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상자의 힘
하인혜
오동나무 상자에 순한 볕내가 담긴다. 가을 초입이면 거풍을 위해 어머니는 수의를 꺼내 놓으신다. 어김없이 치르는 연례행사이다. 어머니는 윤년을 기다려 당신의 옷차림을 준비해 놓으셨다. 꺼내어 펼쳐 놓으면 명주에서 삼베에 이르기까지 요모조모 갖춘 일습이 여전히 낯설다. 다양한 소품에서 인체를 감싸는 의복과 덮개까지 전통 방식에 기준하여 맞춘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상자를 열고 살피시는 어머니 눈길은 적막하다. 바닥에 한지를 깔고 정갈한 매무새로 차곡차곡 넣는 어머니 손길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한다.
삼십여 년 전에 마련하여 종이 상자에 넣어두었다. 해를 거듭하니 상자의 모서리가 찢겨 임시 방책으로 접착테이프를 둘렀으나, 형상이 여간 추레한 게 아니다. 몇 차례 재래시장을 돌아봤으나 다른 재질에 크기도 마땅찮아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오셨던 모양이다. 당신 마음 속 생각이 세 명의 자부(子婦)들에게 전해지고 나름 역할을 했지만, 탐탁찮아 하셨다. 시중에 나오는 수납 도구는 편리하고 세련된 제품이 많다. 그러나 플라스틱 재질을 싫어하셨다. 요밀한 성품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꼭 데려와야 했다.
두루 찾아낸 끝에 나무 상자를 만나게 되어 자못 안도했으나 이도 잠깐, 크기가 작다고 하신다. 염천 더위가 정점에 오르니, 냉방 기운을 벗어난 바깥 세상은 불 지핀 아궁이에 얹힌 가마솥 같았다. 날씨조차 부아를 돋우니, 적이 난감했다. 되물림을 꺼리하지 않고 더위에 오가느라 애쓴다면서 오히려 안타까워하던 주인 표정이 어찌나 고맙던지, 요동치던 마음이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그런데 어쩌랴. 어머니가 원하는 크기가 아니라는데 그냥 쓰시라고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렁저렁 시간이 흘러 잊어버린 듯했는데, 거주지 가까운 곳에 있는 공방이 눈에 들어왔다. 산책을 나설 때 동선을 더하는 길가에 있는 곳이다. 가로수로 은행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진 건너편에 놓인, 얼핏 오두막처럼 보이는 곳이다. 옆으로 주유소와 인력 사무소가 나란히 문을 열고 있으니, 어색한 조합의 상권이다. 주유소가 문을 닫을 것인지. 인력 사무소가 떠날 것인지 갸우뚱하며 지나는 거리다. 갈무리한 나무 둥치를 굴려 비껴놓은 채, 주인은 거리에 목재를 내놓고 작업을 했다.
대패질이 부려놓은 나뭇결은 망실망실 발아래 남실거리고, 난로의 딸감인 듯 소복이 모인 톱밥에 향수도 아른거린다. 나무 속살을 손으로 매만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나무와 손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나무 속에서 풍겨 나오는 내음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한 번씩 깊은 숨을 몰아쉬곤 했다. 시·서·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목수 김진송 선생은 말했다. 나무에는 "달짝지근하고 풋풋하고 비릿하고 시큼하고, 싸한 수십 가지
의 냄새들이 뒤섞여 있다."고. 그의 예민한 감각을 떠올리지만 나는 그저 아픔의 체취인 듯 사느란 기운을 느낄 뿐이다. 일머리를 모르기에 나무를 다루는 손길 너머로 주변을 기웃거렸다.
한눈에 들어오는 공방 내부는 작업 공간치고는 비좁아 보였다. 장못을 친 벽에 걸어 놓은 연장들을 보니, 내 유년의 옥이네 창고가 그림처럼 선연히 떠오른다. 장인(匠人)이 운용하는 가게는 거의 사라진 시대이다. 무엇인가 만들어내기 위해 공을 들이거나 매만지는 과정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이 길이다. 라는 문구가 담긴 명함을 받아들고 공방의 주인이라면 해결해줄 것 같았다. 자신의 업을 이어가는 현장에서 찾은 길이 정직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이곳에서는 어머니가 원하는 수의함을 만들어줄 거라는 느낌에, 이래저래 원하는 사양으로 주문하자 주인장의 말 한 마디가 전해온다.
어허, 어머니 성품이 무척 섬세하신 것 같군요. 아무렴요. 빈틈이 없으시답니다. 라고 빠르게 올라오는 대답을 입 아래로 베어 삼켰다. 목재를 묻는다. 나무 재질에 대한 안목이 없는 내가 쭈볏거리자 오동나무를 추천한다. 목재의 쓰임이 다양하다는 것뿐, 나무를 다듬으며 교감한 적이 없는 나는 그의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덧칠 할 색상까지 꼼꼼하게 고르고 정교한 붓 칠을 더하는 등 작업 중간에 몇 차례 사진을 찍어 보내며 작품을 완성했다. 상자의 깊이도 아늑하다. 뚜껑 또한 조신하고 아담한 매무새가 되었다. 몸체 양쪽으로 달려있는 아기자기한 손잡이가 누구의 손이라도 반길 것 같다.
이제 어머니 곁에서 가구(家具)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마지막 옷이 담길 집 한 채를 마련한 듯, 나무 상자에 닿는 정갈한 어머니 손길과 눈길이 애틋하다. 언젠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세상에 하나뿐인 상자가 되어, 어머니 곁에 찾아온 내력을 들려줄 터. 기억의 낱장에 나날살이의 세목이 적힌 추억의 보고가 될 것이다. 오르골처럼 시간의 태엽을 감으면, 가까운 거리라도 서먹했던 눈 밝은 동서들과 나눌 한담이 자차분히 흐를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나무 상자에서 가얏고의 현이 울려. 산조 한 소절에 담긴 노래가 바람처럼 불어올 것이다.
첫댓글 2024년 여름 <에세이문학>
오동나무 상자에 순한 볕내가 담긴다. ..대패질이 부려놓은 나뭇결은 망실망실 발아래 남실거리고, 난로의 딸감인 듯 소복이 모인 톱밥에 향수도 아른거린다. 나무 속살을 손으로 매만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나무와 손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나무에는 "달짝지근하고 풋풋하고 비릿하고 시큼하고, 싸한 수십 가지의 냄새들이 뒤섞여 있다."고..어머니 곁에서 가구(家具)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마지막 옷이 담길 집 한 채를 마련한 듯, 나무 상자에 닿는 정갈한 어머니 손길과 눈길이 애틋하다. 언젠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세상에 하나뿐인 상자가 되어, 어머니 곁에 찾아온 내력을 들려줄 터. 기억의 낱장에 나날살이의 세목이 적힌 추억의 보고가 될 것이다... .
수의를 담아둘 나무 상자....글쓴이의 마음 결이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늘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