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세요.
또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마태복음 5:44]
목사 안수를 받고 30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어려운 말씀이다.
예수의 말씀이므로 그렇게 살아가려 노력을 하지만,
솔직하게는
'나를 박해하는 이들은 짓눌러 버리고 싶고, 원수들은 궤멸시키고 싶다.'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가 하는 짓을 그냥 포용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원수가 하는 짓이 죄를 짓는 일이라면 매를 들어서라도 그 짓을 못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수가 사랑의 매를 들고자하는 나보다 더 강력하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다.
"저 원수가 거꾸러지게 헤주십시오. 그래야 죄를 덜 짓습니다."
이것이 원수사랑이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말씀을 또 이렇게 이해한다.
'원수, 박해하는 자' 가 누구일까?
원수는 멀리있는 추상적이며 막연한 대상이 아니다.
일상에서 직접 대면할 수밖에 없는 가까운 이들 중에 있다.
가족 구성원들끼리 간혹 "웬수"라고 강조하는 그 '원수'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여기서 조금 더 확장하면, 신앙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원수들을 포함할 수 있겠다.
'신앙공동체 안에 무슨 원수가 있냐고?' 하겠지만,
초대 교회 중에서 고린도교회를 생각해 보라.
교회공동체 안에서 겪는 신앙적인 갈등으로 인해 원수처럼 지내는 이들이 있었고,
이런 갈등은 상대방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을 것이다.
이럴 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대체로 원수들에 의해 오용되고 있다.
"원수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는데,
너희는 왜 사랑도 기도도 안 해?"
그리고 원수의 편에 서서 단물을 빠는 검은 사제들에 의해 오용되고 있다.
그들의 압제와 박해에는 침묵하면서,
사랑과 기도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내가 이해하는 원수의 범주를 넘어가 나를 박해하는 원수들은 사랑할 수 없다.
단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는 할 수 있다.
"더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주십시오.
그들이 가진 모든 힘을 무력화시켜 주십시오.
나쁜 짓을 더는 할 수 없도록 다 빼앗아 주십시오.
그들의 삶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게 하소서,"
하지만,
원수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돌이키고자 한다면 기꺼이 배척하지 않고 포용할 수는 있다.
자기와 다르다고 원수삼지말고, 끝까지 배척하지는 말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으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