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5.1.22.
08:20주차장-08:55첫나들이-09:15가내소-09:25오층-09:40한신-11:20세석대피소-11:30촛대봉-12:15연하봉-12:30장터목-12:45제석봉-13:15천왕봉-14:00장터목-14:45소지봉-14:55참샘-15:19하동바위-15:45주차장
한 달 만에 산행기를 쓰려고 생각하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일모레면 신학기가 시작되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게 될 텐데. 깊은 겨울밤. 자정이 진작 지났으나 잠도 오지 않고 거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 끄적거리기로 한다. 가끔 지나간 산행기를 읽노라면 아주 오래된 색바랜 일기장을 들쳐 보듯이 그때의 추억과 장면이 살아나 알 수 없는 행복에 웃음 짓기도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당시 상황이 영화처럼 그대로 재생이 되어 나를 놀라게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이란 중요한가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다닐 때 글 쓰는 법을 잘 배워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글과 무관한 공학도를 꿈꾸어 왔던 나는 그저 아쉬운 마음뿐이다.
희한한 산행이었다. 백무동에서 산행을 시작한 후 간식도, 식사도 건너뛴 채 천왕봉에서 홀짝 물 한 모금만 먹고 하산하여 인천집까지 논스톱으로 직행하였으니 말이다. 아마 모든 것이 나의 게으름 탓이었을 것이다. 홀로 산행을 하다 고착된 이 나쁜 습관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게다가 안전을 무시한 채 눈이 많았던 한신계곡 오름길. 그리고 천왕봉까지의 주능길. 작은 돌밭으로 이어진 미끄러운 하동 바위 하산길까지 나는 아이젠도 하지 않은 채 산행을 끝냈다. 이 부분 역시 배낭 열기를 몹시 귀찮아하는 나의 게으름 탓이었을 것이다.
인천에서 장모님을 광주의 처가에 모셔다 드린 후 88올림픽 고속도로를 접어 들었을 때는 이미 흰 눈이 쉼 없이 내리는 새벽 시간이었다. 전주를 지나면서 시작된 눈은 점차 굵어져 차량의 흐름이 적은 고속도로는 이내 곧 결빙되어 눈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걱정했던 호남터널 오름길을 무사히 지나 광주를 거쳐 남원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지리산 휴게소에서 따끈한 가락국수로 아침을 먹고, 하얀 모습으로 유혹하고 있는 지리산 자락을 보며 그 품에 한시라도 빨리 안기고 싶어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백무동 마을로 가파르게 오르는 언덕길이 얼어붙어 앞바퀴가 슬립이 발생해 기술을 발휘하여 널따란 공터에 주차한다. 주차장에는 방금 도착했음 직한 산꾼들을 역시 토해내고 있다. 마을 앞에서는 주차비를 징수하려고 직원이 일찌감치 나와 지키고 있는데 그를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하자. "주차요금을 주셔야지요? " " 저 아래 동백식당에 차를 세웠는데요." " 그래요? 올라가세요." 매표소에서 신상을 방명록에 간단히 기록하고 한신계곡 쪽으로 들어선다.
하동 바윗길을 오름 코스로 할까 생각했지만 너무나 밋밋하여 한신계곡으로 들어서기로 한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설국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었던지 우측의 계곡 쪽에서는 아예 물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한신계곡은 지리산의 북쪽 자락으로 눈이 많은 곳. 물론 칠선계곡이 눈이 더 많겠지만. 겨울의 칠선은 두렵다. 그곳으로 홀로 산행은 자칫 죽음을 담보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칠선은 평상시에도 험난한 곳이니 강한 투지의 산꾼에게나 가능할 일이다.
한신계곡. 80년대 초 지리산 초년병이었을 때 자주 이용했던 루트로 고생을 했던 몇 차례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지리산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변화무쌍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대처가 가능하나, 그때는 지리산에서 비를 만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만만치 않았었다. 특히 지리산에서는 한여름에도 비에 몸이 젖으면 체온이 급격히 저하되어 떨기도 하고 산행하기도 옹색하고 두렵기도 했는데 초보자로서 당연히 겪어야 할 관례였을 것이다. 지금은 기능성 옷이 많이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되어 평상시에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입고 다니나, 그 당시에는 등산복이라는 게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재킷도 변변치 않았고 그저 면바지나 청바지를 입고 산행을 했기 때문에 옷이 젖으면 잘 마르지 않아 고생이 많았다.
땀이나서 한신지곡 갈림길에서 윈드스토퍼를 벗어 배낭에 야무지게 매단다. 아까 매표소에서 내 뒤를 이어 방명록을 적던 중년의 산님은 아직도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하동 바위 코스로 떠났나 보다. 앞으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한신 폭포 근처까지는 두껍게 얼어붙은 계곡을 따라 진행을 하는데 곳곳이 차갑게 얼어붙은 빙판이 되어 걸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홀로 산행하는 산꾼들에겐 특히 부상은 심각한 상황으로 빠질 수 있으므로 조심 한다. 밤을 보내고 세석에서 하산하는 산님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점차 적설량이 많아지는 한신의 협곡을 파고든다. 주능쪽의 산정을 바라보니 뿌옇게 가스가 차올라 까마득하다.
한신계곡은 다른 곳과 달리 유난히 아기자기한 폭포가 많은데, 오늘은 그냥 건성으로 안내판만 힐긋 바라보며 지나친다. 한신 폭포를 지나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안부인 세석대피소를 오르기 위하여 계곡을 버리고 능선 사면 쪽으로 붙기 시작한다. 뒤를 바라보니 백무동 마을 쪽이 굽이굽이 계곡을 따라 한참 아래에 보인다. 하지만 좌우 능선의 봉우리를 바라보니 아직도 고도를 많이 높여야 할 것 같다. 항상 이 자리에서 세석대피소가 0.7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나지만 족히 삼사십 분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느긋하게 발걸음을 놀리는 게 상책이다.
주능에 올랐다. 흰 눈이 가득한 세석고원. 설화가 만발해 한겨울에도 세석은 천상의 화원이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는다. 한겨울 설악산이나 소백산에서 가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강한 바람에 녹초가 되기 때문이다. 강한 바람을 만나면 행군도 느려지게 되고, 체력의 소모는 커지고, 체온은 저하하다 몸이 점차 얼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눈보라를 만나면 길을 잃고 헤매다 쓰러지는 것이다.
촛대봉을 향하면서 바라보니 온 천지가 하얗다. 순백의 공간이다. 우리 인간들도 현실의 이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의 지리산처럼 햐얀 마음으로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포근한 눈길을 따라 촛대봉과 연하봉을 넘는다. 주능에는 바람에 날려온 눈 들이 많이 쌓여 있어 신바람을 내며 걷는다. 지리산의 주능 길은 한겨울에 오히려 안전하다. 지리산 종주를 다니는 산님들 덕분에 길이 잘 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바람도 없으니 몸에서는 더운 열기가 나오고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로 모자를 적신다. 장터목에 도착해 점심밥을 지어먹고 진행할까 하다가 내쳐 제석봉을 오른다. 제석봉에서 바라보니 지리산이 온통 하얗게 채색되었다. 반야봉 뒤로 이어지는 서북 능선의 만복대가 유난히 눈이 많아 이국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천왕봉을 향하는 사람들. 천왕봉에서 하산하는 사람들. 모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설경의 지리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동심의 세계에 묻혀 있다. 어진 사람이 산을 찾는 것인지. 산을 찾는 사람들이 어질게 되는지. 아마 모두 맞는 말일 것이다.
다시 또 천왕봉에 올랐다.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 천왕봉은 늘 붐빈다. 지리산꾼을 자처하는 산님들은 아마도 수십 차례 아니 수백 차례나 이곳을 올랐을 것이다. 다소곳이 자세를 갖추고 기도를 드린다. 천왕봉 정상에는 눈이 포근히 쌓인 빈터에서 그룹으로 온 산님들이 식사하는데 그 모습이 정겹고 무척이나 부럽다. 코펠에서는 따뜻한 증기가 솟아오르고 맛난 국물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함빡 웃어가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 보기 좋다. 하산. 아이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한다. 장터목에 내려선 후 갈등을 겪는다. 식사하고 내려갈까. 말까.아까 천왕봉에서 물 한 모금만 마셨을 뿐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배고프지 않다. 하산하기로 한다. 지금의 시각이 오후 2시. 겨울철 지리산 산행에서 적당한 하산 시간이다.
장터목을 앞에 두고 산장이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 산님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빠른 속도로 치고 내려간다. 눈이 많아도 장터목에서 소지봉까지는 길이 워낙 잘 나 있으므로 빠르게 운행한다. 소지봉에서 창암 능선 길을 버리고 참샘으로 내려선다. 앞서가던 산꾼이 아이젠을 했음에도 돌길을 걷다가 미끄러져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 아래로 구른다. 많이 상한 듯싶어 말을 전하니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다. 샘터에서는 많은 산님이 배낭을 내려놓고 발품을 쉬고 있다.
하동 바위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눈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곧 야영장에 도착한다. 지난 십여 일간 교육받았던 스트레스가 오늘의 산행으로 봄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올겨울 신년에만 기억에 남는 산행을 여러 번 하였다. 가평의 명지산과 태백의 태백산 산행. 그리고 지리산을 세 번이나 올랐다. 가정을 포기한 채 늘 산행을 떠날 순 없지만, 틈틈이 일상을 떠나 자연의 품에 묻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 선생은 나이 칠십에 지리산에 올라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나도 그 나이를 넘어서 팔십에도 지리산에 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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