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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齊 物 論 (내편 02, 전체 02)
南郭子綦가 隱机而坐하야 仰天而噓호되 荅焉似喪其耦러라 顔成子游ㅣ 立侍乎前이러니 曰何居乎오 形은 固可使如槁木이며 而心은 固可使如死灰乎아 今之隱机者는 非昔之隱机者也로소이다 子綦曰 偃아 不亦善乎아 而問之也여 今者에 吾喪我호니 汝는 知之乎아 女聞人籟하고 而未聞地籟며 女聞地籟하고 而未聞天籟夫인저
남곽자기가 안석에 기대어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멍하니 자기 짝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안성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서 있다가 말하기를 “어쩐 일이십니까? 형체는 진실로 시들은 나무와 같도록 할 것이며, 마음은 진실로 불꺼진 재와 같아질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안석에 기대고 있는 모습은 예전에 안석에 기대고 계시던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남곽자기가 말하기를 “언아, (너의 질문이) 또한 좋지 않나, 너의 물음이여!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는데 너는 알고 있느냐! 너는 人籟(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들었어도 地籟(대지가 부는 퉁소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을 것이며 너는 地籟는 들었어도 아직 天籟(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子游曰 敢問其方하노이다 子綦曰 夫大塊噫氣는 其名爲風이니 是唯无作이언정 作則萬窺怒呺하나니 而는 獨不聞之翏翏乎아 山林之畏佳에 大木百圍之竅穴이 似鼻하며 似口하며 似耳하며 似栟하며 似圈하며 似臼하며 似洼者하며 似汚者하니 激者와 謞者와 叱者와 吸者와 叫者와 譹者와 宎者와 咬者라 前者唱于어든 而隨者唱喁하야 泠風則小和하고 飄風則大和호되 厲風이 濟하면 則衆竅爲虛하나니 而는 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아 子游曰 地籟는 則衆竅是已오 人籟는 則比竹이 是已어니와 敢問天籟하노이다 子綦曰 夫吹萬不同하나 而使其自己也어늘 咸其自取하나니 怒者는 其誰邪아
안성자유가 말하기를 “감히 그 방법을 묻겠습니다.”라고 하니 남곽자기가 말하기를 “무릇 대지가 하품하는 기운은 그 이름이 바람이 된다. 이것은 오직 일어나지 않을지언정 일어났다고 하면 (산에 있는) 일만 가지 구멍에서 소리를 낸다. 너만이 유독 윙윙 울리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높은 산 깊은 숲속(崔嵬山林)에서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의 구멍은 콧구멍 같고, 입 같으며, 귓구멍 같고, 두공 같으며, 나무 그릇 같고, 절구통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것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바람 소리는) 물 부딪치듯 급격한 소리, 씽씽하고 화살 날아가는 소리, 꾸짖는 듯한 소리, 숨 들이마시는 듯한 소리, 외치는듯한 소리, 볼멘 듯한 소리, 웃는 듯한 소리, 귀여운 소리이다. 앞의 바람 소리가 부르면 뒤의 바람 소리가 따라서 윙윙 소리를 낸다. 그래서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하는데, 만일 크고 매운바람이 그치면(濟는 止의 뜻) 곧 많은 구멍들이 텅 비어서 고요해진다. 그러니 너만 유독 나뭇가지가 흔들흔들하고 나무 끝이 살랑살랑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라고 했다. 안성자유가 말하기를 “地籟는 곧 많은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것이고요, 人籟는 比竹 같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것입니다만 天籟가 무엇인지 감히 묻겠습니다.”라고 물었다. 그러자 남곽자기가 말하기를 “무릇 불어대는 바람 소리가 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그런데도 그 스스로로부터 하도록 하는 것이거늘 모두가 다 그 스스로 취하는 것이니 성난 소리로 소리 나도록 한 것은 그 누구인가?”라고 했다.
大知는 閑閑하고 小知는 閒閒하며 大言은 炎炎하고 小言은 詹詹이로다 其寐也엔 魂交하고 其覺也엔 形開하야서 與接爲構하야 日以心鬪하나니라 縵者와 窖者와 密者라 小恐惴惴오 大恐縵縵하야 其發이 若機栝은 其司是非之謂也요 其留如詛盟은 其守勝之謂也요 其殺若秋冬은 以言其日消也요 其溺之所爲之는 不可使復之也요 其厭也緘은 以言其老洫也니 近死之心이라 莫使復陽也니라 喜怒哀樂과 慮嘆變慹과 姚佚啓態에 樂出虛이며 蒸成菌이로다 日夜에 相代乎前호되 而莫知其所萌하나니 已乎 已乎어다 旦暮에 得此하니 其所由以生乎인저
큰 지혜는 느긋하고 작은 지혜는 소소한 일도 따지며 훌륭한 말은 담담하나 보잘것없는 말은 수다스럽다. 잠잘 때에는 영혼이 교류하며(꿈꾸며) 잠에서 깨면 형체가 열려서 외물과 접촉하여 얽힘(분쟁)을 일으켜서 날마다 마음속에서 싸운다. 그리하여 느린 사람, 음험한 사람, 세밀한 사람이 있고, 작은 두려움으로 깜짝깜짝 놀라고 큰 두려움으론 생기 잃은 모습이어서 그 튕겨 나가는 것이 활줄에 건 화살과 같아서 그 是非를 맡은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盟誓한 사람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자기의 승리를 지켜나가려는 것을 말함이요. 가을과 겨울처럼 쇠퇴해 가는 것은 날마다 소멸해 감을 말함이니 그 흠뻑 빠짐이 행한 바는 가히 하여금 돌이키게 할 수 없다. 마음을 덮어버린 것이 마치 봉합한 것과 같은 것은 늙어서 욕심 넘침을 말한 것이니 죽음에 가까이 간 마음인지라 다시 살아나게 할 수가 없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염려하거나 탄식하고 변덕스럽거나 두려워하며, 까불거나 방탕하고 솔직히 터놓거나 꾸미는 마음작용이 음악소리가 피리구멍(虛)에서 나오고 수증기가 버섯을 성장시키는 것과 같다. (이런 감정의 변화가) 밤낮으로 서로 교대하여 앞에 나타나는 데에도 그 감정이 싹트는 바를 알지 못하니 그만둘지어다. 그만둘지어다. 아침저녁으로 이것을 얻으니 그 감정의 변화가 말미암아 생기는 바일 것이다.
非彼면 无我오 非我면 无所取니 是亦近矣나 而不知所爲使하며 若有眞宰나 而特不得其朕하며 可行을 已信이나 而不見其形이니 有情이로되 而无形이로다 百骸와 九竅와 六藏을 賅而存焉호니 吾는 誰與爲親고 汝는 皆說之乎아 其有私焉가 如是인댄 皆有爲臣妾乎아 其臣妾은 不足以相治乎아 其遞相爲君臣乎아 其有眞君存焉가 如求得其情與不得에 无益損乎其眞이니라
저것(희노애락의 감정의 변화)이 아니면 나라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구체적인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희노애락의 감정에 취할 바가 없으니 이 같은 견해는 역시 진실에 가깝지만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참다운 主宰者가 있는 것 같지만 다만 그 조짐을 얻지 못하면 조물자의 작용 가능성을 매우 믿을 수 있지만 그 형체를 보지 못하니 진실한 실정은 있지만 구체적 증거 형태는 없다. 육체에도 100개의 뼈마디와 아홉 구멍과 6개의 장부를 갖추어서 존재하니 나(남곽자기)는 그중에서 어느 것과 더불어 더 가까운가. 너(안성자유)는 이 모든 것을 다 기뻐하는가. 아니면 그중 어느 하나를 사사로이 사랑하는가. 이와 같다면(신체의 어느 하나가 전체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면) 몸의 각 부분 모두를 臣妾으로 삼을 것인가. 그 신첩들은 족히 서로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인가. 서로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임금과 신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어딘가에 참다운 군주가 존재함이 있는가. 그 인과관계의 실정을 구해 얻는 것과 얻지 못하는 것 같은 문제는 그 자연의 진실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 것도 없다.
一受其成形하면 不忘以待盡이어늘 與物로 相刃相靡하야 其行進이 如馳하야 而莫之能止하나니 不亦悲乎아 終身役役호되 而不見其成功하며 苶然疲役호되 而不知其所歸하나니 可不哀邪아 人謂之不死인들 奚益이리오 其形이 化어든 其心이 與之然하니 可不謂大哀乎아 人之生也ㅣ 固若是芒乎아 其我獨芒이오 而人은 亦有不芒者乎아
사람이 한번 이루어진 신체를 받으면 당장 죽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소진되어 죽게 됨을 기다리는 존재이거늘 외물과 더불어 서로 거스러고 서로 갉아먹어서 그 행함(생명)이 다하는 것이 죽으러 달려가는 것과 같아서 멈추게 하지 못하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육신을 마칠 때까지 악착같이 수고하면서 그 성공을 보지 못하고 고달프게 수고하고 애쓰면서도 그 돌아가 쉴 곳(죽음)을 알지 못하니 가히 애처롭지 아니한가? 어떤 사람은 우리가 죽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육체가 죽어서 변화하면 육체에 깃든 마음도 육체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니(육체가 죽으면 마음도 죽는다는 말) 가히 큰 슬픔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삶이 진실로 이와같이 어두운 것인가. 아니면 나만 홀로 미혹되고 남들은 또한 어둡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인가.
夫隨其成心하야 而師之면 誰獨且无師乎리오 奚必知代하야 而心自取者야 有之리오 愚者도 與有焉하니라 未成乎心이오 而有是非면 是는 今日適越而昔至也로다 是以無有로 爲有니 无有로 爲有면 雖有神禹라도 且不能知온 吾獨且奈何哉리오
무릇 이루어진 마음(타고난 本有의 마음)을 따라서 그것을 스승으로 삼으면 누군들 유독 스승으로 삼을 사람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代를 알아서 마음으로 스스로 취하는 자라야 만이 이것이 있으리요. 어리석은 사람도 함께 이 成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마음에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이것은 ‘오늘 월나라로 갔는데 어제 이른 것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있음이 없는 것으로서 있음으로 여기는 것이니 있지 않는 것으로 있다고 한다면 비록 (모르는 것이 없는) 신령한 우임금이 있다하더라도 장차 능히 알 수 없을 것이니 난들 유독 장차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夫言은 非吹也니 言者有言이나 其所言者ㅣ 特未定也인댄 果有言邪아 其未嘗有言邪아 其以爲異於鷇音이나 亦有辯乎아 其无辯乎아 道는 惡乎隱이완대 而有眞僞며 言은 惡乎隱이완대 而有是非오 道는 惡乎往而不存이며 言은 惡乎에 存而不可리오 道隱於小成하고 言隱於榮華라 故有儒墨之是非하야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하나니 欲是其所非오 而非其所是인댄 則莫若以明이니라
무릇 말이라는 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다. 사람의 말속에는 말(인식의 내용, 의미)이 있으나 그 말한 바의 내용이 특히 일정하지 못하다면(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게 하면) 과연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일찍이 말이 있지 않은 것인가. (사람의 말은) 병아리의 소리와 다르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또한 구별이 있는 것인가 구별이 없는 것인가. 참된 도는 어디에 숨어버렸기에 참과 거짓이 있게 되었으며 참다운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있느냐. 참다운 道는 어디에 간들 있지 않을 것이며, 참된 말은 어디에 있은들 옳지 않겠는가(잘못 해석하면 → 참된 말이 어디에 있기에 옳지 않게 되었나. - 로도 해석됨.). 도는 작은 성취 때문에 숨어버렸고 말은 화려한 꾸밈(문화적 위선) 때문에 숨어버렸다. 고로 儒者와 墨者의 是非가 있게 되어 다른 학파에서 그르다고 한 바를 옳다고 하고 다른 학파에서 옳다고 한 바를 그르다고 하나니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 하고 상대가 옳다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明晳한 認識(明)으로써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밝음으로써 하는 것이 최상이다.)
物无非彼며 物无非是어늘 自彼則不見하고 自是則知之하나니 故曰 彼出於是며 是亦因彼라하노라 彼是ㅣ 方生之說也라 雖然이나 方生이면 方死요 方死면 方生하며 方可면 方不可요 因是因非하며 因非因是니 是以로 聖人不由하고 而照之於天하나니 亦因是也니라 是亦彼也며 彼亦是也니 彼亦一是非며 此亦一是非니 果且有彼是乎哉아 果且无彼是乎哉아
모든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모든 사물은 이것 아닌 것이 없거늘 저것의 입장에서 보면 저것이 안보이고 자기 스스로 알려고 하면 그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또한 저것에 말미암는다.”라고 한다. 저것과 이것이 나란히 생긴다는 說이다. 비록 그러하나 나란히 생하면 나란히 죽고 나란히 죽으면 나란히 생하며 나란히 가능하면 나란히 불가능하다. 옳음에 말미암고 그름에 말미암으며, 그름에 말미암고 옳음에 말미암는다는 주장(彼是의 상대성에 대한 지적)으로 끝나고 만다.이 때문에 성인은 따르지 않고 자연(天)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 또한 (상대적인 是가 아닌 절대적인) 是에 말미암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저것이 될 수 있으며 저것 또한 이것이 될 수 있으므로 저것도 또한 是非가 하나로 (無化)된 것이며 이것도 또한 是非가 하나로 (無化)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또한 저것과 이것의 구분이 있는 것인가. 과연 또한 저것과 이것의 구분이 없는 것인가.
彼是莫得其偶를 謂之道樞라하노니 樞始得其環中이면 以應无窮하리니 是亦一无窮이며 非亦一无窮也니라 故曰莫若以明이라하노라 以指로 喩指之非指론 不若以非指로 喩指之非指也니라 以馬로 喩馬之非馬론 不若以非馬로 喩馬之非馬也니라 天地一指也며 萬物一馬也어늘 可乎可하고 不可乎不可라하니라
저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못하는 것을 道의 지도리라고 말하니 지도리가 비로소 고리 가운데의 효용을 얻게 되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도 또한 무궁한 변화를 하나로 한 것이며 아님도 또한 무궁한 변화를 하나로 한 것이다. 고로 明晳한 認識(明)으로 깨닫는 것이 최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이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같지 못하고, 말을 가지고서 말이 말이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이 아닌 것으로써 말이 말이 아님을 밝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늘과 땅도 한 개의 손가락이고 만물도 한 마리 말이거늘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可한 것을 可하다고 하고, 나에게 不可한 것을 不可하다고 한다.(만물이 본래 하나인데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인식에 따라서 可, 不可로 나누기 시작했다는 뜻)
道는 行之而成이오 物은 謂之而然이니 惡乎然고 然於然이니라 惡乎不然고 不然於不然이니라 物固有所然하며 物固有所可하니 无物不然하며 无物不可하니라
길은 사람들이 걸어 다녀서 생기고 물건은 사람들이 말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무엇을 근거로 그렇다고 하는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그렇다고 한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한 것이다. 모든 만물은 진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모든 존재는 진실로 옳다고 하는 바가 있으니 모든 존재는 그렇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옳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故로 爲是하야 擧莛與楹과 厲與西施와 恢恑譎怪에 道通爲一하니라 其分也成也요 其成也毁也라 凡物이 无成與毁히 復通爲一이니라 唯達者야 知通爲一하야 爲是不用하고 而寓諸庸하나니 庸也者는 用也요 用也者는 通也요 通也者는 得也니 適得而幾矣니라 因是已니 已而오 不知其然을 謂之道라하나니라
고로 이를 위해서 가냘픈 풀줄기와 강한 기둥, 문둥이(醜)와 서시부인(美)을 들어서 세상의 온갖 이상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道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가 되게 한다. 크다란 하나가 나누어져서 상대세계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성립된 것은 파괴가 된다. 모든 사물은 형성과 파괴라고 할 것 없이 (道에 의해) 다시 통해서 하나가 된다. 오직 통달한 사람이라야 만이 통해서 하나가 됨을 알아서 이것 때문에 (인간의 가치적 편견을) 쓰지 않고 庸(常住不變의 道)에 맡긴다. 그러니 庸(不變의 自然)이라는 것은 用(無限變化의 作用)이요, 무한 변화의 작용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통하는 것이요, 通이라는 것은 自得(자기원인에 의해서 저절로 얻는 것)이니 自得의 경지에 나아가게 되면 거의 道에 가깝다. 是(절대 진리요, 자연대로 맡기는 올바름)에 말미암을 따름이니 그렇게 할 뿐이요 그러한 까닭(왜 그런지)을 알지 못하는 것을 道라고 말한다.
勞神明하야 爲一하고 而不知其同也를 謂之朝三이니 何謂朝三고 狙公이 賦茅할새 曰 朝三而暮四라한대 衆狙皆怒어늘 曰 然則朝四而暮三이라한대 衆狙皆悅하니 名實이 未虧어늘 而喜怒爲用이니 亦因是也라 是以로 聖人은 和之以是非하야 而休乎天釣하나니 是之謂兩行이니라
정신을 고달프게 하여 억지로 하나로 만들고 그것이 본래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朝三이라고 하니, 무엇을 일러 朝三이라 하는가. 狙公(원숭이를 부리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주겠다’고 말하자 뭇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거늘, ‘그렇다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 말하니 뭇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하루에 7개라는) 이름과 실재가 이지러지지 않았거늘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으니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또한 절대세계의 是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無爲自然의 취득자인 聖人은 이것을 조화함을 是非로서 하여 하늘의 균등(절대의 하나)에서 편안히 쉬나니, 이것을 일컬어 兩行(두개가 나란히 간다)이라 한다.
古之人은 其知有所至矣로다 惡乎至오 有以爲未始有物者ㅣ 至矣盡矣라 不可以加矣로다 其次는 以爲有物矣오 而未始有封也라하며 其次는 以爲有封焉이오 而未始有是非也라하나니 是非之彰也ㅣ 道之所以虧也요 道之所以虧ㅣ 愛之所以成이니 果且有成與虧乎哉아 果且无成與虧乎哉아
옛사람들은 그 지혜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바가 있었다. 어디에까지 이르렀는가. 처음에 사물이 아직 있지 않다고 여겼던 사람이 있었으니 지극하고 극진하여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구별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 다음은 사물과 사물의 구별은 있지만 아직 옳고 그름은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옳고 그름이 나타나는 것은 道가 무너지는 까닭이고 도가 무너지는 까닭은 사사로운 사랑이 생성되는 까닭이니, 과연 또한 생성과 어그러짐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연 또한 생성과 어그러짐이 없는 것인가.
有成與虧는 故昭氏之鼓琴也요 无成與虧는 故昭氏之不鼓琴也라 昭文之鼓琴也와 師曠之枝策也와 惠子之據梧也에 三子之知幾乎라 皆其盛者也니라 故로 載之末年하니라
성립과 어그러짐이 있는 것은 저 소씨가 거문고를 연주했기 때문이다. 성립과 어그러짐이 없게 되는 것은 저 소씨가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昭文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과 사광이 琴柱를 조율하는 것과 惠施가 오동나무 책상에 기대어 변론함에 세분 선생의 지혜는 거의 완성단계에 가까이 갔으니 모두 자기 분야의 완성자들이다. 그러므로 후세역사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唯其好之也에 以異於彼라 其好之也에 欲以明之하니 彼非所明而明之라 故로 以堅白之昧로 終하야늘 而其子도 又以文之綸으로 終하야 終身无成하니 若是而可謂成乎인댄 雖我라도 亦成也요 若是而不可謂成乎인댄 物與我无成也라 是故로 滑疑之耀는 聖人之所圖也라 爲是不用하고 而寓諸庸하나니 此之謂以明이니라
그들이 그것을 좋아한 것은 저 道의 경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데 있었어 자기들이 잘하는 장점으로써 그 道를 밝히고자 하였으니 저 道라 하는 것은 인간의 知와 巧로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닌 데에도 그것을 밝히려고 하는지라 그 때문에 (혜시는) 堅白論같은 궤변을 일삼는 愚昧함으로 몸을 마쳤는데, (소문은) 그 아들 또한 아버지 昭文의 거문고 연주 기술만으로 그쳐 종신토록 道를 이룸이 없었다. 이와 같이 하고서 도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비록 우리같은 凡人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道를 완성한 것이요 이와같이 하고서 도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면 저들 세 사람(物)과 우리 凡人들 모두 道를 이룸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혼돈되고 불분명한 밝음은 성인이 도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의 작위적인 지식을 쓰지 않고 불변의 자연에 몸을 맡기나니 이것을 일컬어 밝음이라고 말한다.
今且有言於此하니 不知其與是로 類乎아 其與是로 不類乎아 類與不類로 相與爲類하면 則與彼로 无以異矣니라 雖然이나 請嘗言之호리라
이제 또한 여기에 말이 있다. 그것(其, 말)이 진리(是, 이것)와 유사한지 진리(是, 이것)와 유사하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유사한 것과 유사하지 않은 것을 서로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면 저것(非眞理)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시험삼아 한 번 말해보리라.
有始也者하며 有未始有始也者하며 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하며 有有也者하며 有无也者하며 有未始有无也者하며 有未始有夫未始有无也者하니 俄而오 有无矣니 而未知케라 有无之果孰有孰无也요 今我則已有謂矣로니 而未知케라 吾所謂之其果有謂乎아 其果无謂乎아 天下에 莫大於秋毫之末이오 而大山爲小며 莫壽於殤子요 而彭祖爲夭하니라 天地與我竝生하고 而萬物與我爲一하니라
처음(始)이라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는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이 있지 않았다는 말도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有라는 말이 있으며, 無라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無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며, 처음에 처음에 無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언어표현이 생기자) 이윽고 無가 있게 된 것이니 아직은 알지 못하겠다. 有와 無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없는 것인지를. 이제 내가 이미 말함이 있는데 아직 알지 못하겠다. 내가 말한 것이 과연 말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연 말함이 없는 것인가. 천하에는 가을철 털의 끝보다 큰 것이 없고 태산이 가장 작다. 일찍 죽은 아이보다 長壽한 사람이 없고 (팔백년을 살았다고 하는) 팽조는 가장 일찍 죽은 것이다. 天地도 나와 나란히 生하고 만물도 나와 하나가 된다.
旣已爲一矣란대 且得有言乎아 旣已謂之一矣란대 且得无言乎아 一與言이 爲二이오 二與一이 爲三이니 自此以往으론 巧歷(曆)라도 不能得이온 而況其凡乎아 故로 自无로 適有하야도 以至於三이온 而況自有로 適有乎아 无適焉이니 因是已니라
이미 하나가 되었다면 또 여기에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미 하나라고 말을 해버렸으니 또한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一과 말이 二가 되고 二와 一이 三이 되니 이로부터 앞으로는 아무리 계산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능히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보통사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無로부터 有로 나아가도 三이 됨에 이르니, 하물며 有로부터 有로 나아감이겠는가.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니 是(道의 自然)를 따를 뿐이다.
夫道는 未始有封하고 言은 未始有常하니 爲是而有畛也하니라 請言其畛하노라 有左有右하며 有倫有義하며 有分有辯하며 有競有爭하니 此之謂八德이니라
무릇 도는 애초에 구별이 있지 않았고, 말은 애초에 항상함(일정함)이 있지 않았다. (일정함이 없는 말로 구별이 없는 道를 표현하려 했으니) 이 때문에 사물에 구별이 있게 되었다. 청컨대 그 구별(대립 차별)에 대해서 말을 해보겠다. 왼쪽이라는 것이 있고 오른쪽이라는 것이 있으며, 인륜관계라는 것이 있으며 예의규범이라는 것이 있고, 신분분수라는 것이 있으며 차별질서라는 것이 있고, 겨루는 일이 있으며 다투는 일이 있으니 이것을 일컬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8가지 작용이라고 한다.
六合之外란 聖人이 存而不論하고 六合之內란 聖人이 論而不議하고 春秋經世先王之志란 聖人이 議而不辯하시니 故分也者는 有不分也요 辯也者는 有不辯也니라 曰 何也요 聖人은 懷之하고 衆人은 辯之하야 以相示也하나니 故曰辯也者는 有不見也라하노라
六合의 밖(형이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인은 그냥 두고 論하지 아니하고, 六合의 안(형이하의 사물세계)에 대해서는 성인은 論하기만 하고 是非를 따지지 않는다. 《春秋》에 나타난 經世에 대한 先王들의 기록에 대해서는 성인은 是非를 따지기는 하되 功過를 나누어 차별하지는 않는다. 대저 사람들의 구별능력이라는 것은 구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람의 차별능력은 차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말하노니 무슨 까닭인가? 성인은 이 3가지 대상에 대해서 이것을 안으로 품고 보통사람들은 功과 過를 구분해서 서로 내보이면서 경계한다. 그 때문에 인간의 구별능력을 가지고서는 참다운 도를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夫大道는 不稱하며 大辯은 不言하며 大仁은 不仁하며 大廉은 不嗛하며 大勇은 不忮하나니 道昭면 而不道요 言辯이면 而不及이오 仁常이면 而不成이오 廉淸이면 而不信이오 勇忮면 而不成이니 五者ㅣ 园이어늘 而幾向方矣니라 故知止其所不知하면 至矣니 孰知不言之辯과 不道之道리오 若有能知면 此之謂天府니 注焉而不滿하며 酌焉而不竭이로대 而不知其所由來라 此之謂葆光이니라
대저 큰 도는 이름붙여 일컬어지지 않고 크다란 웅변은 말하지 아니하며 크게 어진 것은 어질지 아니하며 큰 청렴은 겸손하지 않으며 큰 용맹은 사납지 아니하나니 道가 밝게 드러나면 즉 도가 아니게 되고 말이 분석이 심해지면 미치지 못하고 어진 마음의 대상이 일정하면 영원히 사랑하는 세계는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청렴함이 지나치게 맑으면 미덥지 아니하고 용맹스러움이 사나워지면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나니 이 다섯 가지는 둥글고자 하면서도 모난 데로 향하는 것에 가깝다. 고로 사람의 知가 알지 못하는 것에 멈추면 지극하니 누가 말없는 말과 도라고 하지 않는 도(참다운 도)를 알겠는가. 만일 이것을 안다면 그 지혜는 하늘의 창고라고 일컬을 것이니 아무리 부어대도 가득차지 않으며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대도 그 유래를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컬어 밝은 빛을 안으로 감춘다고 말한다.
故로 昔者에 堯問於舜曰 我欲伐宗膾胥敖하야 南面而不釋然하노니 其故는 何也오 舜曰 夫三子者는 猶存乎蓬艾之間이어늘 若不釋然은 何哉오 昔者에 十日이 竝出하야 萬物皆照하니 而況德之進乎日者乎따녀
그러므로 옛날에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물어 말하기를 “내가 숭(宗=崇의 假借字)나라 회나라 서오족을 무력으로 정벌하고자 하는데 제왕으로서 남쪽으로 보고 천하를 다스리면서 마음이 석연치 않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순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이 세 나라는 아직도 쑥밭 사이에 있거늘(즉 아직도 야만인들이거늘) 임금께서 석연치 않게 생각하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날에 10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나와서 만물이 모두 비추어졌는데 하물며 덕이 태양보다 더 나은 사람이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齧缺이 問乎王倪曰 子는 知物之所同是乎아 曰 吾惡乎知之리오 子는 知子之所不知邪아 曰 吾惡乎知之리오 然則物无知邪아 曰 吾惡乎知之리오 雖然이나 嘗試言之하노라 庸詎知吾所謂知之 非不知邪며 庸詎知吾所謂不知之 非知邪리오
설결이 왕예에게 물어 말하기를 “선생님은 모든 사물들이 다같이 옳다고 인정되는 것에 대해서 아십니까?”라고 물으니, (왕예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설결이 묻기를) “선생님은 선생님이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하니, (왕예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대답하자 (설결이 묻기를) “그렇다면 모든 사물에 대해 앎이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왕예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시험삼아 말해보겠다. 나의 이른바 안다는 것이 알지 못함이 아님을 어찌 알겠으며 나의 이른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且吾는 嘗試問乎女하노라 民溼寢則腰疾이라 偏死어늘 鰌然乎哉아 木處則惴慄恂懼어늘 猨猴然乎哉아 三者孰知正處오 民은 食芻豢하고 麋鹿은 食薦하고 蝍蛆는 甘帶하고 鴟鴉는 嗜鼠하나니 四者孰知正味오 猨을 猵狙以爲雌하고 麋與鹿으로 交하고 鰌與魚로 游하나니 毛嬙 麗姬는 人之所美也로대 魚見之深入코 鳥見之高飛코 麋鹿이 見之決驟하나니 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오 自我로 觀之컨댄 仁義之端과 是非之塗ㅣ 樊然殽亂하니 吾는 惡能知其辯리오
“또 나는 시험삼아 너에게 묻겠노라. 사람은 습한 데에서 자면 허리가 아파지고 한쪽이 죽거늘(반신불수의 중풍이 걸리거늘)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나무 위에서 거처하면 벌벌 떨면서 두려워 하거늘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은 소와 양, 개와 돼지를 먹고, 사슴은 풀을 뜯어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소리개와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으니, 이 네 가지 중에서 누가 올바른 맛을 아는가? 암컷원숭이를 수컷원숭이가 자기암컷으로 삼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미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더불어 헤엄치나니, 모장 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 버리고, 새는 그들을 보면 하늘 높이 날아가고, 사슴은 그들을 보면 힘껏 달아난다. 그러니 이 네 가지 중에서 누가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女色)을 안다고 할 것인가? 나로부터 이것을 본다면 仁義의 단서와 옳고 그름의 길이 복잡하게 얽혀서 어수선하게 어지러우니 내가 어찌 그 구별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齧缺曰 子不知利害인댄 則至人은 固不知利害乎아 王倪曰 至人은 神矣라 大澤이 焚하야도 而不能熱하며 河漢이 沍하야도 而不能寒하며 疾雷破山하며 <飄>風이 振海하야도 而不能驚하나니 若然者는 乘雲氣하며 騎日月하야 而遊乎四海之外하나니 死生도 无變於己온 而況利害之端乎따녀
설결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면 지상최고의 사람도 본시 利害를 알지 못합니까?”라고 물으니, 왕예가 말하기를 “至人은 신통력이 있는 존재이다. 못가의 큰 수풀이 불에 타더라도 그를 능히 뜨겁게 할 수 없으며 황하나 한수가 얼도록 춥더라도 그를 능히 춥게 할 수 없으며 빠른 우레소리가 산을 쪼개고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지라도 그를 능히 놀라게 할 수 없으니, 그와 같은 사람은 구름기운을 타며 해와 달을 몰아서 四海의 밖에서 노닌다. 그러니 죽음과 삶도 至人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하물며 利害의 말단 따위이겠는가”라고 대답했다.
瞿鵲子問乎長梧子曰 吾聞諸夫子호니 聖人은 不從事於務하며 不就利하며 不違害하며 不喜求하며 不緣道하나니 无謂호되 有謂하며 有謂호되 无謂하야 而遊乎塵垢之外라하야늘 夫子는 以爲孟浪之言이어늘 而我는 以爲妙道之行也라하노니 吾子는 以爲奚若고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어 말하기를 “내가 우리 선생님께 들어보니 (어떤 사람이)‘성인은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지 아니하며 이익에 나아가지 아니하며 해로움을 피하지 아니하며 구했다고 기뻐하지 아니하며 도를 억지로 따르지 아니하니, 말이 없으되 말이 있고 말이 있으되 말이 없어서 티끌과 때(세속)의 밖에 노닌다.’고 말하는데, 선생님은 이것을 맹랑한 말이라고 여기셨거늘 나는 오묘한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대(장오자)께서는 이 말을 어떻게 여기십니까?”하고 물으니,
長梧子曰 是는 皇(黃)帝之所聽熒也온 而丘也는 何足以知之리오 且女는 亦太早計로다 見卵而求時夜하며 見彈而求鴞炙로다 予 嘗爲女하야 妄言之호니 女以妄으로 聽之하도소니 奚오 旁日月하며 挾宇宙하야 爲其脗合이오 置其滑涽하야 以隸相尊하나니라
장오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黃帝도 듣고 어리둥절할 말인데 공자 같은 사람이 어찌 족히 알 수 있으리오. 또한 그대는 또한 너무 지나치게 빨리 헤아리도다. 달걀을 보고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를 요구하며 彈丸을 보고 올빼미 구이를 요구하는 격이다. 내가 시험삼아 자네를 위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해보건대 자네도 마음 내키는 대로 내말을 들어주게 어떤가? (성인은) 해와 달을 옆에 나란히 놓고 우주를 옆구리에 끼고 만물과 일체를 이루고 혼돈의 道의 세계에 자신을 내버려 두어서 노예적 지위로 자신을 낮추어서 서로 존중하나니라.”
衆人은 役役커든 聖人은 愚芚하사 參萬歲而一成純하시나니 萬物이 盡然이어늘 而以是로 相蘊하나니라 予는 惡乎知說生之非惑邪며 予는 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리오 麗之姬는 艾封人之子也러니 晉國之始得之也에 涕泣沾襟하다가 及其至於王所하야 與王同筐牀하야 食芻豢而後에야 悔其泣也하니라 予는 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리오
“보통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 부지런히 힘쓰는데 성인은 어리석고 아둔해서 만년의 세월 변화를 하나로 하고 오로지 순수한 세계를 이룩하시나니 만물이 모두 그러하거늘 이것으로써 서로 감싼다. 내 어찌 삶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젊어서 고향을 잃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 麗姬는 애땅 국경 관문지기의 자식이었는데 진나라가 처음 이 여자를 데려왔을 때에는 눈물이 옷섶을 적시도록 울다가 왕의 처소에 이르러서 왕과 함께 넓은 침대를 같이 쓰고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음에 미친 이후에야 그 처음에 울었던 것을 뉘우쳤다. 나는 어찌 죽은 사람이 그 처음에 살기를 바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알 수 있겠는가.”
夢에 飮酒者ㅣ 旦而哭泣하고 夢에 哭泣者ㅣ 旦而田獵하나니 方其夢也에 不知其夢也하야 夢之中에 又占其夢焉이라가 覺而後에야 知其夢也하나니라 且有大覺而後에야 知此其大夢也어늘 而愚者는 自以爲覺하야 竊竊然知之하야 君乎아 牧乎아하나니 固哉라 丘也與女는 皆夢也며 予謂女夢도 亦夢也라 是其言也는 其名이 爲弔詭나 萬世之後에 而一遇大聖이 知其解者하면 是는 旦暮遇之也니라
“꿈에 술을 마신 사람은 아침에 곡을 하면서 울고 꿈에 곡을 하면서 운 사람은 아침에 사냥을 나간다고 하니 바야흐로 꿈꿀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을 알지 못하고 꿈속에서 또 그 꿈에 대한 점을 치다가 잠을 깬 뒤에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크게 깨달은 뒤에야 이 인생이란 것이 긴 꿈이었음을 알게 되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기고 절절히 속속들이 안다고 하면서 임금이다 소 치는 목동이다 라고 구별을 하나니 진실로 딱하네. 공자나 자네나 모두가 꿈을 꾸고 있다네. 자네에게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나도 역시 꿈꾸고 있네. 이런 내 말을 괴이한 이야기라 여기겠지만 만세 뒤에 한 번 이 말 뜻을 아는 대 성인을 만나면 이것은 마치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네.”
旣使我與若으로 辯矣란대 若이 勝我요 我不若勝인댄 若이 果是也요 我果非也邪아 我勝若이오 若이 不吾勝인댄 我果是也요 而果非也邪아 其或是也며 其或非也邪아 其俱是也며 其俱非也邪아
“만일 내가 너와 논쟁하였는데 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너를 이기지 못했다면 너는 과연 옳고 나는 과연 그른 것인가? 내가 너를 이기고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나는 과연 옳고 너는 과연 그른 것인가? 아니면 어느 한쪽이 옳고 또다른 한쪽이 그르단 말인가? 아니면 양쪽이 모두 옳거나 양쪽이 모두 그르단 말인가?”
我與若이 不能相知也인댄 則人이 固受黮闇하리니 吾誰使正之요 使同乎若者로 正之인댄 旣與若으로 同矣어니 惡能正之리오 使同乎我者로 正之인댄 旣同乎我矣어니 惡能正之리오 使異乎我與若者로 正之인댄 旣異乎我與若矣어니 惡能正之리오 使同乎我與若者로 正之인댄 旣同乎我與若矣어니 惡能正之리오 然則我與若與人이 俱不能相知也로소니 而待彼也邪아
“나와 네가 서로 알 수 없다면 다른 사람(백성)들이 진실로 어둠 속에 빠지고 말 것이니 내가 누구로 하여금 바로잡게 할 수 있겠는가. 너와 의견이 똑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잡을려고 할진덴 이미 너와 더불어 같은 사람이니 어찌 능히 올바르게 판정 내리겠는가.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잡게 한다면 이미 그가 나와 똑같은 사람이니 어찌 능히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나와 너와 의견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잡게 한다면 이미 나와 너 모두와 다르니 어찌 능히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나와 너와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잡을려고 한다면 이미 나와 너와 의견이 같으니 어찌 능히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와 너와 다른 사람까지도 모두 서로 알 수 없을 것이니 또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
化聲之相待론 若其不相待니 和之以天倪며 因之以曼衍이 所以窮年也니라 何謂和之以天倪요
“변화하기 쉬운 소리를 서로 기다리는 것은 그 서로 기다리지 아니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조화하기를 자연의 道로서 하며 끝없는 변화에 맡기는 맡기는 것이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을 다하는 방법이다.”
“道(天倪)로 조화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曰 是不是하며 然不然이니라 是若果是也면 則是之異乎不是也ㅣ 亦无辯이니라 然若果然也면 則然之異乎不然也ㅣ 亦无辯이니라 忘年忘義하야 振於无竟이라 故寓諸无竟이니라
이르기를 “옳고 옳지않음과 그렇고 그렇지 않음이니라. 옳음이 만약 과연 옳다면 그 옳음은 옳지않음과 다를 것이 또한 변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함이 만약 과연 그러하다면 그 그러함은 그러하지 않음과 다를 것이 또한 변명할 필요가 없다. 시간도 잊어버리고 뜻도 잊어버려서 무한의 경지에서 떨쳐 노닐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의 경지에 맡겨지는 것이 된다네.”라고 했다.
罔兩이 問景曰 曩에 子行하다가 今에 子止하며 曩에 子坐하다가 今에 子起하니 何其无特操與요 景曰 吾는 有待而然者邪아 吾所待는 又有待而然者邪아 吾는 待蛇蚹蜩翼邪아 惡識所以然하며 惡識所以不然이리오
망양이 그림자에게 묻기를 “잠시 전에 그대가 걸어가다가 지금은 그대가 멈췄으며 조금 전에는 그대가 앉아 있다가 지금은 그대가 일어서 있으니 일정한 지조가 없는가?”라고 하니 그림자가 말하기를 “나는 뭔가 기다림이 있어서 그러한가. 내가 기다리는(의지하는) 바는 또 따로 의지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와 같은 것에 의지하는가. 그러한 까닭을 어떻게 알며, 그렇지 않는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했다.
昔者에 莊周夢爲胡蝶호니 栩栩然胡蝶也러니 自喩適志與라 不知周也호라 俄然覺하니 則蘧蘧然周也러라 不知케라 周之夢에 爲胡蝶與아 胡蝶之夢에 爲周與아 周與胡蝶은 則必有分矣니 此之謂物化니라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보니 펄럭펄럭 잘도 나는 나비였다. 스스로 유쾌하여 나의 뜻에 만족스러워서 (나비가 된 내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을 깨니 별안간 장주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장주의 꿈에 나비가 되었는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되었던가. 장주와 나비가 즉 반드시 구별이 있으니 이것을 일러 다른 사물로 변화라고 말한다.
[본 편의 뜻을 총체적으로 해설해보면]
1)전통문화연구회에서는
《莊子》 내외편을 통틀어 가장 난해하기로 이름난 이 편은 <齊物論>이라는 편 이름의 의미부터 학자들의 논의가 분분하다. 곽상, 성현영을 비롯한 당대 이전까지의 주석가들은 齊物論이란 是非와 美醜라는 편견과 아집의 세계를 떠나 일체의 사물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만물제동의 세계를 주장한다는 의미를 보고 ‘齊物의 論’으로 이해했다. 특히 劉勰이 《文心雕龍》<論說>에서,
“장자는 제물을 논의하면서 論으로 편이름을 붙였다[莊周齊物 以論爲名].”
고 언급한 이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제물론을 ‘齊物之論’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송대의 王安石과 呂惠卿, 林希逸 이후로는 儒·墨을 비롯한 세속의 온갖 論議(衆論)와 是非를 가지런히 통일시킨다[齊]는 의미에서 ‘物論을 齊하다’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어느 쪽의 견해를 따르느냐에 따라 <제물론>은 물론 장자 사상 전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전자의 입장에 서 있는 곽상은 <齊物論>을 두고,
“스스로를 옳다 여기고 다른 사람을 그르다 하며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 그 때문에 시비가 비록 달라도 피와 아가 균등하다[부자시이비피 미기이악인 물막불개연 연고시비수이이피아균야].”
고 풀이하여 齊物論의 중심 논의를 만물제동의 사상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宋代의 林希逸은,
“物論이란 사람들의 논의이니 衆論이라고 말한 것과 같고, 齊는 통일한다는 뜻이니 뭇 논의를 합쳐서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함이다. 전국시대에는 학문이 같지 않아서 서로 간에 시비를 따졌다. 그 때문에 장자는 시비를 모두 잊고 자연으로 돌아감만 못하다고 여겼으니 이것이 편의 명칭을 제물론이라 한 뜻이다[物論者 人物之論也 猶言衆論也 齊者 一也 欲合衆論而爲一也 戰國之世 學問不同 更相是非 故莊子以爲不若是非兩忘而歸之自然 此其立名之意也].”
고 풀이하여 후자의 입장에 섰다.
이 편의 제1장은 南郭子綦와 顔成子游의 긴 대화로 진행되는데, 이는 池田知久가 지적한 것처럼 道家思想의 역사적 전개의 개막을 고하는 기념비적 문답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 문답은 《莊子》를 비롯한 도가의 제문헌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성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동시에 가장 난해할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제1장 도입부의 地籍에 대한 다채롭고도 리얼한 표현은 王安中이 “책을 덮고 있어도 바람 소리가 윙윙 들리는 듯하다.”고 감탄할 만큼 뛰어난 문학적 표현이며, 명말의 방이지가 한 편의 天風賦라고 이름을 붙일 만큼 음악적일 뿐만 아니라, 숱한 亞流作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고금을 통틀어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문장이라 할 만하다.
<제물론>에서 道는 ‘一’이며 또 ‘無’로서 인간의 知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후 도가사상의 다양한 전개는 이 편에서 나온 논의를 확대, 심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고려원에서는
造物弄人如弄幻 造物은 사람 놀리기 꼭두각시처럼 하고
達人觀幻似觀身 達人은 幻을 몸 보듯 하네.
人生幻花同爲一 인생은 幻꽃으로 모두 하나이거니
畢竟誰眞誰匪眞 필경 누가 참이며 누가 참 아닌가?
■ 齊物論에 대하여
---당시의 모든 학설을 가지런하게 함
세상의 온갖 사물이나 말들은 모두 가지런히 하나라고 볼 것이요, 이것이니 저것이니 혹은 옳으니 그르니를 가려서 따질 것이 없다. 오직 道를 알면 그만이다.
천하에 지극히 어지러운 것이 사물에 관한 논의들인데, 시비를 너무 밝히려 들면 마음에 누를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천하의 사물들을 보기를 바람이 제멋대로 불다가 스스로 그치는 것과 같이 보아 자연에 맡기도록 한다. 이는 곧 나와 너의 구별을 잊고, 완성과 훼손이 서로 일치하고, 사물과 내가 평등하며, 겉껍데기를 벗어나고 생사를 초월하여 우리 삶의 참 주재자를 구하고, 사물을 그 본래의 밝음으로 비추어 무궁한 경지에 노니는 것이니, 바로 장자의 가장 미묘한 이상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일러 왕선겸은 「<제물론>편의 글은 너무도 다변이고 감정이 격해 있으니, 이를 어찌 시비를 잊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는 논평을 하기도 한다.
글의 처음에 나오는 남곽자기는 하늘과 사람을 동일시하고 나와 너를 평등으로 보았기 때문에 상대가 없어 짝을 잃은 것 같았고, 그 모습이 마른 나무 같았으며, 마음은 죽은 재같이 되었다. 이것은 모든 감정을 초월하고 자연에 맡겨 시비를 잊은 사람의 경지다. 내가 나를 잊은 다음에는 아무런 분별이나 구별이 필요 없다.
온갖 구멍에서 온갖 소리로 부는 바람을 땅의 음악이라고 한다. 만 가지로 같지 않게 제멋대로 불다가 말다가 하도록 되는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하늘의 음악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아는 것, 말하고 침묵하는 것, 자고 깨는 것, 마음이 사물과 가지가지로 교접하는 것, 희노애락, 제멋대로 날뛰는 정욕 등은 모두가 빈 데서 나오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모두 자연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 되도록 시키는지는 모른다. 반드시 참 주재자가 있을 텐데 그 형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몸을 타고 나와 죽이 다 되기만 기다리는 인생이, 좁은 시비에 사로잡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며 평생을 허덕이니 불쌍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말은 바람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리하여 유가니 묵가니 하는 시비가 일어난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 항상 일정한 것은 없다. 옳고 그름은 서로 교차된다. 온갖 사물 가운데 옳지 않은 것도 없고 그러지 않은 것도 없다. 이도 하나의 시비요, 저도 또 하나의 시비다. 그래서 성인은 상대적으로 시비를 구별하려 하지 않고 원숙한 도로써 무궁한 시비에 대응한다.
있다, 혹은 없다고 하는 것들은 과연 참인가? 내가 말을 했다고 해서 과연 말은 있는 것인가? 만물이 나와 일치하는데 굳이 태산이 크다고 할 것은 무엇이며, 털끝이 가늘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러므로 大道는 이름이 없고 말이 없다. 그것은 부을수록 차지 않고 퍼낼수록 마르지 않아 어디서 오는지를 모른다.
사람과 원숭이는 거처가 다르다. 사람과 사슴은 입맛이 다르다. 사람이 좋아하는 미녀를 사슴이나 새들은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옳고, 옳지 않은가? 저마다 각각 좋아하고 적당한 것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시비를 가린다는 말인가? 이것을 초월한 至人은 이해에 흔들리지 않고 생사에 변함이 없는 것이다.
모든 시비를 비추는 데는 밝음으로써 하고, 모든 시비를 가지런히 하고 조화로이 만드는 데는 무심과 무아의 경지로써 한다. 무아지경, 무심지경이 무엇인가를 알면 사물에 대한 세상의 온갖 어지러운 시비들은 절로 가지런히 하나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