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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8)
(2016. 1. 9. 서울교구)
◉ 순례 장소 : 삼성산 ➟절두산➟옛용산신학교➟새남터➟왜고개➟
당고개➟서소문 ➟명동성당➟광희문➟카톨릭대학교(10곳)
새해 맞이하여 올해도 수많은 순례시간 축복받기를 기도하면서
출발하는 날 회장님의 출발기도와 함께 서울 순례 길에 올랐다. 차 속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회장님의 미참석으로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끼면서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기도와 성가를 하면서 서울로 향하였다.
첫 번째 간 곳
● 삼 성 산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서울 관악구에 있는 삼성 산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세 명의 성직자인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를 비롯하여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순교 후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마포구 노고 산을 거쳐 약 60년간 안장되었던 거룩한 곳이다.
삼성 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며, 아울러 삼성 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승화시켜 삼성산(三聖山)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 산은 1901년에 위의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1836년 이래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그리고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8월 10일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9월 6일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 후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는데, 그동안 신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하였고 몇 명의 신자들은 체포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바오로 등 몇몇 신자들은 마침내 세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43년에 그들의 유해는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땅이던 관악산의 한 줄기인 박 씨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이 곧 지금의 삼성 산이다.이때 신자들은 훗날을 위해 그 이장 연도와 세 순교자의 이름을 아직 마르지 않은 회 반죽에 글을 써서 자연스럽게 마르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경에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하였고 1901년 10월 21일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2일에는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명동 대성당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다시 삼성 산으로 가져와 무덤 안에 안치하였다. 이들 3명은 1857년에 모두 가경자로 선포된 데 이어 1925년에는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두 번째 간 곳
● 절 두 산
순교자들의 피로 잠두 봉을 물들인 한강변에 우뚝 선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지
절두산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이 순교한 신앙 선조들의 넋이 어린 성지다. 주변 경관이 뛰어난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명나라의 칙사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관례적으로 들렀던 국제적인 관광지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병인박해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이 참수형으로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절두산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우뚝 솟은 작은 암벽 봉우리로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이자 병선의 훈련장이며 처형, 제사, 진휼을 하던 곳으로 양화진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원래 가을두(加乙頭), 혹은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렀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호 石坡, 1820~1898)의 천주교 박해 령으로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신부가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린 후 로즈 제독의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1866년 10월 22일(음 9월 14일)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서소문 밖이 아닌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하였는데 그 이유는 9월에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10월에 다시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866년 10월 22일에 효수형을 받은 이 의송(李義松, 1821~1866, 프란치스코), 김이쁜(1811~1866, 마리아) 부부와 아들 이 붕익(李鵬翼, 1842~1866, 바오로), 10월 25일에 효수형(梟首刑, 군대가 죄수의 목을 벤 후 그 머리를 높이 매달아 군중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형벌, 일명 ‘군문효수(軍門梟首)’로도 부른다)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朴永來, ?~1866, 요한) 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효수형뿐만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다.1997년 11월 절두산 순교 성지 일원을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의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더욱 소중한 사적지다.
세 번째 간 곳
●용 산 신 학 교
최초의 근대식 신학교인 예수성심신학교와 예수성심 성당 (원효로 성당)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인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가 1887년 용산으로 이전하여 개교한 근대식 신학교로서, 국내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한국인 성직자를 배출하였다.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은 성 김대건 신부와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 뮈텔 주교의 유해를 모셨던 곳이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현재 성심여자고등학교 교정 안에 있는 성당과 예수성심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1792~1835, 바르톨로메오)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2005년에 간행된 가톨릭대학교 150주년 기념 화보집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 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1885년 10월 28일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강원도 원주 부엉골에서 개교한 예수성심신학교는 교명, 교수진, 학생, 설립 이념 등을 감안할 때 현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고 있다.예수성심신학교에서는 국내에서 새로 선발한 신학생들과 말레이지아 페낭에 소재한 신학교로 유학 보낸 신학생들을 귀국케 하여 교육을 시켰다. 첫 졸업자로서 사제로 서품된 한국인들은 강도영(姜道永, 1863~1929, 마르코), 정규하(鄭圭夏, 1863~1943, 아우구스티노), 강성삼(姜聖參, 1866~1903, 라우렌시오)이다. 페낭으로 잠시 유학을 가긴 하였지만 바로 이들이 한국 내에서 교육받고 배출된 최초의 한국인 성직자들이었고, 신학교를 개교한 지 10여 년만의 일이었다.
이로써 한국인 사제로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 사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지 50년 만에 탄생했다. 이들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중림동 약현 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지만 나이순에 따라 강도영 신부가 세 번째, 정규하 신부가 네 번째, 강성삼 신부가 다섯 번째 사제로 각각 기록된다.
현재 원효로 성심여자고등학교에 위치한 함벽정(涵碧亭) 터에 마련된
예수성심신학교와 예수 성심 성당 (일명 원효로 성당)은 현재 사적
제 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강을 바라볼 수 있던 함벽정은 지척으로 병인박해 때 성직자들이 참수된 새남터와 기해박해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피를 흘린 당고개가 보이는 곳이었다. 1866년의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교구장 블랑 주교는 용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 뒤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있던 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중 신학교 건물은 1892년에 벽돌조 2층으로 건립되었고,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되었다.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 건물이 되었다. 1928년 이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로 사용되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함에 따라 이 수녀원에 양도되었다. 신학교 건물은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E. J. G. Coste)신부가 설계와 감독을 하였고, 청국인(淸國人)이 시공을 하였다.
사용 재료인 벽돌은 용산방(龍山坊) 와서(瓦署) 부근의 벽돌 가마에서 제조되었다. 건물 전면은 적벽돌을 사용하여 단순한 의장 특징을 나타냈으며, 벽면 대부분을 큰 원형 아치창으로 처리하였는데, 이는 학교 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건물은 명동 성당 주교관과 유사한 모습인데, 이것은 설계자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용산신학교 교사(校舍)는 1890년대 한국에 건립된 기독교 계통 교사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단순한 외관을 가진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원효로 성당은 용산
신학교의 부속성당으로 1899년 착공하여 1902년 준공되었다. 성당 건물은 언덕에 위치하여 성심학교에서 보면 3층, 수녀원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인다. 나르텍스(narthex, 현관부), 네이브(nave, 신도석부), 트랜셉(trancept, 십자형 돌출부), 엡스(apse, 聖所部) 등 아주 간결한 평면 형식이다. 정면 출입은 계단실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외벽에는 회색벽돌과 적벽돌을 혼용하였다. 외벽을 돌아가면서 부축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2개의 부축기둥은 높이 돌출시켜 수직성을 강조하였다. 창문은 뾰족 아치창이다. 양식적으로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을 절충하였다.
네 번째 간 곳
●새 남 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많은 성직자, 지도자들이 치명한 순교 성지
새남터는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 중 11명이 순교하신 곳이며, 그중 8명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명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 순교 성지다. 또한 이곳 성지에는 9명의 성인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해서 사 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새남터는 본래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 남쪽 150~200m 지점에 있었다. 일부에서는 그 위치를 원효로 4가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새남터는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낮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31일(음 4월 19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우선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9월 21일(음 8월 14일)에 주문모 신부처럼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9월 16일(음 7월 26일)에, 현석문 가롤로가 9월 19일에 역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트니에르(Bretni´eres, 白, 1838~1866, 유스토),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 비코), 도리(Dorie, 金, 1839~1866, 헨리코),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 등이 정의배(丁義培, 1795~1866, 마르코)와 우세영(禹世英, 1845~1866, 알렉시오)과 함께 3월 11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이처럼 새남터에서는 모두 1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또한 새남터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 중 11명이 순교하신 곳이며 이 11명 중 8명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명 모두 11명이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됨으로써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 순교 성지가 되었다.
다섯 번째 간 곳
● 왜 고 개
박해 시대 순교 성인들의 시신이 암매장 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명의 성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 등과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성지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성 최형 그리고 홍봉주 등이 암매장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현재 국군 중앙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예부터 와고 개[瓦署峴]라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여기를 와서(瓦署), 즉 나라에서 쓰는 기와를 만드는 곳이라 하였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중림동 성당, 명동 성당 건물에 쓰인 붉은 벽돌도 여기서 구운 것이다.
이 와고개 기슭은 근처 새남터 형장에서 사형 당한 외국 성직자들과 서소문 형장에서 죽은 천주교 교인들이 한때 묻혀 있던 곳이기도 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세 명의 성인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와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묻혀 있었다.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nie‵res, 白, 1838~1866, 유스토),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도리(Dorie, 金, 1839~1866, 헨리코),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1845~1866, 알렉시오) 등과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성지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 성 최형(崔炯, 1814~1866,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洪鳳周, 1817~1866, 토마스) 등이 암매장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도 한강 새남터에서 교우들이 찾아내어 잠시 이곳 근처에 가매장했다가 미리내로 모셔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朴順集, 1830~1911, 베드로)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와 우세영 알렉시오 등이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군인으로서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몇몇 신자들이 함께 3월 28일(음)에 시신을 찾아내 새남터 부근에 임시로 묻었다가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또 박순집은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7일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일명 승연, 1811~1866,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1795~1866,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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