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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인연론(十二因緣論) -단편
정의(淨意) 지음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김철수 번역
모니존(牟尼尊)과 묘법(妙法)과
비구승중(比丘僧衆)께 귀명하옵고
간략하게 인연론을 지어
그 뜻을 드러내고자 하옵니다.
모니존께서 연설하신
십이인연이라는 뛰어난(勝上) 교분(敎分)인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은
세 가지에 속하나니
번뇌․업, 그리고 고(苦)가 그것이다.
다음에 설한 내용을 응당 알아야 하나니
첫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지분(支分)은 번뇌에 해당되고
두 번째와 열 번째 지분은 업에 해당되며
나머지 일곱 지분은 고에 속하니
이 세 가지가 십이인연법을 포섭한다.
번뇌의 세 지분으로부터 업의 두 지분이 생기고
업의 두 지분으로부터 고의 일곱 지분이 생기며
고의 일곱 지분으로부터 다시 번뇌의 세 지분이 생겨나니
마치 수레바퀴가 도는 것과 같다.
일체의 세간법은
오직 인과일 뿐 짓는 작자(作者:주재자를 말함)가 없으며
다만 모든 공법(空法)을 따르므로
오로지 공법에서 생겨날 뿐이다.
암송[誦]․등(燈)․인(印)․거울[鏡]․음향(音響)
태양․구슬․종자․물 등이 그 예이니
모든 음(陰)은 구름과(轉) 구르지 않음을
지혜 있는 이는 잘 헤아려야 한다.
어떤 제자가 성취가 있어서 들은 법을 따라 감능(堪能)하고 수지하여 여래법--즉 사(事)와 비사(非事), 성(性)과 상(相) 등--을 잊지 않도록 했는데, 이러한 뜻 가운데 의혹이 일어나자 여쭈었다.
존자시여, 모니존께서 연설하신
십이인연이라는 뛰어난 교분(敎分)인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은
저 세 가지에 속한다고 하셨는데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을
지금 알고자 하여 청문(請問)하오니
원컨대 저를 위하여 해석해 주시어
제 의혹의 그물을 끊게 하소서.
스승께서는 법을 목마르게 우러르면서
공경히 가르침을 청하는
제자의 뜻을 보신 까닭에
답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잘 들어라.
십이인연이라는 뛰어난 교분은
세 가지에 속하니
번뇌와 업 그리고 고(苦)가 그것이다.
다음에 하는 말을 응당 잘 알아야 하나니
이 가운데는 열 하고도 둘이 더 있으므로
따라서 십이(十二)라 한 것이요
그것이 불이(不異)의 교분이기 때문에
뛰어난 교분이라 한 것이다.
마치 수레의 부품들과 같으므로
뛰어난 교분이라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니(牟尼)라는 말은 이름하여 적멸이라 하고 또한 무분별이라 하며, 또한 정(定)이라 하고 또한 무언설(無言說)이라 한다. 저 모니존께서는 널리 이것(인연소생법)을 선양하고 변설(辨說)하시니, 이를 가명(假名)이라 한다. 그러나 그건 대인장부(大人丈夫:作者)가 아니니, 자재정(自在定)에 들었을 때 성(性)과 상(相)의 소생은 다만 인연만으로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십이인연의 지분(支分)은 번뇌와 업 그리고 고(苦)의 처소에서 이
세 가지 법이 번갈아가며 함께 인연을 지으니, 마치 항아리가 놓인 탁자[拒甁案:세 부분이 서로 의지해 이루어진 탁자인 듯하다]와 같다. 이렇듯 세 가지 처소에 속함을 응당 알아야 한다.[문] 번뇌란 무엇이며, 업이란 무엇이며, 고란 무엇이기에 이러한 모든 인연법의 뛰어난 교분을 포섭하는 일이 성립될 수 있습니까?
[답] 십이인연이라는 뛰어난 교분 가운데서 첫 번째 지분은 무명이고, 여덟 번째 지분은 애(愛)이며, 아홉 번째 지분은 취(取)인데, 이 뛰어난 세 지분은 번뇌에 속한다.
두 번째 지분은 행(行)이고 열 번째 지분은 유(有)이니, 이 뛰어난 두 지분은 업에 속한다. 나머지 일곱 가지 뛰어난 지분은 고에 속한다. 이 번뇌와 업 그리고 고(苦)라는 세 가지가 십이인연의 지분을 포섭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머지 일곱 가지 지분이란 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생(生)․노사(老死)이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원한 있고 싫어하는 사람과의 만남, 구하되 얻지 못함 등과 같은 법 등은 일체의 고를 낳는다. 이렇듯 모든 지분은 번뇌와 업 그리고 고가 그 근본이니, 이 세 가지가 십이지분(十二支分)을 포섭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직 이 세 가지 일만 존재할 뿐 나머지 다른 법은 없다. 일체의 경 가운데서도 단지 이 지분들만이 존재하며 나머지 다른 법은 없다.
[문] 이제 이 모든 뛰어난 지분의 의미를 알았으니, 저를 위하여 번뇌와 업 그리고 고는 어느 처소에 존재하는지를 설명해 주십시오. 또한 일체의 모든 일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답] 세 지분으로부터 두 지분이 생겨나니, 세 지분이란 번뇌이고 두 지분이란 업을 말한다. 말하자면 번뇌로부터 업이 생기는 것이다. 두 지분으로부터 일곱 지분이 생겨나니, 일곱 지분이란 고를 말한다. 말하자면 업으로부터 고가 생기는 것이다. 일곱 지분으로부터 세 지분이 생겨난다는 것은 고로부터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이 말은 번뇌와 업 그리고 고(苦) 세 가지가 번갈아가며 서로를 생겨나게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레바퀴처럼 위치가 일정하지 않 다. 이른바 유(有)는 욕계․색계․무색계 등을 말하니, 그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수레바퀴가 구르는 것과 같다. 저것들(번뇌․업․고)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체 세간의 범부중생은 차례대로 위아래로 마치 수레바퀴처럼 구르는 것이다. 유(有) 가운데 정해지지 않았고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 가지 처소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 저것들이 일체의 몸을 짓는다면 자재중생(自在衆生:作者)이란 무엇이며, 그들이 짓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답] 게송에서 말하기를 ‘일체의 세간법은 오직 인과일 뿐 짓는 작자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세간법이 단지 가명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올바른 사유의 인식이니, 저 일체의 세간법은 체성(體性)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중생[作衆生:자재중생 또는 작자]이 짓는다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문] 만약에 이와 같다면 어떻게 현재의 세간으로부터 미래의 세간을 취(取)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답] 어느 한 털끝만큼의 법도 현재의 세간으로부터 미래의 세간을 취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다만 모든 공법(空法:자성이 공한 법)을 좇고, 오로지 공법에서 생긴다’고 설한 것이다. 이는 자체인 아(我)와 아소(我所)가 공하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서 이른바 번뇌와 업의 처소이다. 이 다섯 가지 법의 행(行)은 자체성을 떠난 무아이므로 응당 이와 같이 취(取)해야 한다.
[문] 만약에 체성이 무아인 법 가운데 행(行)의 성품도 무아라고 한다면, 지금 무엇을 증득한다고 설하는 겁니까?
[답] 게송에서 말한 ‘암송․등․도장․거울․음향․해․구슬․물’이라는 이 모든 비유는 증득해 취할 수 있는 것이니, 진실로 자체(自體)는 없으나 성품이 가명(假名)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간, 미래의 세간이란 말은 가령 스승이 암송한 것이 실제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굴러가 이른 것은 아니다. 비록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굴러가 이른 것은 아니지만, 어찌 제자에게 전수하는 뜻이 성립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제자가 인(因) 없이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데, 이는 무인(無因)이라고 멋대로 계교하는[計度] 병통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임종시에 심식(心識)이 미래의 세간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상견(常見)의 병통을 막기 위한 것이며, 미래의 몸이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고 말함은 무인(無因)을 멋대로 계교하는 병통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다. 가령 스승의 암송이 인(因)이 되어서 제자로 하여금 얻게 한다면, 그것은 불가설(不可說)이고 그렇게 여기는 것도 또한 불가설이라서 한결같이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임종 시의 심식이 인(因)이 되기 때문에 후생의 몸의 심식을 낳을 수 있으나, 그 심식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그 심식을 여의는 것도 아니고 심식에 즉(卽)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등으로부터 등이 생겨나고,
도장으로부터 도장이 생겨나며, 거울로부터 거울이 생겨나고, 소리로부터 음향이 생겨나며, 태양과 구슬로부터 불이 생겨나고, 종자로부터 싹이 생겨나니, 석류나 암라과 등을 입에 넣으면 입에서 군침이 도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법들은 그것들에 즉(卽)한다고 칭할 수도 없고 그것들과 다르다고 칭할 수도 없으니, 이렇듯 일체 모든 인연법의 전(轉)하고 부전(不轉)하는 일에 대해 모든 지혜 있는 이들은 잘 생각하여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음(陰)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색․수․상․행․식을 말하니, 상속하기 이전의 음들에 의지하여 생겨난 음들은 저 여러 음들이 멸하면 그로 인해 이 음들이 멸하면서 후에 유사한 것들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털끝만큼의 법도 이것으로부터 저것으로 이르지 않는다. 이것이 세간의 점차(漸次)의 의미이다. 이러한 뜻이 있으므로 일체의 세간은 무상(無常)이며 부정(不淨)이며 고(苦)이며 무아(無我)이다. 이러한 일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 의혹이 생기지 않으며, 의혹이 없기 때문에 번뇌에 물듦이 생기지 않고, 번뇌에 물듦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생기지 않고, 집착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헛된 갈애가 없으며, 헛된 갈애가 없기 때문에 업을 짓지 않으며,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일[事]을 취하지 않으며, 일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행(有爲行)을 짓지 않으며, 유위행이 없기 때문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으며, 다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몸과 마음의 고(苦)가 없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인(因)을 짓지 않기 때문에 저 처소에는 고(苦)의 일곱 가지 과(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과(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이 짓기 때문에 불생․불멸․불상(不常)․부단(不斷)․유변(有邊)․무변(無邊) 등의 문구가 성립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에 관한 게송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무연생(無緣生)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온갖 가장 오묘한 일에서
결정적으로 바른 뜻이니
이런 까닭에 단멸함은 성립되지 않네.
그 연생법에서는 감소하는 바도 없고
또한 증가하는 바도 없으니
응당 여실한 진리를 보아야 하며
양상을 따르는 것도 그와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