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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 종족 우상 (Idols of the Tribe) ★
인간이라는 ‘종(Species)’ 전체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 때문에 발생하는 선입견을 말한다. 즉,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성질에 비춰 해석하려는 성향이다. 베이컨은 이를 ‘거친 거울(Uneven Mirror)’에 비유했다. 거울 자체가 평평하지 않으면 비치는 사물이 왜곡되듯이, 인간의 지성이라는 거울이 왜곡돼 있어 자연의 진리를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루터 선생님의 회심 ★
루터 선생님께서 수도원 탑 방에서 로마서를 연구하며 이른바 “신학적 회심”을 하시게 된 핵심은 로마서 1장 17절에 적힌 “하나님의 의(Justitia Dei)”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이 “의”가 ‘인간 행위의 의’를 심판하는 잣대로서 ‘공의의 의’로 생각하며 자신은 그 의의 표준에 도달할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 하셨는데, 그 의가 아니라,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이 ‘공의의 의’로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 의’,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믿음의 의’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 글 목차
제①편
‘포괄(넓은) 의미의 중생’과 ‘엄밀한(좁은) 의미의 중생’
이지끼을 님 확증편향에 따른 체리 피킹 오류
제②편
이지끼을 님 영문 오역
맺는 글: 칼빈 선생님 성례론 독해를 위한 길잡이
************
제②편
하나님께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으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 났기 때문이다.
(요일 3:9)
이지끼을 님에게: 성경은 ‘세례 중생론’을 지지하는가?
https://cafe.daum.net/1107/YlDw/29
ㅡ이하, [성경은 ‘세례 중생론’을 지지하는가?]ㅡ
지난 ①편에서 저는 현대 개혁 신학처럼 정밀(섬세)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칼빈 선생님답게 중생을 ‘중생자 삶의 전 과정’으로 대범하게 말씀하셨던 중생 개념, ‘포괄 의미의 중생’ 개념은 무엇인가를 두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지끼을 님이 칼빈 선생님의 ‘포괄 의미의 중생’ 개념 없이 세례 중생론의 확증편향 렌즈로 칼빈 선생님 텍스트를 읽으신 결과를 밝혔습니다. 즉, 세례 중생론에 꿰맞춘 체리 피킹 오류를 짚어 냈습니다.
‘체리 피킹 오류’를 베이컨이 말한 네 가지 우상(종족 우상, 동굴 우상, 시장 우상, 극장 우상)에서 ‘종족 우상에 따른 오류’로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자신의 특정 신학 체계에 꿰맞추기 위해 다른 신학 텍스트에 담긴 본래 의미보다 자신이 보고 싶은 목적을 투사해 낳은 오류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지끼을 님 경우, 로마 천주교 성례론(세례 중생론)을 마술론으로 말씀하신 칼빈 선생님께서 대범하게 쓰신 표현들을 굳이 세례 중생론이라는 자신의 신학 체계로 묶으려고 하시다 보니, 칼빈 선생님 텍스트를 자신도 모르게 왜곡하게 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왜곡은 종족 우상이라는 선입견에 따른 왜곡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학적 회심 뒤 “나는 즉시 새로 태어난 것 같았고, 열린 문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제야 성경 전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셨던 루터 선생님 고백에서 보듯, 마가복음 16장 16절 한 구절만으로도 ‘어거스틴, 루터, 칼빈 선생님 같은 유명한 신학자들 신학이나 날마다 개혁해 나가야만 하는 개혁 교회 정통 신학 권위에 눌려 그 신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극장 우상’에서 벗어나 무려 5 년 동안이나 ‘성경 본문 의미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순수한 열심에 따른 사명감 하나로 하나님께 신실하신, 제가 존경하는 이지끼을 님이 의도하신 왜곡이 아닙니다.
저는 결코 ‘성경 본문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형제들 영혼을 향한 이지끼을 님 순수한 열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언 15 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2011년 2월, ‘{뉴스앤조이} 박창진 [예수님은 신인이신가(완결편)]’ 댓글란에서 만나 인터넷에서 교제를 나누게 됐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어언 10 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지끼을 님이 저에게 주신 쪽지도 기억합니다. ‘이창모, 노우호 목사 같은 방언중지론 목사들이 방언 은사를 “마귀의 방언”으로 단죄한 글들을 목격하시며 장로(개혁) 교회에 방언 은사를 누리는 형제들이 많은데, 방언 은사 중지론으로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 교회에서 쫓아내 실족하게 하거나 오순절 교단으로 몰아내야 합니까? 사계 님은 방언 은사 지속론자로 알고 있는데, 사계 님은 실족하게 하는 이 일을 방관하시겠습니까?’ 하는 내용을 담은 쪽지였습니다. 그리고 해석하기 힘든 고린도전서 14장 21절~22절 해석으로 프로테스탄트 후예답게 방언 은사 중지론에 저항하셨습니다. 이 해석은, 방언 은사 중지론자들은 종족 우상이라는 선입견에 빠져 이해하지 못할 해석이겠지만, 방언 은사 지속론자인 저에게는 감탄과 이지끼을 님을 향한 존경심을 일으킨 탁월한 해석이었습니다. 방언 은사를 누리시며 성경 원어에 출중하신 예장 백석 라마드 목사님도 감탄하신 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지끼을 님이 {개혁신앙 푸르내}에 이미 개혁 교회 정밀한 신학이 단죄한 ‘세례 중생론’으로 댓글란 질문들과 게시글을 올리셨을 때 저는 ‘아, 꺾기 힘든 교만이 틈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지끼을 님 순수한 열심을 알기에 이지끼을 님을 존경하며 {뉴스앤조이}에서 이단 박창진에게 함께 싸웠던 형제,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로 여기는 마음은 변함 없었습니다.
지난 5 년 동안 이 카페와 타 카페 {개혁주의 마을}에 세례 중생론에 관한 글을 올리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웠지만,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방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도르트 신조}를 다루신 [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는 주장에 대하여]를 읽고는 방관을 끝내기로 한 것입니다. {도르트 신조}는 화란 개혁신앙 선조들께서 같은 주님을 믿는 한 형제인 알미니안주의 형제들에게 학살을 당할 위기에서 하나님 섭리로 확립한 신조이기에, 그분들께서 흘리신 피땀과 “나는 모든 사람 피에 대해 깨끗하다.”(행 20:26) 하신 바울 사도 말씀을 기억하며 방관을 끝낸 것입니다.
방관하면서 ‘이지끼을 님 글들은 난해하기도 하고 거의 모두 무척 길어 숏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글이기에, 신앙이 어린 신자들이 읽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이지끼을 님 세례 중생론 글로 어린 신자가 실족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단은 결코 모르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 원어 실력도 출중하며 성경을 아주 잘 알면서도 잘못 아는 것과 자기 확신이 결합할 때 태어납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와 문맥의 안전한 성’에서 벗어나 ‘파편화한 부분과 단어의 폐쇄 병동’을 세웁니다. 성경 전체 거대한 흐름을 못 보고 자기 논리 렌즈에 맞는 특정 구절이나 단어에만 돋보기를 들이대는 병이 확증편향의 중증으로 자라 태어납니다. 이 점에서도 이지끼을 님이 안타까워 방관을 끝낸 것입니다.
저는 이지끼을 님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이 글은 이지끼을 님을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 여기며 타이핑하는 글입니다. 이를 밝히려고 ②편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이지끼을 님 영문 오역
중학교 영어 첫 시험에서 18점을 받았던 제가 늦은 나이에 영문학을 공부했지만, 여전히 문법과 단어 실력이 무척 짧기에 영문을 보면 겁부터 먹고 일단 영문은 외면하고 봅니다. 그러나 세례에 관한 칼빈 선생님 영문을 우리말로 옮기신 이지끼을 님 번역을 속독으로 읽으며 제가 아는 칼빈 선생님 세례론이 아니기에 오역하셨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문법과 단어 실력이 짧은 주제이기는 하지만, 급우들 오역과 영문 우리말 번역본들 오역이나 작품 주제를 파악해 말씀하시는 교수님들 견해에 관한 오류를 잘도 캐냈던 경험을 되살려, 제 번역을 검증해 줄 제 비서관 제미나이를 신뢰하며 ‘영문’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음은 [성경은 ‘세례 중생론’을 지지하는가?] 답글란에서 옮깁니다.
이지끼을 26.03.15.10:26
칼빈은 또한 우리가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고 말하였습니다.
So then we must ever come to this point, that the sacraments are effectual and that they be no trifling signs which vanish away in the air, but that the truth is always matched with them, because that God who is faithful, showed that he had no ordained anything in vain.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즉, 성례는 실로 효력이 있는 것이며, 허공 속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하찮은 표적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례에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진실한 실체가 동반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제정하신 그 어떤 것도 결코 헛되이 두지 않으셨음을 친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지끼을 님이 옮기신 위 영문에서 ‘세례’를 뜻하는 단어는 없고, “sacraments(성례)”라는 단어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지끼을 님은 “but that the truth is always matched with them,”을 “오히려 성례에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진실한 실체가 동반되어 있습니다.”로 번역하셨습니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을 뜻하니, “그에 상응하는 진실한 실체가 동반”이라는 번역은 “실체”라는 단어를 넣은 까닭으로 마치 세례를 줄 때 어떤 영적 물질이 자동 주입되는 듯한 마술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 번역은 바른 번역(의역)입니까?
‘오히려 진리가 항상 성례들과 함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가 바른 번역 아닙니까? 아니면, 전후 문맥을 고려한 의역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항상 성례들과 함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가 바른 번역 아닙니까?
다음은 [성경은 ‘세례 중생론’을 지지하는가?] 답글란에서 옮깁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이지끼을 26.03.15.10:19
And by is the cause why in baptism we receive truly the forgiveness of our sins, we be washed and cleansed with the blood of our Lord Jesus Christ, we be renewed by operation of his holy spirit. And how so? Had a little water such power when it is cast upon head of a child?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통해 우리의 죄 사함을 진정으로 받게 되는 이유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을 받고 정결하게 되는 이유이자,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아이의 머리에 뿌려지는 그 적은 양의 물에 과연 그토록 놀라운 능력이 깃들어 있단 말입니까?
“세례를 통해”가 “죄 사함”과 “씻김(정결)”과 “중생(거듭남)”의 “이유”(원인)으로서 중심어라는 오해를 일으키는 이지끼을 님 위 번역에서 추출할 수 있는 구원의 서정은 당연히 ‘세례-죄 사함-씻김(정결)-중생’입니다.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라는 번역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앞 문단 없이 이 문단만 읽을 때 세례 중생론이라는 이지끼을 님 렌즈로 독해하면, 세례가 새롭게 거듭나게 되는 이유”라는 오해를 일으키는 번역입니다.
“And by is the cause why in baptism we receive truly the forgiveness of our sins,”를 이지끼을 님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통해 우리의 죄 사함을 진정으로 받게 되는 이유이며,”로 번역하셨습니다. 이 역시 세례가 새롭게 거듭나게 되는 이유”라는 오해를 일으키는 번역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번역해야 합니까? “by is the cause”는 바로 앞 문맥 “자신이 제정하신 그 어떤 것도 결코 헛되이 두지 않으셨음을 친히 보여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니, 신실하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번역을 해야 합니다.
마술론으로서 세례 중생론을 부정하신 말씀인 “Had a little water such power when it is cast upon head of a child?”라는 칼빈 선생님 말씀에서 “such power”를 직역하면 ‘그런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지끼을 님은 “아이의 머리에 뿌려지는 그 적은 양의 물에 과연 그토록 놀라운 능력이 깃들어 있단 말입니까?”로 의역하셨습니다.
성 삼위 성령 하나님의 중생 사역은 “그토록 놀라운”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역이기에, “놀라운”은 트집 잡지 말아야 할 ‘단어 삽입’입니다. 그러나 이지끼을 님이 중생의 이유(원인)를 세례로 오해하도록 하는 번역을 하셨기 때문에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할 ‘단어 삽입’입니다. ‘물(세례)에 죄 사함과 중생을 일으키는 그런 능력이 있느냐? 없다!’가 칼빈 선생님께서 뜻하신 의도입니다. 그러함에도 “그토록 놀라운 능력”이라는 이지끼을 님 번역은 ‘의문문 형식을 띤 칼빈 선생님 부정문 문장’에 담긴 뉘앙스를 오해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할 ‘단어 삽입’입니다.
바로 뒤 “No”가 수식하는 의문문 형식의 강한 부정문…. 칼빈 선생님께서는 이 부정문에서 로마 천주교 세례 마술론의 물, 그 물(세례) 자체의 무능력을 폭로하심으로써 우리 시선을 성례의 주인이신 성령 하나님께 돌리셨습니다, 그런데 아래에 인용하는, 이지끼을 님이 인용하신 “No,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로 시작하는 칼빈 선생님 글이 없다면, 이지끼을 님 번역은 물(세례)에 마치 어떤 놀라운 신비로운 실체가 깃들어 있는 듯한 놀라운 감탄형의 긍정문 느낌을 줍니다.
또 옮깁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이지끼을 26.03.15.10:26
No, but because it is the will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water should be a visible sign of his blood and of the holy Ghost, therefore baptism had by virtue and whatsoever is there set forth to the eye, is forth with accomplished in every deed.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물을 자신의 보혈과 성령을 상징하는 ‘보이는 표적’으로 삼으시겠다는 뜻을 정하셨기 때문에, 세례는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표적의 내용은, 곧바로 실질적인 현실로서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지끼을 님 이 번역은 세례가 지닌 효력의 원인을 세례라는 ‘예식’이나 물질인 ‘물’에 눈을 돌리게 하는 번역입니다. 이는 칼빈 선생님께서 경계하셨던 성례 마술론으로 흐를 위험이 큰 번역입니다.
“forth with”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forthwith’“곧바로”(즉시)로 번역하셨습니다. 이는 시간의 자동성을 뜻하는 번역으로, 물이 닿으면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는, 세례 마술론이 담긴 기계적 뜻을 담은 번역입니다.
다음은 이지끼을 님이 “세례는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번역하신 영문을 “세례는 주님 권능에 의해 (효력을) 지님”으로 옮긴 제 번역입니다. 표징인 세례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가야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지, 표징인 세례가 성령의 역사를 강제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한 번역입니다. 표징으로서 성례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성례 그 자체가 아님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성례에서 주님의 주권(뜻과 권능)을 강조한 번역입니다.
아닙니다. 그것(그 효력)은 우리 주님 뜻에 달려 있기 때문이며, 그 물은 그분의 피와 성령이 우리 눈에 보이는 표징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주님 권능에 의해 (효력을) 지님으로써 눈앞에 제시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눈앞에 제시된 표징)과 함께 모든 행위(실재)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타이핑해 놓고, (어제 저녁 무렵) 눈에 피로가 와 산책한 뒤, 교차 검증을 위해 ‘영문 텍스트’와 ‘이지끼을 님 번역문’을 챗지피티에게 붙이기해 평가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무식하게도 ‘제네바에서 프랑스어로 설교하신 칼빈 선생님 설교’를 ‘현대 영어’로 번역한 영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챗지피티가 이지끼을 님 번역을 ‘16세기 영어로, 번역하기 까다로운 영문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잘 번역한, 훌륭한 번역’으로 평가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타이핑한 <이지끼을 님 영문 오역>을 붙이기 해 줬습니다. 염치없이 챗지피티 자신이 오역을 발견한 양 이지끼을 님 오역을 지적하는 답변을 주더군요.
칼빈 선생님 성례론 독해를 위한 길잡이
여기에서 {기독교 강요 4권} [14장]~[19장]에 적힌 칼빈 선생님 성례론 독해를 위한 길잡이인 [14장: 성례] <1항>을 적으며 글을 맺습니다. 스마트폰으로 텍스트를 찍어 컴퓨터 제미나이에게 문자 변환을 부탁한 글입니다. 아래 인용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 간단한 표현에는 무언가 모호한 점”은 아우구스티누스 선생님 성례론을 오해한 로마 천주교 성례 마술론을 경계하신 말씀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칠하는 배경색 글 “믿음”은 ‘엄밀한 의미의 중생’ 시 받은 믿음을 뜻합니다. 밑줄은 제가 긋습니다.
…(인용 시작)…
제14장 성례
1. 성례의 정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유사하게 성례도 우리 믿음에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성례들에 대해 명확한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그것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제정됐으며 현재의 용도는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우선, 성례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성례를 간단하고도 적절히 정의하자면, 그것은 주께서 우리 연약한 믿음을 지탱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향하신 그분 선하신 약속들을 우리 양심에 인치시는 하나의 외형적인 표지(sign)이며, 또한 우리 편에서는 주와 그분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향한 우리 경건을 인증하는 표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간단히 정의하자면, 우리에게 향하신 신적 은혜에 대한 증거를 외형인 증표로써 확증하는 것이요, 그에 따라서 주님을 향한 우리 경건을 인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 어떤 정의를 택하든, 성례를 “신성한 것에 대한 가시적인 표지요” 혹은 “불가시적인 은혜의 가시적인 모습”이라고 가르친 아우구스티누스 진술과 의미상 별로 다르지 않으나, 그보다 성례 자체를 더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고 하겠다. 아우구스티누스 간단한 표현에는 무언가 모호한 점이 있어서 교육을 덜 받은 많은 이가 속임 당할 소지가 있으므로,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충실하게 진술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인용 끝)…
************
…(끝)…

첫댓글
(1)
조금 늦었지만 세례에 대한 칼빈의 이해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제가 세례에 대해 이해하고 난 후 세례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검색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찾았습니다.
Calvin and Baptism: Baptismal Regeneration or the Duplex Loquendi Modus?
https://reformation21.org/calvin-and-baptism-baptismal-regeneration-or-the-duplex-loquendi-modus-php/
요약하자면, 제 분류대로 칼빈은 세례에 대해 두가지 이해 (A, B)를 말했는데
(A, B)를 말한 것 같지만 실제는 (B)만 말했던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이글을 한 6개월은 붙들고 있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정직하지 못한 글이었습니다.
두가지 이해(A, B)를 말했다고 하면서 (B)의 예는 들고 (A)의 예는 제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기독교강요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한글번역은 구하기 힘들어서 인터넷으로 영문번역 세개를 구해서 세례에 관한 부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 말씀드렸던
하나님께서 세례로 우리를 중생케 하셔서, 그의 교회의 교제 안으로 접붙이시고
양자삼아 주셔서 자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낳아 주신 그 생명(the life)을 지탱하고 보존할 수 있는
양식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심으로써 섭리적인 부모의 직분을 수행하십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강요 4. 17. 1) 라는 글도 찾았고
(3)
기독교강요 4. 15. 14 에서
14. Sign and thing
Now that we have explained our Lord's purpose in ordaining baptism, it will be easy for us
to judge how we should use and receive it. For inasmuch as it is given for the arousing,
and confirming of our faith, it is to be received as from the hand of the Author himself.
이제 우리는 세례를 제정하신 주님의 목적을 설명했으므로, 우리가 세례를 어떻게 사용하고
받아야 할지 판단하기 쉬울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일깨우고, 양육하고, 확증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 주인이신 주님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받아야 합니다. 라는 글도 찾았습니다.
(4)
그리고 결정적으로 칼빈이 세례에 대해 두가지 이해 (A, B)를 한다는 것을 알수 있는 말이 있는데
기독교강요 4. 15. 15 에서
고넬료와 바울이 받은 세례에 대해 설명하면서
[[ I answer, we are said to receive, procure, and obtain, whatever according to
the perception of our faith is exhibited to us by the Lord, whether he then attests it
for the first time, or gives additional confirmation to what he had previously attested.
칼빈은 "내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처음 증명하시든
아니면 이미 증명하신 것에 주께서 추가적인 확증(confirmation)을 주시든"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우리의 믿음으로 깨달은 만큼, 받고 얻고 획득한다고 합니다." ]] 라고 한 말입니다.
(5)
여기서 "주께서 처음 증명하시든 아니면 이미 증명하신 것에 주께서 추가적인 확증(confirmation)을 주시든" 이라는
말이 바로 막 16:16절을 두 가지로 이해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번 이해해 보십시요,
그런데 혹시 이해가 되지 않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요 설명해 드릴테니
(6)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각 Chapter별로 요약해 놓은 웹사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John Calvin for Everyone 이라는 웹사이트입니다.
이 웹사이트를 만든 사람은 미국 장로교 목사인 John Judson이고
John Judson 목사가 사용한 기독교강요는, 본문에 표시된 page number를 보면
Ford Battles 가 영어로 번역하고 John McNeill 이 편집한 기독교강요입니다.
기독교강요 4권 15장에 대한 요약은, 기독교강요 4권 15장에 따라 part 1과 part 2로 나뉘어 있는데
저는 이 중에서 part 1만 소개드리는 글을 썼습니다.
https://cafe.daum.net/1107/Y4PX/1108
저의 글을 보시면 세례에 대해 칼빈이 어떤 이해를 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