
또 「벽암록」보다 뒤에 만들어진 「종용록」제30칙에도 「벽암록」제29칙과 같이 위산과 대수 두 스님의 대화가 인용되었다. 다만 밑줄 친 부분이 더 들어 있을 뿐이다."니이후유편와개두, 멱개소지인야무(爾以後有片瓦蓋頭, 覓箇掃地人也無)"
여기서의 “편와개두(片瓦蓋頭)”란 “깨진 기와조각으로 머리를 가려(눈이나 비를 피한다)”라는 뜻으로 아주 가난함을 나타내는 성어이다. 위의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면 “그대 대수는 앞으로 가나한 처지에 있으면서 모든 관념을 싹 버린 참 수행인을 찾을 수 있을까?”가 된다.
Ⅵ
한 단어의 뜻을 고증하는 것은 그 단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들추어내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러면 어떤 사상적인 배경 속에서 이 말이 쓰이는 지를 보자.
전등록색인」(경도, 선문화연구소, 1992년)을 이용하여 “소지인”이 들어있는 문장을 찾아보았다. 「한글대장경 182-전등록」권 26, 監院守訥章, 428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스님이 법당에 들어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불법의)핵심을 말로 다 설명하면 모든 생각을 싹 쓸어낸 무심한 사람이 없어진다.[盡令提綱, 無人掃地)]이 사실은 선방의 모든 형제들이 증명하고 있다. 늦게 발심한 무리가 의심이 있거든 물어보라.”
이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필자 임의로 생략)
“무엇이 부처입니까?”
“도리어 누구에게 묻는가[更問阿誰]?”
위의 밑줄 친 부분은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말로써 이러쿵저러쿵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결국 모든 관념을 싹 버린 참 수행자가 없어지다는 엄한 경계이다. 위의 문장에서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수눌스님은 “(그 문제는 네가 스스로 알아야 할 일인데)도리어 누구에게 묻느냐?”고 야단을 친다. ‘갱(更)’이라는 강조 부사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런 뉘앙스를 살리려는 배려이다.
선사들의 이런 태도는 저 유명한 동산 양개스님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는 돌아가신 은사스님의 깨달음이나 그 분의 도덕을 귀중하게 여기기보다는, 나에게 이러니 저러니 설명해 주시지 않았던 점을 귀중하게 여긴다.”
이상의 예문을 통해 볼 때 위에서 인용한 「벽암록」을 ‘행간’을 메워서 읽으면 이렇다.
“그대는(그대처럼) 모든 관념을 싹 쓸어 없앤 참 수행자를 앞으로 찾을 수 있을까?(아-아-그대는 참으로 훌륭하다.)”나는 “소지인”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 언어의 강렬함과 상황에 딱 들어맞는 언어의 치밀함에 놀란 것이다. 단계적인 수행의 절차는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일체의 관념을 싹 쓸어 없앤 무심도인의 경지가 이 말로 멋지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스님의 이야기는 육조 스님을 스승으로 삼는 조계선의 정신을 여실히 보여준다. 스스로 몸소 깨쳐야 한다는 주체 정신과 부처니 조사니 하는 일체의 관념을 싹 쓸어버린 무심사상을 모르고서는 제29칙의 공안을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벽암록」전체도 그럴 것이다.
조계의 후손들은 단계적인 수행의 절차를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품을 몸소 활짝 깨치고, 그 뒤에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영원한 자유인으로 무심히 살아간다. 마치 성철선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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