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동학연구01>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退溪學의 연원이 되는 李滉의 우주·인성론은 16세기 정치·사회·경제의 총체적 모순을 유발하고 있던 勳戚政治의 상황에서 독자적인 出處義理와 모순의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것이었다.
그가 奇大升과 理氣心性 논쟁을 전개한 이면에는 자신의 현실인식과 대응방향을 性理學에 근거하여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善·惡의 가치분별 없이 모순된 현실을 포용하는 유화적 태도 뿐만 아니라, 이분법적 자세로 모순된 현실의 물리적 타파를 지향하는 극한적 태도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신 그는 가치분별의 확고한 자세와 포용적 자세를 겸 비한 가운데 모순된 현실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것이 정치적 대립과정에서 초래될 수 있는 살육과 정치적 야합으로 빚어지는 가치관의 전도현상을 동시에 예방하면서, 도덕적 가치가 지배하는 정치·사회구조를 확립할 수 있는 합리적 방책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방안은 剛과 柔를 겸비하면서도 外柔內剛의 면모를 보인 그의 人品과, 惡을 미워하되 성내지 않는 자세로 出處를 반복하며 탄력적으로 현실에 대응한 평소 그의 處身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 發而理乘之”라며 純善의 理가 스스로의 작용을 통해 兼善惡의 氣를 이끌거나 제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한 理氣隨乘論의 철학적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황의 탄력적인 隨乘論的 世界觀은 정치·사회적 갈등을 합리적으 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에서 나온 것으로, 曺植의 理氣分對論이나 李珥의 理氣妙合論과 비교될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정형성과 함께 보편성을 확보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정치적 과도기의 상황에서 17세의 나이로 즉위한 宣祖에게 이것을 골격으로 하는 「聖學十圖」를 올린 것도 그같은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학통을 계승하는 제자들에 의해 수용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分化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는 勳戚政權의 몰락에 이은 士林政治의 대두라는 정치적 변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곧 사림세력은 훈척정치의 잔재청산과 성리학적 질서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하여는 공감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현격한 견해차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림세력은 각각 학파적 세계관에 근거한 정치철학 을 앞세워 朋黨體制를 확립한 가운데 대립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타 학파도 마찬가지였지만 퇴계학파 내부에도 현실 인식과 대응자세에 미묘한 시각차가 노출되었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안동사림이 정치운영론에 차별적 경향을 드러내며 月川系, 西厓系, 鶴峯系로 분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들의 분화는 李珥의 理氣妙合 論을 근거로 保合을 주장하며 戚臣과 연대하는 등 명분상 약점을 안고 있는 西人勢力에 대응하는 입장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거기에는 그들이 退溪學을 골격으로 하여 독자적으로 확립한 국가경영 철학이 함축되어 있었다.
곧 월천계가 君子·小人의 분별을 통해 소인의 척결을 통한 군자지배를 지향하는 排他的 경향을 보인데 반해, 서애계는 상호 군자의 발탁을 통한 공존과 견제의 방안을 모색하는 妥協的 자세를, 학봉계는 是·非를 분별하되 是의 정국주도 보장을 지향하는 力學的 태도를 각각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월천계와 서애계가 退溪集의 편찬문제나 壬辰倭亂 당시 유성룡의 대응 자세를 두고 갈등을 벌이게 되는 것도 그들의 그 같은 정치적 입장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仁祖反正을 계기로 南冥學派의 君子小人論者들과 제휴했던 월천계는 서인정권의 탄압과 감시로 약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서애계와 학봉계가 안동사림 뿐만 아니라 嶺南 南人勢力의 公論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안동사림의 그러한 정치적 동향은 향촌사회 내부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으로 자처하며 勳戚세력에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勳戚政治의 모순구조에 편승하여 향촌에서 경제적 토대를 발판으로 재지적 기반을 확보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안동사림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당시 사림의 보편적 경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경제적 토대확보의 배경에는 주로 婚姻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혼인관계를 통해 열악한 경제적 환경을 극복하는 한편, 이를 기반으로 하여 관료로 진출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 력을 갖춘 庶族 또는 吏族·常民이 빈한한 士族과의 혼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한편, 심지어는 이를 매개로 鄕案에 入錄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당시의 혼인의 형태는 가문간의 단순한 인연이나 사회·경제적 필요에 따라 연결되는 일종의 ‘婚脈’을 형성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으로, 양반가문의 지위를 규정하는 班格 등을 고려한 ‘婚班’의 형성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덕성을 앞세워 勳戚政權을 무너뜨리고 정치·사회 의 주도권을 확보한 이상 그러한 타성에 매몰되어 있을 경우 士林政治의 명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입지조차 구축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군자·소인의 분별을 앞세워 훈척정치 잔재청산에 적극성을 보이고, 鄕案入錄 규정을 강화하거나 鄕約의 시행에 적극적으 로 나서는 등 향촌질서 정비에 매진하게 되는 것도 士族支配 체제의 강화와 함께 도덕 재무장 운동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양상은 李滉과 曺植의 학통을 계승하는 영남사림에게 특히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었으며, 退溪學派에서는 안동사림이 주도적 역할 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사림정치의 확립을 계기로 在朝뿐만 在野사림의 公論이 정국에 주요 변수로 부상함에 따라 향촌사림의 공론을 수렴해 붕당의 사회적 기반으로 활용하기 위해 서라도 그러한 작업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안동사림이 이황의 제자를 주축으로 결집됨과 동시에 同姓村落을 토대로 가문의 결속을 강화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위 해 사위·외손을 배제한 嫡長子 위주의 상속제 확립, 부계 중심의 가족 체계의 정비 등 가문의 정치·사회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제반 조건을 갖추어 나갔다. 이것은 양반가문의 班格을 고양하는 것이자 동질적 家風을 확립한 가문간의 혼반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혼반형성은 西人과 南人의 정치적 대립구조에다 안동사림의 西厓系·鶴峯系로의 系派分化 조짐으로 인해 제한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退溪學에 연원해 확립한 가문의 현실 인식과 대응자세가 家風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은 그들의 혼반형성의 폭을 사실상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사림은 李滉의 直傳 및 再傳弟子를 派祖로 하여 가문의 독자적 家風을 확립하는 한편, 南人 정치세력의 범주에서 系派간 결속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의 혼반형성이 계파간 집단적 성격을 띠는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安禮通·川水通·芝菊通·酉海通 등 양반가문의 횡적 연대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안동사림은 그러한 과정에서도 특정 가문이 양 계파와 혼반을 형성하거나 계파간 간접적 혼인을 통해 상호 보험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계파간 갈등에 따른 분열의 소지를 예방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기도 했다. 안동사림이 정치적 분화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鶴峯系가 주도한 牛·栗 文廟從祀 論爭과 西厓系가 주축이 된 服喪論爭을 위한 公論형성에 그들이 결집된 면모를 보이게 되는 것도 그 같은 혼반을 매개로 한 사회적 결속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50년 간 지속되던 서인정권이 현종 15년(1674) 甲寅換局으로 무너지고 남인정권이 들어서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되는 정치적 변화상황도 안동사림의 그러한 동향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