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촉 황제가 된 유비
조 성 민 (한양대 로스쿨 명예교수)
1. 유비가 한중을 차지함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는 손권과 유비가 결탁해 공격해 올 것을 염려해 남정계획을 세웠다. 순유가 조조에게 먼저 오나라를 취한 다음에 유비를 공략하라고 조언했다. 순유의 말에 따라 조조가 군사 40만을 일으켜 오나라를 향해 진군했다. 이때 허도에서는 조조의 측근들이 황제에게 청해 조조를 위공(황제가 누리는 권한을 같이 행사는 높은 자리)으로 논하자는 논의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조조의 책사 순욱이 반대하면서 조조를 적극적으로 도우려 하지 않자 조조가 괘씸하게 생각했다. 출병을 함께 했던 순욱은 중간에 병을 핑계 삼아 조조를 따라가지 않았다. 조조는 순욱에게 음식을 내렸는데 그릇이 비어있었다. 순욱은 조조가 자기에게 줄 것이 없다는 뜻으로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순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위공이 되었다.
한편 조조가 오나라 침공을 위해 출병하자, 전에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마등의 아들 마초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서량 태수와 함께 조조가 없는 틈을 타 장안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오나라로 진군하던 조조가 급보를 받고 회군하여, 혼전을 거듭한 끝에 조조가 마초를 물리쳤다. 조조는 장안을 하후연에게 맡기고 허도로 돌아왔다. 이때 조조의 추종세력들이 황제(헌제)에게 조서를 올려 조조는 위왕의 자리에 오르고(216년), 황제와 같이 행세하게 되었다.
한편 익주 태수 유장은 한중 태수 장로의 침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비를 촉으로 맞아들여 한중을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유비가 제갈량, 장비, 조자룡과 함께 촉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초가 촉으로 와서 유비에게 항복하고 유장도 유비에게 서천성을 내주어 유비가 서천을 자연스럽게 취했다. 하지만 유비는 익주를 취하고도 손권에게 형주를 반환하지 않았다. 이어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자 조조는 한중을 버리고 장안으로 퇴각했다. 이에 유비를 따르던 여러 장수들의 추대에 의해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다(219년).
2. 관우와 장비의 최후
(1) 관우의 최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분노한 조조가 그를 치려고 하자, 모사 사마의가 손권으로 하여금 형주를 치게 하면 유비가 군사를 움직여 형주로 갈 것이니, 그 때 한중과 서천을 점령하라는 계책을 냈다. 이에 조조가 손권에게 형주를 공격하면 위나라 군사가 호응해 유비를 물리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손권의 참모들이 조조와 화친하기를 바랐으나, 형주를 지키고 있는 관우를 모두들 두려워했다. 제갈근이 손권에게 관우에게 아들이 있는데 세자와 혼인을 주선하여 이에 응하면 조조를 치고, 응하지 않으면 유비를 치자고 제안했다. 손권의 명을 받은 제갈근이 형주로 가서 관우를 만나자,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수 있겠느냐고 화를 내며 혼사제의를 거절했다. 자존심이 상한 손권이 조조와 손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기회를 잡은 조조가 손권과 결탁했다. 조조는 번성을 지키고 있는 조인에게 형주를 공격하라고 했다. 이 첩보를 보고받은 유비가 관우에게 선수를 쳐 번성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관우가 관평에게 번성을 공격하게 하자 조인이 맞섰다. 이 틈에 관우가 양양성을 점령했다. 관우는 여세를 몰아 강을 건너 번성을 포위했다. 그러자 오나라의 대도독 노숙의 뒤를 이어 군사지휘봉을 이어받은 여몽이 형주를 침공했다. 여몽의 뛰어난 계략으로 형주를 점령당하자, 관우는 오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에 쫓기다 맥성으로 도주했다.
맥성전투에서 오군에게 포위당하자 관우가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관우는 서촉으로 도주하다가 여몽의 부하 장수인 마충에게 생포를 당했다. 손권이 관우에게 투항하기를 권유했으나, 관우는 유비가 혈육의 정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의리를 버리고 항복할 수 없다고 하여 죽임 당하니 58세였다(219년). 이때 형주가 오나라의 관할 아래로 들어갔다.
(2) 장비가 피살됨
한편 조조는 오나라와 촉나라의 일로 고민하다가 두통이 생겼는데 증상이 나날이 심해졌다. 명이 다했음을 안 조조는 맏아들 조비에게 대를 잇게 하라고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66세였다(220년). 조비가 위왕에 오르자 그는 조조보다 더욱 헌제를 핍박했다. 마침내 조비의 추종자들이 헌제를 압박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 조비는 국호를 대위라 하고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다. 이로써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세운 한나라는 사백 년 역사를 뒤로 한채 멸망하고 말았다.
조비가 한나라 황실을 찬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중왕 유비는 제갈량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221년). 유비가 성도에서 관우의 죽음을 보고 받고 화가 치밀어 유봉을 죽이자 맹달은 위나라에 투항했다. 황제가 된 유비는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조자룡이 지금 천하의 역적은 위나라지 오나라가 아니니 먼저 위나라를 쳐야한다며 반대했지만,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제갈량이 섣불리 군사를 움직이지 말고 오나라와 위나라가 반목할 때를 기다려 침공하라고 간언했지만,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70만 대군을 일으켰다.
낭중성에 있던 장비도 관우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하루하루를 눈물바다로 보냈다. 휘하의 장수들이 이를 보다 못해 술을 권하며 장비의 슬픔을 달랬다. 그런데 술에 취하면 사람을 폭행하는 장비의 술버릇은 여전했으므로, 성안에는 장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군사들이 늘어갔다. 장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흰 갑옷과 흰 깃발을 3일내로 만들어내라고 범강과 장달에게 명령했다. 범강과 장달이 사흘 내에 만들기에는 벅찬 일이니 기한을 넉넉히 달라고 하자, 장비가 명령을 어기려 드느냐며 불같이 화를 내고 두 장수를 나무에 매달아 등허리 채찍질 50대씩을 쳤다.
범강과 장달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흘 안에 만들어 내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술에 취해 골아 떨어진 장비가 두 장수에게 피살되었는데 그의 나이 55세였다(221년). 범강과 장달은 장비의 머리를 들고 손권 쪽으로 도망을 쳤다.
3. 촉나라와 오나라의 이릉대전
군사를 직접 이끌고 오나라로 출동한 유비는 전쟁 초기에 연전연승을 했다. 오나라 군대가 잇달아 패배하자 손권이 유비에게 강화제의를 하면서, 장비를 죽이고 투항한 두 부하와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했으나 유비가 이를 거절했다. 강화제의가 결렬되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에 임명했다. 위급한 순간에 오군의 총사령관이 된 육손은 이릉에서 촉군과 대치했다.
그런데 육손은 장수들이 출전해 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나라 군사들이 싸움에 응하지 않자 유비는 속으로 초조했다. 선봉장 풍습이 날씨가 더운데다 물이 멀리 있어 불편하다고 하자, 유비는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가까운 곳으로 영채를 옮기게 했다. 화공법을 쓰려고 때를 기다리던 육손은 숲속에 설치된 촉군의 영채에 불을 지르며 야간기습으로 총공격을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유명한 이릉대전이다(221년). 이릉대전은 촉나라 멸망의 직접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고 천하삼분지계가 끝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유비는 군사 대부분을 잃고 백제성으로 피신했다. 이때 유비가 제갈량에게 위나라를 쳐서 한 황실을 재건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223년). 유비의 뒤를 이어 장남인 유선이 촉 황제가 되었다.
"단번에 읽는 삼국지" [1] - [5] 중 [4]
(참고문헌) 조성민, 삼국지에서 내 성격을 찾다(제2쇄), 박영사, 2018.3
첫댓글 완연 삼국지 다시 읽기 입니다.
귀한 글 내려주셔서 감사~
주 박사님
언제나 행복한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