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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이 피었다기에 / 신현정 (1948~2009)
수련 보러 간다
수련 보러 가면서
수련 보러 가는 것이 어제인 듯 까마득하다
왜 발은 자꾸 진흙 속으로 빠지는지
한 발을 빼면 또 남은 한발이 마저 빠지는지
수련 보러 가는 길이 더디다
아마 수련을 보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수련 보러 가면서
왜 하품은 나오는 것인지
허공에다 하품을 몇 번 그리고 나니
정말로 한 백년을 자야 할 것 같다
수련 보러 간다
진흙 발을 겨우겨우 떼어 놓는다
이러다가는 다시 환속還俗하기도 쉽지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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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명한 관념의 세계다. 시인은 정말 수련을 보러 가는
것일까. 어제인 듯 까마득한 길 따라 백년은 자고 나서야
도달할 것 같은 그곳은 그야말로 仙人들이 사는 그런
곳인가 보다. 그 이상향을 향하여 진흙발로 겨우겨우
간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시에 대한 내적인 열망은
그러므로 오히려 더 간절하다 하겠다.
도처에서 보여지는 시적 진술의 묘미는 독백적이면서도
대상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비판이 깔려있다. 스스로
대상이 되어 자기반성을 진술하는 단순한 독백적
진술이 아닌 시적 대상에 대한 즉물적 인식을 가시화
하는 것만이 아닌 대상에 대한 이해와 비판이 적절히
어우러져 상상력의 극대화 속에 독자를 이상향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이처럼 신현정 시인은 관념을 개념으로,
독백을 천착적인 시적 진술로 거듭 태어나게 하고 있다.
와불臥佛 / 신현정(1948~2009)
나 운주사에 가서 와불臥佛에게로 가서
벌떡 일어나시라고 할거야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와불이 누우면서 발을 길게 뻗으면서
저만큼 밀쳐낸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산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아마도 잠버릇 사납게 무심코 내쳤을지도 모를
산 두어 개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 텐데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정말 안 일어나실 거냐고
천년 내놓으시라
천년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 『바보사막』(랜덤하우스, 2008)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sotong&logNo=222513917244&proxyReferer=
적소(謫所) - 신현정
나, 세한도(歲寒圖) 속으로 들어갔지 뭡니까
들어가서는 하늘 한복판에다 손 훠이훠이 저어
거기 점 찍혀 있는 갈필(渴筆)의 기러기들 날아가게 하고
그리고는 그리고는 눈 와서 지붕 낮은 거 더 낮아진
저 먹 같은 집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아, 그만 품에 품고 간 청주 한 병을 내가 다 마셔버렸지 뭡니까
빈 술병은 바람 부는 한 귀퉁이에 똑바로 세워놓고
그러고는 그러고는 소나무 네 그루에 각각 추운 절 하고는
도로 나왔습니다만 이거야 참 또 결례했습니다 *
* 적설
흰눈도 쌓이다보면 그 속이 캄캄하다
흰눈도 무너질 땐 그 속이 캄캄하다
문득 노송(老松)이 팔뚝 하나를 주어버린다 *
* 타인
사람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일 중에서
더욱 이름 없이 사는 일 중에서
아주 조그만 풀잎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참으로 오는 바람, 가는 바람에
조용히 나부끼고자 *
* 우체부는 더 빨리 걷지 않는다
우체부가 지나가니까 들국이 소담하니 핀다
개똥지바퀴가 우는가 하면
어느 담 밑에 늦은 과꽃은 세 번을 벨을 가장해 울기도 한다
저 우체부 아저씨 조금만 빨리 걸으시면 안 되나
늘 그 걸음이다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항시 그 걸음이다
아예 자전거는 옆구리에 모시고 다니신다
염소에게 글을 가르치시나
담배 한 대 더 태우고야 엉덩이를 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나도 기다림이 된지 오래다
오늘은 유난히 행낭이 불룩하시다
하, 새끼 기러기 몇 마리 목을 내밀고 있다
그렇다고 걸음이 더 빨라지지 않는다
그 걸음으로 저기 저 달까지 무난히 갈 것을 내 믿는다 *
* 하나님 놀다 가세요
하나님 거기서 화 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2005
* 나는 염소 간 데를 모르네
연두가 눈을 콕콕 찌르는
아지랑이 아롱아롱 하는 이 들판에 와서
무어 할 거 없나 하고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하는 것이어서
옳다, 나는 누가 말목에 매어 놓고 간 염소를
줄을 있는대로 풀어주다가
아예 모가지를 벗겨주었다네
염소 가네
어디로인가 가네
나는 모르네
어디서 음메에가 들리네
하늘 언저리가 파랗게 젖어 있는 것으로 봐서
거기서 잠시 울다 간 거 같으네
아 저기저기 뿔 쬐그맣게 달고 가는 흰 구름이 저거 염소 맞을거네
나는 모르네
이 봄, 팔짝 뛰고 뒤로 자빠질 봄이네
정말 모르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염소와 풀밭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 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
* 난쟁이와 저녁식사를
난, 이때만은 모자를 벗기로 한다
난쟁이와 식탁을 마주할 때만은
난 모자를 식탁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이번 것은 아주 높다란 굴뚝 모양의 모자였다
금방이라도 포오란 연기가 오를 것도 같고
굴뚝새라도 들어와 살 것 같은 그런 모자였다
사실 꼭 이런 모자를 고집하자는 것은 안다
식탁 위에서 모자는 검게 빛났다
오라, 모자는 이렇게 바라보기만 하여도 되는 것이로구나
식사를 마친 우리는
벽난로에 마른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었으며
그리고 식탁을 돌았다
나, 난쟁이가 이렇게 둘이서
문 밖에서 꽥 꽥 하는 거위도 들어오라고 해서 중간에 끼워주고는
나, 거위, 난쟁이 이렇게 셋이서
모자를 돌았다 *
* 바보사막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
* 오리 한 줄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末端)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가면 된다//
뒤뚱뛰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 줄 일제히 꽥 꽥 꽥.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영역
산기슭 집을 샀더니 산이 딸려 왔다
산에 오소리 발자국 나있고
쪽제비가 헤집고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제비꽃 붓꽃 산나리 피고
멀리 천국에 사는 아기들이 소풍 와서는 똥을 싸고 갔는지
여기 저기 애기똥풀꽃 피고
떡갈나무는 까치부부가 독채를 들었다
풀섶에선 사마귀 둘이 덜컥덜컥 턱을 부딪히며 싸우는데
허 나도 질세라
집 있는 데서 오십 보 백 보는 더 걸어나가서
오줌이라도 누고 오고 그러는 것이다 *
* 단풍
저리 밝은 것인가
저리 환한 것인가
나무들이 지친 몸을 가리고 있는 저것이
저리 고운 것인가
또 어디서는 짐승이 울고 있는가
어느 짐승이 덫에 치인 생채기를 핥고 있는가
저리 뜨거운 것인가 *
* 담에 빗자루 기대며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거 얼마만이냐
여기 땅집으로 이사와 마당을 쓸고 또 쓸고 한다
얼마만이냐
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만이냐
마당에 물 한 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만이냐
땅 놀래켜보는 거 얼마만이냐
어제 쓸은 마당, 오늘 또 쓸고 한다
새벽같이 나와 쓸 거 없는데 쓸고 또 쓸고 한다
마당 쓸고 나서
빗자루를 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는다
빗자루야 그래라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 도깨비하여라.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해바라기
해바라기 길 가다가 서 있는 것 보면 나도 우뚝 서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쓰고 벗고 하는 건방진 모자일망정
머리 위로 정중히 들어올려서는
딱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간단한 목례를 해보이고는
내딴에는 우아하기 그지 없는
원반 던지는 포즈를 취해 보는 것이다
그럴까
해를 먹어 버릴까
해를 먹고 불새를 활활 토해낼까
그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겠지
오늘도 해 돌아서 왔다 *
* 희망
앞이 있고 그 앞에 또 앞이라 하는 것 앞에 또 앞이 있다
어느날 길을 가는 달팽이가 느닷없이 제 등에 진 집을
큰 소리나게 벼락치듯 벼락같이 내려놓고 갈 것이라는 데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래 우리가 말하는 앞이라 하는 것에는 분명 무엇이 있긴 있을 것이다
달팽이가 전속력으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기러기 울음
난 그렇게 듣는다
기러기들이 감나무 위를 날아가니까
기럭기럭 우는구나 하고 듣고
억새밭 위를 날아가니까 억새억새 우는구나 하고 듣고
또 달을 지나가니까 달빛달빛 우는구나 하고 듣는다
오늘 기러기들은 임진강에 떠 있는 임진각 위를 지나
북녘 하늘을 날아가니까 북녘북녘 우는구나
하고 나는 듣는다. *
* 외면(外面)
연잎 위에 개구리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어쩌면 저렇게 꼼짝 않고 있는 개구리 그게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바람 불어 연잎 날리고
급기야는 개구리 첨벙하고 못 속으로 뛰어들 것 같아서
아 못이 한순간에 뒤집어질 것 같아서
가부좌란 저런 동작 이 세상 것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연잎 위에 개구리 애써 외면하며
하늘 본다 흰구름아 어디 가느냐. *
* 종달새야 솟구쳐올라라
종달새가 하늘로 까마득히 솟구쳐오른다
또 한 마리가 솟구쳐오른다
글쎄 하늘의 무엇을 보았는지
하늘 저 속의 은밀한 무엇을 보았는지
분홍을 보았는지
하늘 한복판에 달랑달랑 매달린 열쇠를 보았는지
이내 구름 아래 세상으로 나와서
서로가 몸을 만진다
뺨을 대며 재잘댄다
이빨을 깡그리 보이며 재잘댄다
등에 올라 탄다. *
* 은사시나무
바람이 불면서 은사시나무가
일제히 잎사귀를 뒤집어 팔랑이는데
이때야말로 은사시나무가 은사시나무일 때이다
은사시나무는 배면이 은빛인 잎사귀를 뒤집어
은빛을 팔랑이며 은사시나무임을 보여준다
바람이 불면 옳거니 이 때를 놓칠세라
굳이 잎사귀를 뒤집어 보여준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파문(波紋)
연잎 위의 이슬이
이웃 마실 가듯 한가로이 물 속으로 굴러 내리지만
여기 평화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슬 한 개 굴러내리면서
아, 수면에 고요히 눈을 뜬 동그라미가 연못을 꽉 차게
돌아나가더니만
이 안에 들어와 잠을 자던 하늘이며 나무며 산이
건곤일척(乾坤一擲) 일거에 일어서서 그 커다란 몸을 추스른다
새들, 도도히 날아간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달팽이 가다
조그만 집 한 채 구해서
벚꽃 떨어진 마른 땅을
살살 비질하며
길 한 줄 내어 가고자
달팽이처럼 전속력으로 *
* 신현정(申鉉正) 시인
-서울 사람 (1948~2009)
-1974년 [월간문학]에 시 [그믐밤의 수] 당선. 2003년 서라벌 문학상, 2004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염소와 풀밭] [자전거 도둑].....
신현정 시인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월간문학예 시부문 당선.『그믐밤의 수』
1983년 시집 『대립』민족문화사
2003년 『염소와 풀밭』문학수첩
2005년『자전거 도둑 』애지
2004년 제4회 한국시문학상 수상
2008년 『바보사막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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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氷點 / 신현정
첫, 겨울
냇강을 오르내리며 살던 붕어가 세상이 어디인가 하고
아주 쬐끔 입질해 물을 열어보았던 것인데
그만 닫는 걸 잊고 가버린 거기에서 부터
온 천지가 물 얼다
하산 下山 / 신현정
산에 오를 때 지나친 벼랑을
내려오면서 보게 된다
까마득히 내려다뵈는 벼랑 어디쯤
파란 솔 한 그루 몸을 틀었다
알겠다
그 아래부터는 죄다 세상이다
눈사람은 눈을 먹고 산다 / 신현정
눈사람이 섰다
눈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아마 눈을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내리는 눈을 먹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눈이 그만 내리고 눈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눈사람은 제 몸뚱이를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럴지 모른다
긴긴 겨울은 그렇게 오고 갔으며 그리고 봄이 왔다
도깨비바늘 / 신현정
한낮, 외진 길가 풀섶에
바람부는 대로 흔들리며
그림자도 없이 서 있는 도깨비바늘에는
도깨비가 살면서
이제나 저제나 언제나 세상에 나가볼까 하고는
거길 지나치는 하 세월의 것들에게
무심만 옷이나 한 벌 지어 입으라고
바늘을 꽂고 있으렷다
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하나님 놀다가세요
신현정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하나님 놀다 가세요」({자전거 도둑}, 2005년) 전문
신성의 세계는 거룩함, 숭고함, 정중함, 무거움 등이 그 특징이며, 따라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살고 있고,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존경과 예배와 찬양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성의 세계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세계이며, 진리의 창조주인 하나님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이에 반하여 세속의 세계는 더럽고 비천하며, 날이면 날마다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마약, 매춘 등의 범죄가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세계이며,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고 모든 것이 부족한 세계이다. 우리 인간들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서 불완전한 인간이며, 세속의 세계에서 天刑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동화의 세계는 선과 악, 진리와 허위, 남과 녀, 음과 양, 신과 인간, 인간과 짐승의 세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세계이며, 따라서 그 때 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시선 때문에 영원히 잃어버린 지상낙원의 세계로 인식된다. 우리 인간들은 동화의 세계(에덴동산)에서 세속의 세계로 내던져진 ‘실존적 투기’의 존재들이며, 그 실존적 내던져짐에 의해서 세속의 세계를 저주하고 신성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신성의 세계는 정의로운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자인 하나님에 의해서 굳건하게 문이 닫혀 있고, 우리 인간들은 그 좁은 문 앞에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참회를 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불완전한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는 것, 어느 것하나 가능하지 않고 모든 것이 부족한 세계에서 아름다운 천국으로 승천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행복론의 화두이며, 영원한 꿈일는지도 모른다.
신현정 시인은 요즈음 매우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생소한 이름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194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대립對立(1983), 염소와 풀밭(2003년), 그리고 이번에 출간한 자전거 도둑 등이 있다. 첫시집 대립을 출간한 이후, 20여년 동안 시작 활동을 중단했다가 새천년을 맞이하여 시를 쓰게 된 모양이며, 염소와 풀밭으로 각각 ‘서라벌문학상’(2003년)과 ‘한국시문학상’(2004년)을 수상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신현정 시인은 왜 시작 활동을 중단했던 것이며, 왜 다시 시작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던 것일까? 신현정 시인은 염소와 풀밭의 「첫머리」에서,
지난 해 이사를 하고부터 서울과 경기도를 경계짓는 해태 밑을 오고 가게 됐다.
해태는 시의를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 여간해서는 자리를 뜰 것 같지 않은 굼뜬 형상 또한 제격이다. 그리고 머리 가운데 솟은 뿔 하나.
나도 해태의 뿔 하나쯤은 솟았으면 한다. 이 세상에서 전혀 새로운 입법자立法者로 살아가고 싶다.
라고, 그 까닭을 밝혀 놓은 바가 있고, 또 그리고 자전거 도둑의 「시인의 말」에서,
시가 무엇입니까.
초월, 우주적 자아, 아닐 것입니다.
눈물, 삶의 더러운 때, 아닐 것입니다.
위로, 화해, 더구나 아닐 것입니다.
희망, 절망, 아닐 것입니다.
죽음, 관념, 아닐 것입니다.
자유, 피의 전율, 그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이 지상에 초대합니다.
당신이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습니다.
라고, 그 까닭을 밝혀놓은 바가 있다.
전혀 상상의 동물인 ‘해태의 뿔’을 하나쯤 갖고 새로운 입법자가 되고 싶다는 꿈, ‘초월, 우주적 자아’, ‘눈물, 삶의 더러운 때’, ‘위로, 화해’, ‘희망, 절망’, ‘죽음, 관념’, ‘자유, 피의 전율’ 따위 등의 상투적인 말과 인습적인 허구들을 내던져 버리고, ‘이 세상에 당신을 초대하고’, ‘당신의 행복한 모습’을 반드시 보고 싶다는 꿈이 지난 20여년 동안의 잠적기에 그의 내면의 세계를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새로운 입법자로서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세상, 즉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상낙원을 연출해놓은 자전거 도둑의 세계는 영원불멸의 금자탑의 세계이며, 우리 한국시문학사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자신만의 화법과 문체를 갖기 위하여 20여년 동안이나 시작 활동을 중단하고 가장 독창적인 화법과 문체를 들고 나온 장인 정신,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자 입법자로서 사상과 이념의 신전神殿을 연출해낸 장인정신, 만일, 그렇다면 신현정의 자전거 도둑은 오랜 시간 동안의 절차탁마의 산물이며, 가장 독창적인 화법과 문체의 산물이고, 그리고 마침내는 상상력의 혁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현정 시인은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의 세계도 거부하고, 형이하학적인 세속성(현실성)의 세계도 거부한다. 그가 선택한 세계는 동화의 세계이지만, 그러나 그 동화의 세계는 정신병리학적인 고착과 퇴행의 세계가 아니라, 초월성과 세속성을 다같이 끌어안고 대통합을 이룩해낸 동화의 세계, 즉 지상낙원의 세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신현정 시인이 그의 ‘상상력의 혁명’을 통하여 사상과 이념의 차원에서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이고,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행복론, 즉 지상낙원의 세계를 연출해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상과 이념의 차원에서, 또는 문체와 화법, 그리고 기법의 차원에서, 또 그리고 상상력의 차원에서, 한국시문학사는 신현정 이전과 신현정 이후로 기술할 날이 오게 될는지도 모른다. 로빈스 크루소가 자기 자신의 장원의 주인공이자 전제군주이었듯이, 신현정 시인 역시도 자기 자신의 언어의 사원의 주인공이자 그 신전의 전제군주이다. 하나님도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며 입법자이고, 신현정도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자 입법자이다. 하나님과 시인은 다같이 대등한 존재이며, 그 대등한 관계에 따라서 만물의 조화를 연출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피조물들로 끌어내리고, 언젠가, 어느 때부터 ‘정의로운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자’를 자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현정의 입법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만행이며, 대역죄에 해당된다. 하지만 신현정은 형이상학적인 신성성을 부정하면서도, 그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분노와 증오는 커녕,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그 하나님을 이 지상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오늘 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그가 ‘사유하는 동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모든 학문의 예비학으로서 ‘비판’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 있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거기서 화를 내며 잔뜩 부어 있느냐”라는 것이 첫 번째 비판이며,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행복도 연출해내지 못한다면 그 천국은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이 두 번째 비판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판은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챌” 수가 없다는 것이 獸神同形으로서의 신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다. 요컨대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고, 바로 이곳이 지상낙원이라는 것이 「하나님 놀다 가세요」의 핵심적인 전언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즐겁고 유쾌하며, 다소 해학적인 동화의 세계는 이처럼 一刀必殺의 문체와 낙천주의의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신현정의 동화의 세계는 반기독교적이며 신성모독적인 세계이다. 그는 정의로운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자로서의 하나님도 거부하고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의 표정에 반하는 분노의 표정도 거부한다. 신성의 세계는 거룩하고 엄숙하며 유모어가 없는 세계이지만, 동화의 세계는 언제, 어느 때나 즐겁고 유쾌하며 상하의 계급과 위계질서가 없는 세계이다. 하지만 그는 동화의 세계의 분위기만을 연출해내지, 동화의 세계의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신성의 세계도 거부하고 세속의 세계도 거부하며, 또 그리고 동화의 세계마저도 거부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그는 무정부주의자나 냉소주의자, 또는 회의주의자나 염세주의자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그는 현실의 삶을 옹호하는 현실주의자이자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하는 낙천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나의 신현정론([행복의 전령사--신현정의 ‘상상력의 혁명’에 대하여)의 머릿글에 해당된다. [하느님 놀다 가세요]를 더욱 더 명료하고 재미있게 분석해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시의 성격상 동어반복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차라리 가장 아름답고 멋진 ‘자기 인용’으로 대체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점을 독자 여러분들은 양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는 몇 권의 실제비평의 평론집을 더 묶어낼 수도 있지만, 사상과 이론서가 아닌 그 잡문 성격의 평론집 출간을 한사코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행복의 전령사]는 우리 애지 홈페이지(www.ejiweb.com)에 게시되어 있으니, 그것을 참조하여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