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별이다
정상홍
거대한 도시들
수 백 수 천만 남 녀 노 소
일하는 사람들 일 없는 사람들
오가며 교차하는 사람들들들
언덕 위 골목 동네 작은 체구의 한 노인
좁은 집 화장실에서 세수하며
고개 돌리고 올려 본다
하늘에서 위성이 아래를 내려 본다
빠른 속도로 클로우즈업 확대했다가
힐끗 보고 한번 힐끗 보고
멀리 저 멀리 遠景으로
쭈욱 쭉 밀어서 본다
한 없이 작아진다
하나의 점 소실점
지구를 이탈한다
그는 별이다
별똥별
기억 – 오래된 우물
정상홍
어린 시절 부산 문현동 집 마당 한쪽의 우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던
깊이가 3~5m쯤 꽤나 깊었고 턱 높이는 아마도
4,50cm에
주변 바닥은 시멘트로 깔끔하게 정리한 우물
그 바로 옆 작은 꽃밭엔 앵두나무 사철나무 그 앞엔 봉선화 채송화 등
등목도 하고 수박을 바닥까지 담가놓기도 하고
몇 년에 한 번 아찔하게 바닥까지 청소하러 내려가기도 했지
우물 속 물 고인 위아래 빙 둘러
울퉁불퉁 탄탄하게 자리 잡은 모난 바위들과 초록색 이끼
오래된 기억 속 우물의 물은 말랐을까
짙푸른 이끼가 끼었을까
찰바닥찰바닥 두레박은 물을 치며 오르내리고 있을까
단순히 물만 고여 있거나 두레박이 오고 내리는 게 아니라
청량한 물 그 아래엔 나무와 바람이 있으니
하늘 비 쏟아져 대지를 적시면서 일부는 지하로 스며들고
부지런한 세월과 현명한 사람이 우물을 만든다
물 없으면 살 수 없는 그 땅덩이에서 생명수가 고이고 맑게 유지하고
흐름을 계속하며 생명과 활력이 이어진다
천만 년 대지의 개천 아래로 흘러가는 오, 그 아름다운 물길이여
이제 옛날의 그 우물은 없다
타버린 기억의 몽롱한 잿빛 안개들과
귓속을 징징 울리는 온갖 전파소리들 속에서
먼 곳으로 떠난 나그네는 이젠 무얼 길어 올리나
기억 속 우물은 실체가 없다 허상이다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 아름다웠던 생각들을 떠올리지 않으리니
그 가벼웠던 감정과 추억과 기념의 기록들
수시로 일어나는 편하거나 자연스러운 듯한 생각들
그건 오래된 기억의 의미 없는 자동재생산의미 없는 흐름. 그 흐름도 끊어진다
의 · 미 · 없 · 음
계절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과 구름 지나가며 눈인사하고
하늘에선 앵두꽃잎 흩날리며 떨어졌고
그러나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다시는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그 정체 없는 기억의 한 조각 그림자도 우물 위로 솟아오르지 않으리
손톱 발톱을 깎다 – 무장해제
정상홍
참 오랜만에 손발톱을 한꺼번에 깎는다
왜 이리 자라는지 이게 어디 쓰는 물건인지
으악, 내 몸에 사나운 무기 있다
이 생명의 오랜 시작이 짐승인 줄 알게 한내 속의 날카로운 공격성 무기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제거되어 왔던 손톱
나이 들자 더욱 강력하게 드러나는 그 존재감
드물지만 콧구멍을 쑤시거나 팔다리에 상처를 남기며
자신의 몸을 찌르거나 스스로 베기도 한다
포학한 짐승이여
나는 비무장이 아니다
표독한 여인들이 다투거나 구미호가 변신하여 공격할 때
길게 자라난 이빨과 손톱은 가공할 무기
약한 주먹과 이마를 사용한 적도 없지만 난 비무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범 사자 수리매 등의 발톱이나 부리와 같은
대물격투용이나 공격용은 못 된다
그런데 몰랐었다
사람의 손톱 발톱이
애초에 공격용이 아니라 피부 보호용이란다
소소한 지식 하나 땜에 무장해제 당했다
그 옛날 초기 인류가 막막한 대지 음습한 동굴 속에서
생존과 생식을 이어갈 때 그들의 무기는 무엇일까
기특한 두 손으로 치명적인 무기와 도구 만들었다
손들어!
이젠 자발적으로 무장해제 진행하랏!
무기와 도구로부터의 무장해제!
허리 어깨 무릎 주먹과 손가락의 통증에 대한 무장 해제!
외부의 압력이나 폭력으로부터 기죽지 말고 무장해제!
아직 남은 삶을 대비한 축적이나 걱정에 대한 무장의 해제!
그 오래된 기억들과 불시에 일어나는 생각들로부터 무장해제!
모르는 사이 쌓여진 죄의식과 불편한 습관들에 대해 무장해제!
권리도 의무도 더 이상 없는 무장해제!
가을 낙엽은 더 이상 여름날 불볕을 기억하지 않는다
시원한 바람 즐기다가 그냥 떨어져 흩날릴 뿐
별 것도 아닌 소유(所有) 하나씩 떨구고, 무장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