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지족(安分知足)
누구나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뛰어난 학식을 가졌거나 성인군자와도 같은 인품을 가진 현자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현재에 만족하며 충실한 생활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최근 몇 년에 걸쳐 마음속으로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미처 실천하지 못했던 인간관계를 복원하면서 얼마나 보람을 느꼈는지 모른다.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거나 돌아온 막내를 환영하는 성경의 비유처럼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정리를 다 한 것 같아 안도의 숨을 쉬고 있다. 물론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상 차원을 벗어나 받았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아야 한다는 당위로서의 책무에서 비롯하였다.
그 첫째가 선친 친구 분의 아들인 전직 조 대사(趙大使)를 찾은 일이다. 몇 해 전에 두루 수소문하여 친구와 지인을 통해 거처를 알게 되었다. 어른들이 한마을에서 함께 자라 같은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한 분은 군인으로 한 분은 학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후에 한 분은 도지사와 장관을 역임하셨고, 나의 선친은 시인으로 국문학 교수로 봉직하셨다. 둘이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두 분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교분에 대한 추억을 새겼는데 이후 친형제처럼 자주 만나고 있다.
두 번째로 「춘강 이춘재(春崗 李春宰)」 선생의 아들인 이 시인(李詩人)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선생의 자녀들이 최근에 4대에 걸쳐서 시문집을 발간했는데, 거기에 나의 선친께서 36년 전에 쓰신 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55년 전에 두 분은 같은 고등학교에서 7년 동안을 근무하시면서 아주 끈끈하게 교류하셨는데, 1985년에 정년퇴직을 하시는 「춘강」 선생에게 헌정했던 회고문 형태의 산문이었다.
유려하고 진솔한 장문의 글을 읽으면서 선친과 「춘강」 선생 간 관포지교(管鮑之交) 이상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선친은 당(唐)나라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을 빌어 「춘강」 선생을 기렸다. 「산은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선인(仙人)이 있으면 이름이 있다. 물은 깊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용이 있으면 신령스런 것이다. 이 누실은 오직 나의 덕이 향기로운 데 있다」라는 결말이었는데 구절구절이 두 분이 보통의 관계를 뛰어넘는 정신적인 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는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명필과의 재회이다. 돌이켜보니 1980년 초 추운 겨울에 매제가 대학 동창으로 막역하게 지내는 그를 집으로 안내하였다. 그는 이미 동아대전(東亞大展)에서 특상을 받은 바 있어 전도유망한 서예가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당시 고향에서는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석전(石田) 황욱(黃旭)」,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 선생 등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고, 「하석」은 「강암」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더구나 「하석」은 창(唱)에도 일가견이 있어 취미로 즐긴다고 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친은 아끼시던 통북(소 한 마리 가죽 전체로 만든 북)을 가져오게 하셨다. 그로 하여금 잠시 창을 하게 하신 후 장단을 맞추시더니 제대로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북을 흔쾌히 선물하셨다.
그 후 30여년이 지나 수소문 끝에 압구정동에 있는 그의 연구실인 석곡실(石曲室)로 찾아갔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하고 선친의 시비(詩碑) 건립에 필요한 글씨를 부탁하였다. 선생은 흔쾌하게 전한 시대(前漢 時代)의 글씨를 찾아 정성들여 쓴 글씨를 선친에 대한 흠모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건네 주셨다.
지난 9월 말에 재회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사례를 언급하시다가 즉석에서 두 편의 글씨를 써주셨다. 곱게 표구하여 서재에 두고 선생의 은덕을 기리고 지낸다. 그리고 선생의 주선으로 「송하진」 전 도지사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석」은 송 지사의 선친인 「강암」 선생의 수제자로써 두 분은 막역한 사이다. 송 지사도 집안의 가풍을 이어 받아 명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문학지에 발표를 하면서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기도 하다.
네 번째는 역시 선친을 통해 소개를 받았던 「이종석」교수이다. 한말의 유명한 유학자이신 「석정(石亭) 이정직(李程稷:1841~1910)」의 장손이시다. 이 교수는 나보다 선배로 일찍이 선친께서 소개를 하셨다. 그는 제주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한라산이 원산지인 『한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대규모의 배양방법을 성공시켜 제주 농가 소득을 증대시킨 바가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난초 전문 원예학자이다.
「석정」은 이 땅에 처음으로 「칸트」와 「베이컨」을 소개하였으며, 학문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각 서체에 정통하였고,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특히 「괴석도」는 필법이 매우 특이하여 당대의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차후에 「조주승(趙周昇)」, 「송기면(宋基冕)」등 그의 제자들이 서예와 그림 분야에서 탁월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특히 「송기면」 선생은 역시 유명한 유학자로 송 지사의 친 조부님 이시다.
원래 선친께서 「매천(梅泉) 황현(黃玹)」에 대한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매천」과 「석정」은 매우 돈독하게 지낸 친구 그 이상의 사이였다. 선친은 자연스럽게 「석정」에 대한 관심을 경주하여 그의 유고를 발굴하고, 『소여록(燒餘錄)』을 번역하여 세상에 알린 인연으로 이 교수와 교류하게 된 것이다.
다섯 번째는 최 건축사(崔 建築士)이다. 그의 아버지는 선친과도 교분이 두터운 분으로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 :1924~2001) 선생이시다. 「남정」 선생은 한 시대를 빛 낸 서예의 대가로 추천 및 초대 작가와 국전 심사위원과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하셨다. 일찍이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선생에게 15년간을 수학한 수제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문인화(文人畵)에도 일가견이 있어 이 분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하셨다.
「남정」 선생은 아들의 친구이며, 친구의 아들이기도 한 내게 귀한 글씨를 준비해 두셨다가 면전에서 육사 입학을 축하하신다면서 성명 및 낙관을 찍어 선물하셨다. 소중한 가보(家寶)로써 지금까지 잘 보관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1968)」선생의 손자인 (李 社長)이다. 「가람」은 시조 시인 이면서 국문학의 태두(泰斗)이시다. 한국 전쟁 이후 전북대의 문리대 학장으로 재직 시에 선친은 말단의 제자로서의 인연이 있다. 사실 이 사장과는 오랜 친구였으나 「가람」선생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멋과 실력으로 유명한 「이미배」 샹숑 가수가 고모님이다. 오래 전 그가 로얄골프장의 상무와 사장으로 근무 시 파격적인 혜택을 받기도 하였다. 넉넉한 풍채와 부드러운 성품으로 무도의 달인인데 학문도 병행한 경영학박사로 아직 사업을 하고 있다. 별을 달았다고 이니셜로 이름을 새긴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하여 지금도 아끼는 소장품으로 애용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이 교수님과 이 사장 등 셋이서 만났다. 고문서에 정통한 서지학자(書誌學者)를 소개하여 기회가 되는대로 만나기로 하였다. 최 건축사와는 별도로 회포를 풀고 이 시인 등과 곧 재회키로 했다. 주말에는 상경한 송 지사와 인사동에서 상면하였다. 점심과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강암서예학술재단(剛菴書藝學術財團)」 주관의 전각전(篆刻展)을 관람하며 설명을 들으니 유익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세 분의 서예가와 합류하여 다양한 주제로 대화와 술을 나누고, 전각도록(圖錄)에 합동으로 귀한 글씨를 써 주시니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인연이란 서로 관심을 가지고 가꾸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마음은 있어도 생활에 매달려 심적인 여유를 내지 못하고 살아간다. 여하튼 만나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전생에서 좋은 인연을 맺은 사이란 생각이다.
다른 사연이 깃든 몇 분에게도 연락을 했으나 사장이 여의치 않아 더는 추진을 보류하고 있다. 현실에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무리한 욕심에서 벗어날 일이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더욱 소중하게 가꾸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이 나이에 서로에게 무엇을 바라고 부탁을 하겠는가. 옛날 어른들의 교분과 인연의 끈이 연결되어 후대에 와서도 대를 이어 소통을 하고 지내니 그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정신적인 유산인가! 우리 후대에서도 잘 전승되도록 지도할 생각이며, 비록 풍족하지 않아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문화인으로 살아가는 긍지와 자부심은 잃지 않을 것이다. (2022. 11. 25.작성/11.27.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