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것의 이름은 그것의 개념을 품고 있기 마련일 것이다. 수많은 만물을 분류하고 명명하기에 이르기까지, 그것의 속성을 파악하고 개념화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 수업인 명상지도자과정의 교재 또한 명상의 개념을 어원에 대한 간략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인도유럽어계 언어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고대 라틴어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까지, 나에게는 처음 접하는 생경한 언어들이었다. 그윽하게 바라본다는 해석과 마음을 고요하게 바라본다는 해석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명상수행자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명상의 개념은 명상이라는 것의 일반적인 개념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수행자라는 집단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와 한 개인의 수행 경험에 비추어 바라볼 때에도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야 명상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접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나에게 명상이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명상이란, 적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내 안에서 상(相)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과정인 것 같다.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경험과 기억, 관념을 통해 대상을 인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관을 내려놓고 대상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감각과 인식을 지닌 인간에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한번은 개인적으로 알게 된 봉은사에서 열리는 명상 모임에 가던 길이었다. 혜화역에서 신설동을 잠시 들러야 해서 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중, 동대문 근처에서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갑자기 내 쇄골 부근을 붙잡았다. 순간 불쾌감과 당황스러움이 빠르게 밀려왔고, 눈물을 참으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명상 모임에 가서 마음을 잘 풀고 오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지만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쇄골 부근에 남은 불쾌한 감각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불쾌한 것일까? 만약 나를 붙잡은 사람이 성별이 다른 아주머니였다면, 혹은 아주 어린 귀여운 아기였다면, 지금처럼 억울하고 화가 났을까? 내가 상대방을 성별이나 나이에 관한 관념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질문을 떠올리자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봉은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방의 행동이 불쾌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단순히 성별에 대한 관념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신체를 붙잡힌 상황 자체가 당황스럽고 불쾌했을 수 있으며, 당시의 여러 감정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뿐 아니라 그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나의 인식과 관념도 살펴볼 수 있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완벽하게 이루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상이나 사건이 내 안에 불쾌한 감정으로 남아 계속해서 특정한 생각에 머물게 한다면, 내가 그 대상을 어떤 관념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감정과 생각에 무작정 휩쓸리지 않고, 그곳에 계속 머물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상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명상의 개념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어둡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혼탁해진 마음을 조금씩 맑게 해나가는 경험이었다. 이에 나라는 수행자에게 명상이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관념을 살펴봄으로써 마음을 맑게 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수행방법에 따른 명상의 분류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명상은 수행의 목적과 대상,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호흡이나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모으는 집중명상, 경험하는 감각과 생각 및 감정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통찰명상, 자신과 타인을 향한 친절과 자애의 마음을 기르는 자애명상 등이 있다. 또한 만트라를 반복해서 읊거나 몸의 움직임을 통해 현재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수행도 명상의 방법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분류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경계를 의미하기보다는 수행에서 무엇을 대상으로 삼고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다루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집중명상은 흩어지는 주의를 하나의 대상에 모으는 연습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호흡을 관찰하는 경우,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다른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주의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오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이다.
통찰명상은 현재 일어나는 감각과 생각, 감정을 관찰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변화하는지를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경험한 사건을 떠올려 보면, 처음에는 불쾌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과 함께 떠오르는 생각과 관념을 살펴볼 수 있었다. 물론 일상에서 한 생각을 떠올린 경험만으로 이를 정식 수행으로서의 통찰명상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 경험을 돌아보며 감정에 휩쓸리는 것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통찰명상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자애명상은 자신과 타인을 향해 친절과 자애의 마음을 기르는 수행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스스로를 탓하거나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그러한 경험을 한 자신에게 따뜻한 태도를 취하는 것 역시 중요할 것이다.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이 주의와 알아차림의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면, 자애명상은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를 살펴보고 가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명상은 하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각 수행방법은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마음을 다루는 데 도움을 준다. 집중명상을 통해 주의를 모으고, 통찰명상을 통해 경험을 알아차리며, 자애명상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가꾸는 것은 서로 연결될 수 있다. 다만 각각의 수행이 지향하는 바와 구체적인 방법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명상을 하나의 포괄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수행방법의 특징을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류라는 것도 나에게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나누는 것은 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그 분류를 통해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바라보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내가 일상에서 경험한 상과 관념의 관계와도 맞닿아 있다. 따라서 명상의 여러 수행방법을 구분하여 이해하되, 그 분류 자체에 머무르기보다는 각 방법이 실제 수행에서 무엇을 경험하게 하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명상을 충분히 오래 수행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명상에 관한 개념을 이해하는 일과 실제로 수행하는 일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으며, 그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에서 앞으로도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명상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상과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을 통해 하나의 생각이나 감정에 갇히지 않고, 조금 더 맑고 유연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연습이다.
앞으로도 명상의 개념과 수행방법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수행을 통해 각 방법의 의미를 경험해 나가고 싶다. 명상을 정의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에서 출발하되,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의 경험 속에서 그 의미를 체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