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26ㅡ홍서연의 ‘수미산’>
불교는 현재적, 현실적 종교
수미산/ 홍서연
십이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어미 새가 집을 짓는다
앙상한 바람 사이로
고집멸도의 지푸라기를 얹는다
하루 사흘 그리고 며칠,
바닥에서 퍼드덕거리는 아기 개똥지빠귀
모닥불이 훨훨 타고 있었다
휘이휘이, 여린 휘파람 소리
나지막이 저 먼 치서 들리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겨울 잎새 하나, 와불 와불 굴러다닌다
(홍서연 시, <수미산>, 한국불교신문, 2022)
[감상]
이 시는, 거꾸로 (마지막 행부터) 읽자. “겨울 잎새 하나, 와불 와불 굴러다닌다”. “와불 와불”, 절창 중에 절창이다. ‘와불 와불’은 ‘ 臥佛 臥佛(와불 와불)’로도 읽히고, ‘와글 와글’로도 읽힌다. 臥佛(와불‘은 ’누워 있는 부처‘를 말한다. ’와글 와글‘은 ’사람이나 벌레 등이 한곳에 복잡하게 모여서 자꾸 떠들거나 움직이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성(聖)‘- ‘ 臥佛 臥佛(와불 와불)’-과 ‘속(俗)’-‘와글 와글’으로 기막히게 중의(重義)해놓았다.(문학용어에 중의법(重義法)이란 게 있다. 한 단어에 두 가지 이상의 뜻을 곁들여 표현함으로써 언어의 단조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여러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수사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청산리 벽계수”에서 ‘벽계수’가 그것이다.) ‘와불 와불’-‘ 臥佛 臥佛(와불 와불)’-‘와글 와글’.
기막힌 은유이자 중의이자 상상이다. 참신도 기막힌다.
절창으로 치면, 이 시의 4행도 빼놓을 수 없다. “(어미새가)/ 앙상한 바람 사이로/ 고집멸도의 지푸라기를 얹는다”니, 집을 짓는 어머 새가 어떻게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알고, 인간의 삶의 여정인 ‘지푸라기’에 인간의 삶의 여정인 ‘고집멸도’가 있는 것을 알고, 그 고집멸도로 자신(어미 새-어미 개똥지빠귀)의 삶의 고집멸도인 ‘집’을 짓는단 말인가. 2022년 새해 벽두 필자는 이 시를 읽고 “고집멸도의 지푸라기” 한 움큼을 움켜쥐고 한동안 눈물을 삼켰다. 이제 밝힌다. 홍서연 시인의 <수미산>은 사실 <2022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이다. 2022년 1월 1일 발표된 각 신문들의 당선작을 찾아 읽다가 홍서연 시인의 이 시를 발견하고 필자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필자의 관념 속에만 솟아있던 ‘수미산’이 정말로 실체를 드러내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수미산(須彌山)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온 산으로,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인간에게 정복된 적이 없는 상상의 성산(聖山)을 가리킨다. 힌두교에서는 시바신의 거주지로 받아들여진다.]
무소유의 가난한 어미 새(어미 개똥지빠귀)가 자식(아기 개똥지빠귀)들을 위해 자식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성제(四聖諦, 고집멸도)의 지푸라기로 살집을 마련하고 있는 이 풍경은, 풍경 자체만으로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의 힘겨운 삶이 떠오르며,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그러다가 생명이 다한 순간 갠지스 강변에서 모닥불에 훨훨 타 한 줌의 재가 되고 새의 밥[조장(鳥葬. 송장을 들에 내다 놓아 새가 파먹게 하는 장사법)의 되게 한다. 죽어서까지 ‘어미 새’(우리들의 부모)는 무소유다.
그래서 그럴까.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이 재미 있다.
“긴 논의 끝에 홍서연의 <수미산>과 <중력 너머>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초현실과 현실이 하나인 ‘수미산’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보면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이다. ‘어미 새’와 ‘아기 개똥지빠귀’의 이중적인 조장 (鳥葬) 의식을 통해 천상계와 지옥계가 하나임을 보여준다. 이 새들이 중력을 거스르며 하는 장례! 자본주의 장례식이다! 자본주의 척력, 수미산의 중력이 고요히 중심을 잡아준다. 시의 중력을 견디는 자가 시인이다. (또 다른 당선작인) <중력 너머>에는 ‘환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다. 이 시의 언어의 탄력은 중력의 탄력이다. <중력 너머>는 탄력의 시이다. 이 시인의 탄력에 믿음이 간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홍서연 시인은 <수미산>과 함께 <중력 너머>라는 시 2편이 함께 당선되었다. <수미산>이 당선작으로서는 좀 짧은 느낌도 있어서겠지만, 함께 당선된 <중력 너머>라는 시가 당선작인 <수미산>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함께 연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의 뿌리가 아래로 자라는 것처럼/ 폭포가 너의 우듬지를 때리는 것처럼// 생활 밖으로 뻗어가는 중력은/ 어둠의 적막으로 향하는 것만은 아니지//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설 때마다/ 벽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지//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할 때마다/ 벽은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지// 멀어지는 사랑만큼 벽 따라 골은 파이고/ 몸을 밀어 넣을수록 자라나는 욕망은 휘어지고/ 깊고 깊은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달고 맛있는 잠을 늘어지게 잡니다// 속눈썹을 붙이고 아이라인을 짙게 그리고 속옷을 고를 때마다/ 별똥별이 어릴 적 뒷산으로 몸을 누인다// 보라매가 지상의 먹이를 향하여 수직으로 하강하듯이/ 떨어지는 소행성의 조각들, 타닥타닥 빛으로 떨어지고// 접혔다 펴지는 굽은 가로등, 그리하여 환한 저녁이여/ 평범한 일상이 외출이 되는 중력 너머// 흡사 다족류 우주인의 발처럼/ 한 발 두 발 밀어내면 낼수록 가까워지는,”
“벽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벽이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멀어지는 사랑만큼 벽 따라 골을 파이고”, “몸을 밀어넣을수록 자라나는 욕망은 휘어지고”, “깊고 깊은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달고 맛있는 잠을 늘어지게 자”고, “속눈썹을 붙이고 아리라인을 짙게 그리고 속옷을 고를 때마다”, 보라매가 지상의 먹이를 향하여 수직으로 하강하듯이”, “떨어지는 소행성의 조각들, 타닥타닥 빛으로 떨어지고”는 앞서 <수미산>에서 말한 ‘고집멸도’ 사성제를 은유와 환유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접혔다 펴지는 굽은 가로등, 그리하여 환한 저녁이여”라며, ‘중력 너머’로 외출(무소유)할 때, “환한 저녁”[천상의 세계, 깨달음, 성불(成佛)]이 기다리고 있다, “흡사 다족류 우주인의 발처럼/ 한 발 두 발 (욕망을) 밀어내면 낼수록 까까워지는,”.
깊고 심오한 불교의 진리를 이토록 쉽고 즐겁게, 시적으로 풀어주고 형상화한 홍 시인에게 불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필자도 이런 (<수미산> 같은) 시를 좀 써봐야겠다는 욕심도 갖는다. 홍서연 시인이 이 글을 읽는다면, 홍 시인에게 꼭 당부하고 싶다. 그가 불교를 믿든 안 믿든,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이 같은 (아름다운) 불교시를, 즐거운 불교시를, 재미있는 불교시를 많이 써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불교는 상상의 종교가 아니라 현실의 종교, 현재적 종교, 우주를 안고 있는 종교라는 것을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