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삼월의 역사가 유난히도 많이 조명되는 이 때쯤이면 ‘항일운동’, 혹은 ‘독립운동’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지리산에서 청춘과 정의, 그리고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한번쯤 기려볼 만도 하다. 우리의 역사는 그들을 “지리산 의병장”이라고 부른다.
[구한말의 의병장들의 모습]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살펴보았다. 5~6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서 다섯 가지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 나이는 18세~26세 사이였고, 그 중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한 청년은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는 낡은 한복 차림이었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사람에게 말을 거니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라고 말했다." -영국 기자 매캔지의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 중에서-
●석상룡(石祥龍) 의병장
선생의 고향은 칠선계곡 입구에 위치한 마천면 추성리이다. 2년 전까지 추성리 이장을 하셨던 석덕완 씨의 조부 되시는 분으로, 선생의 생가도 아직 추성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이 되면서 아직 정식 합방이 되지 않았음에도 일제의 내정간섭은 지리산까지 뻗쳐왔다. 그들은 실상사와 벽송사에까지 관군을 주둔시켜서, 지리산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산포수들의 총기류를 빼앗아가는 등 추성리와 백무동 등 마천지역의 민초들을 못살게 굴었다.
선생께서는 그들의 악정에 울분을 느껴 인근의 지리산 포수들 화전민들을 모아서 의병대를 결성해서 1907년부터 1912년까지 무려 5년 동안 지리산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하셨다.
석상룡부대는 당시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몇 개의 의병대 중 유일하게 지리산사람이 결성한 항일의병대였다. ‘비호장군'이라는 별명으로 활동을 하셨던 선생께서 전과를 이룬 쑥밭재전투. 벽소령전투 등은 독립운동 전사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수비군들을 묶어놓고 총기를 탈취해서 일군들의 혼을 빼게 했던 실상사전투는 아직도 마천골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 후 일경에게 잡히어 5년간의 옥살이를 치르고 나와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순국하시자 아우 되시는 분께서 일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쑥밭재 아래에 산소를 쓰고, “……멸망의 위기에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참(斬)한 것이 많았다. 경신(庚申)10월에 울분을 머금은 채 떠났다”고 글자를 새긴 작은 공덕비도 세워두었다.
선생의 산소는 어름터골의 두류암지 뒤편에 있어 지리산 발걸음에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산행이 될 것이다.
[어름터골에 있는 석상룡 선생의 산소. <꼭대>님 촬영]
●의병장 김동신(金東臣)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의 폭도기록문서에 ‘의병 수괴(首魁)’라는 이름으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분이 지리산 의병장 김동진 선생이시다. 그만큼 선생의 의병부대가 막강했었다는 증거이겠다. 항전활동이 격렬했던 시기에는 가담한 의병들의 숫자가 일천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선생은 충청도 회덕에서 한의원을 하시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이듬해 1906년 3월, 분연히 의병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김동신 의병장. 한의 시절의 모습인 듯]
선생의 의병활동의 시작은 태인에서 봉기한 최익현 선생의 의병부대에서 종사관이라는 직함으로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황군(일본군대)과는 싸울 수 없다는 명분으로 최익현부대가 해산이 되면서 선생은 홀로 전라도와 영남지방으로 내려와서 의병을 모집하여서 의병대를 조직하게 된다.
당시 의병활동의 선봉장은 주로 명문족 출신의 史記나 經書를 통달한 儒生들에 의해 주도된점을 고려하면 당시만 해도 천민에 속했던 한의의 신분으로 의병장을 하게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선생은 출신의 한계로 인해 향리에서는 의병꾼들의 모집이 어려워져 처가가 있는 함양의 안의로 내려가서 지리산자락의 산포수 등 지역 민초들로 의병대를 구성하여서 부대 명을 “삼남창의소”라고 이름 짓고 삼남의병대장이 되어 지리산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선생의 거점지는 구례의 문수사 일원이었으며 호남의 의병대인 “고광순”부대와 협력하여 수많은 전과를 이루어내었다. 일제 수비군은 문수사를 불태우면서까지 김동신부대의 궤멸에 사력을 다한 흔적이 여러 문서에 보인다.
선생께서 1908년 신병치료차 고향 회덕에 들렀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면서 김동신 부대는 세력이 약해진다. 지리산에 남은 부하들은 의병 진영을 마천의 인적이 없는 한 골짜기로 이동을 하여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함양 수비대의 무자비한 탄압과 수색에 견디지 못하고 부대가 와해되어버렸다.
지금도 추성과 마천의 원로들은 선대로부터 전해 들은 당시의 김동신 부대를 기억하고 있는분들이 계신가 하면 추성과 의탄등 마천면 일대에 김동신 부대 의병의 직계후손이 여러 집 살고 있기도 하다. 통감부의 취조기록에도 유독 마천면민들의 김동신 부대 가담 행적이 많이 보인다.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의병장
구한말의 지리산 항일 의병사에 있어서 가장 크게 조명 받는 인물이 고광순 선생이시다.
전남 담양의 창평 고씨 명문가의 종손이었던 고광순 선생은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선생의 13대 종손으로 대를 이은 의병활동으로 유명하며, 선생의 항일투쟁 시대에 와서는 일경에 의해 장애인 외아들마저 참살을 당함으로써 거의 멸문까지 이르게 된다.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이 엿보이는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 순천, 구례, 남원 등 주로 지리산자락의 호남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하셨던 선생께서는 일경의 탄압이 심해지자 장기전에 대비해 1백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1907년 9월 17일 남원의 주천에서 진영을 정비한 후, 고기리 - 만복대 - 노고단을 거쳐 피아골 계곡으로 들어서서 연곡사(燕谷寺)를 의진의 본영으로 삼고 장기항전에 돌입하게 된다.
[고광순선생이 사용했던 불원복기]
그러나 원대한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들어선 지리산이었지만 꼭 입산 한 달만인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 뒤 농평마을의 당재를 넘어서 기습적으로 공격해온 화개주재 일본수비대에 의해 의병 10여명과 함께 연곡사 경내에서 최후를 마감하는 비극을 맞는다.
당시 연곡사를 포위한 일본군 수비대는 선생께 투항을 권유했지만, “너희들은 조약을 위해하고 우리나라와 인민을 진멸하려 하고 있으니 어찌 너희들과 더불어 말할 수 있겠는가? 오직 너희들과 싸워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저항을 하다가 끝내는 참살을 당하고, 휘하 부대의 부장이요, 동생인 고광훈(高光薰)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어 연곡사도 함께 불에 타고 耳順의 老兵將께서 목숨 걸고 찾으려 했던 불원복의 세계는 선생의 항전이 밑거름이 되어 먼 훗날 40여년이나 걸려서야 이루어진다.
당시 일제의 폭정에 시달려온 구례 사람들은 당신들을 대신해 일제에 맞서왔던 선생을 기억하면서 선생의 전사소식을 듣고서는 “고대장 아깝다, 고대장 아깝다” 하고 모두가 개탄했다고 한다. 군민들은 해방이 되자 곧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연곡사 고광순 선생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순절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겨두었다.
“이 제비고을의 영명한 혼들은 밤마다, 밤마다 구슬피 울음소리를 내건만 지나가는 이 술 한 잔 올리는 이 없다. 대지와 집들이 이미 깨끗해진 지금, 구례 선비들이 생각하기를 공께서 순절하신 이곳, 이 흙과 돌이 아직도 공의 영혼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어찌 표지 하나 없을까 보냐.
돈을 모아 큰 돌을 하나 다듬었다. 족손 두흠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하며 나에게 공의 사적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오호라! 천만년을 지나도 웅장한 저 지리산은 무너지지 않는다. 저 우뚝 솟은 충의와 절개는 또 이 산과 더불어 영원히 우뚝 서리라.
-1958년 무술2년 초순에 광산김씨 문옥 짓고, 김규태 쓰고 구례군민 일동 세우다.”
[고광순 선생의 순절비. <기쁜인연>님 촬영. 떨어진 쪽동백 세 송이가…….]
[순절비 기록문. <기쁜인연>님 촬영]
연곡사에 가시거든 경내의 동백나무 숲속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저 작은 돌비 앞에, 한번쯤은 고개를 숙이시라.
기미년 삼월의 역사가 유난히도 많이 조명되는 이 때쯤이면 ‘항일운동’, 혹은 ‘독립운동’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지리산에서 청춘과 정의, 그리고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한번쯤 기려볼 만도 하다. 우리의 역사는 그들을 “지리산 의병장”이라고 부른다.
[구한말의 의병장들의 모습]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살펴보았다. 5~6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서 다섯 가지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 나이는 18세~26세 사이였고, 그 중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한 청년은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는 낡은 한복 차림이었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사람에게 말을 거니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라고 말했다." -영국 기자 매캔지의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 중에서-
●석상룡(石祥龍) 의병장
선생의 고향은 칠선계곡 입구에 위치한 마천면 추성리이다. 2년 전까지 추성리 이장을 하셨던 석덕완 씨의 조부 되시는 분으로, 선생의 생가도 아직 추성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이 되면서 아직 정식 합방이 되지 않았음에도 일제의 내정간섭은 지리산까지 뻗쳐왔다. 그들은 실상사와 벽송사에까지 관군을 주둔시켜서, 지리산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산포수들의 총기류를 빼앗아가는 등 추성리와 백무동 등 마천지역의 민초들을 못살게 굴었다.
선생께서는 그들의 악정에 울분을 느껴 인근의 지리산 포수들 화전민들을 모아서 의병대를 결성해서 1907년부터 1912년까지 무려 5년 동안 지리산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하셨다.
석상룡부대는 당시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몇 개의 의병대 중 유일하게 지리산사람이 결성한 항일의병대였다. ‘비호장군'이라는 별명으로 활동을 하셨던 선생께서 전과를 이룬 쑥밭재전투. 벽소령전투 등은 독립운동 전사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수비군들을 묶어놓고 총기를 탈취해서 일군들의 혼을 빼게 했던 실상사전투는 아직도 마천골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 후 일경에게 잡히어 5년간의 옥살이를 치르고 나와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순국하시자 아우 되시는 분께서 일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쑥밭재 아래에 산소를 쓰고, “……멸망의 위기에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참(斬)한 것이 많았다. 경신(庚申)10월에 울분을 머금은 채 떠났다”고 글자를 새긴 작은 공덕비도 세워두었다.
선생의 산소는 어름터골의 두류암지 뒤편에 있어 지리산 발걸음에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산행이 될 것이다.
[어름터골에 있는 석상룡 선생의 산소. <꼭대>님 촬영]
●의병장 김동신(金東臣)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의 폭도기록문서에 ‘의병 수괴(首魁)’라는 이름으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분이 지리산 의병장 김동진 선생이시다. 그만큼 선생의 의병부대가 막강했었다는 증거이겠다. 항전활동이 격렬했던 시기에는 가담한 의병들의 숫자가 일천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선생은 충청도 회덕에서 한의원을 하시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이듬해 1906년 3월, 분연히 의병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김동신 의병장. 한의 시절의 모습인 듯]
선생의 의병활동의 시작은 태인에서 봉기한 최익현 선생의 의병부대에서 종사관이라는 직함으로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황군(일본군대)과는 싸울 수 없다는 명분으로 최익현부대가 해산이 되면서 선생은 홀로 전라도와 영남지방으로 내려와서 의병을 모집하여서 의병대를 조직하게 된다.
당시 의병활동의 선봉장은 주로 명문족 출신의 史記나 經書를 통달한 儒生들에 의해 주도된점을 고려하면 당시만 해도 천민에 속했던 한의의 신분으로 의병장을 하게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선생은 출신의 한계로 인해 향리에서는 의병꾼들의 모집이 어려워져 처가가 있는 함양의 안의로 내려가서 지리산자락의 산포수 등 지역 민초들로 의병대를 구성하여서 부대 명을 “삼남창의소”라고 이름 짓고 삼남의병대장이 되어 지리산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선생의 거점지는 구례의 문수사 일원이었으며 호남의 의병대인 “고광순”부대와 협력하여 수많은 전과를 이루어내었다. 일제 수비군은 문수사를 불태우면서까지 김동신부대의 궤멸에 사력을 다한 흔적이 여러 문서에 보인다.
선생께서 1908년 신병치료차 고향 회덕에 들렀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면서 김동신 부대는 세력이 약해진다. 지리산에 남은 부하들은 의병 진영을 마천의 인적이 없는 한 골짜기로 이동을 하여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함양 수비대의 무자비한 탄압과 수색에 견디지 못하고 부대가 와해되어버렸다.
지금도 추성과 마천의 원로들은 선대로부터 전해 들은 당시의 김동신 부대를 기억하고 있는분들이 계신가 하면 추성과 의탄등 마천면 일대에 김동신 부대 의병의 직계후손이 여러 집 살고 있기도 하다. 통감부의 취조기록에도 유독 마천면민들의 김동신 부대 가담 행적이 많이 보인다.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의병장
구한말의 지리산 항일 의병사에 있어서 가장 크게 조명 받는 인물이 고광순 선생이시다.
전남 담양의 창평 고씨 명문가의 종손이었던 고광순 선생은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선생의 13대 종손으로 대를 이은 의병활동으로 유명하며, 선생의 항일투쟁 시대에 와서는 일경에 의해 장애인 외아들마저 참살을 당함으로써 거의 멸문까지 이르게 된다.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이 엿보이는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 순천, 구례, 남원 등 주로 지리산자락의 호남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하셨던 선생께서는 일경의 탄압이 심해지자 장기전에 대비해 1백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1907년 9월 17일 남원의 주천에서 진영을 정비한 후, 고기리 - 만복대 - 노고단을 거쳐 피아골 계곡으로 들어서서 연곡사(燕谷寺)를 의진의 본영으로 삼고 장기항전에 돌입하게 된다.
[고광순선생이 사용했던 불원복기]
그러나 원대한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들어선 지리산이었지만 꼭 입산 한 달만인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 뒤 농평마을의 당재를 넘어서 기습적으로 공격해온 화개주재 일본수비대에 의해 의병 10여명과 함께 연곡사 경내에서 최후를 마감하는 비극을 맞는다.
당시 연곡사를 포위한 일본군 수비대는 선생께 투항을 권유했지만, “너희들은 조약을 위해하고 우리나라와 인민을 진멸하려 하고 있으니 어찌 너희들과 더불어 말할 수 있겠는가? 오직 너희들과 싸워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저항을 하다가 끝내는 참살을 당하고, 휘하 부대의 부장이요, 동생인 고광훈(高光薰)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어 연곡사도 함께 불에 타고 耳順의 老兵將께서 목숨 걸고 찾으려 했던 불원복의 세계는 선생의 항전이 밑거름이 되어 먼 훗날 40여년이나 걸려서야 이루어진다.
당시 일제의 폭정에 시달려온 구례 사람들은 당신들을 대신해 일제에 맞서왔던 선생을 기억하면서 선생의 전사소식을 듣고서는 “고대장 아깝다, 고대장 아깝다” 하고 모두가 개탄했다고 한다. 군민들은 해방이 되자 곧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연곡사 고광순 선생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순절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겨두었다.
“이 제비고을의 영명한 혼들은 밤마다, 밤마다 구슬피 울음소리를 내건만 지나가는 이 술 한 잔 올리는 이 없다. 대지와 집들이 이미 깨끗해진 지금, 구례 선비들이 생각하기를 공께서 순절하신 이곳, 이 흙과 돌이 아직도 공의 영혼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어찌 표지 하나 없을까 보냐.
돈을 모아 큰 돌을 하나 다듬었다. 족손 두흠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하며 나에게 공의 사적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오호라! 천만년을 지나도 웅장한 저 지리산은 무너지지 않는다. 저 우뚝 솟은 충의와 절개는 또 이 산과 더불어 영원히 우뚝 서리라.
-1958년 무술2년 초순에 광산김씨 문옥 짓고, 김규태 쓰고 구례군민 일동 세우다.”
[고광순 선생의 순절비. <기쁜인연>님 촬영. 떨어진 쪽동백 세 송이가…….]
[순절비 기록문. <기쁜인연>님 촬영]
연곡사에 가시거든 경내의 동백나무 숲속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저 작은 돌비 앞에, 한번쯤은 고개를 숙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