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없는 자유, 그리고 경계 밖의 시선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니 별로 살도 찌지 않았으나, 그래도 절름발이도 되지 않고 건강하게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쥐는 결코 잡지 않는다. 하녀 오상은 여전히 싫다. 내 이름은 아직 붙여주지 않았으나 욕심을 내면 한이 없으니 평생 여기 선생 집에서 무명 고양이로 생을 마칠 생각이다.
-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소설 속 고양이가 이렇게 자기소개를 할 때, 독자는 웃음과 동시에 묘한 철학적 울림을 느낀다. 이것은 고양이의 빈정거림인가, 아니면 인간 사회에 던지는 풍자적 비수인가. 나쓰메 소세키의 고양이는 웅장한 문학적 주제가 아니라, 일상의 시시한 자기소개로 무대를 열지만, 그 안에 이미 시대와 인간에 대한 풍자적 단서가 숨겨져 있다.
소세키의 문장은 단순하다. 그러나 단순함이 곧 힘이다. 그는 일본 근대문학 초창기에 활동했지만, 장황한 수사 대신 날카로운 일상어를 썼다. 일본어 특유의 모호함, 여운을 남기는 종결어, 짧고 잘린 듯한 구문들은 고양이의 건조한 말투와 절묘하게 겹친다. 마치 점 하나로 그림을 완성하는 서예가의 획처럼, 소세키의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던져지고, 그 여백 속에서 풍자가 살아난다.
유머는 이 문장의 핵심적 무기다. 고양이는 스스로를 낮추며 독자를 웃게 만든다. “쥐는 결코 잡지 않는다”라는 말은 사실상 고양이의 존재 이유를 무너뜨린다.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순간, 독자는 피식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아이러니다. 고양이의 무능은, 사실 근대 일본 지식인의 무력감을 비춘 거울이다. 문장은 웃음을 주지만, 웃음 뒤에 씁쓸함을 남긴다. 이 이중적 효과가 소세키의 문장 미학이다.
소세키는 대체로 짧은 문장을 즐겨 썼다. 고양이의 단정적인 말투, “싫다”, “잡지 않는다”, “무명으로 살겠다.” 등은 그 자체로 명쾌하다. 그러나 명쾌함 속에는 항상 비꼬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 문장은 단호하지만, 그 단호함은 무력감에서 나온다. 이는 소세키 문장이 가진 아이러니의 리듬이다. 직설과 허무가 뒤섞여, 읽는 이를 미묘하게 흔든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적 전략은 ‘목소리’에 있다. 소세키는 무명의 고양이에게 인간 사회를 풍자할 권리를 부여한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 인간을 비웃을 때, 문장은 더욱 자유롭고 대담해진다. 고양이의 시선은 지극히 사소하고, 때로는 유치하다. 그러나 바로 그 사소함이 사회의 허위를 드러낸다. 이는 문학적 서술의 ‘전도’다. 고양이는 자기 이름조차 없지만, 무명의 문장이 오히려 권력 있는 언어보다 더 힘을 얻는다.
또한, 소세키 문장은 ‘소리’로도 읽힌다. 일본어 원문에서 고양이의 말투는 간결하고, 마치 콧방귀를 뀌듯 짧게 끊긴다. 이 리듬은 독자에게 농담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불가피한 체념의 리듬이기도 하다. 번역을 통해 읽어도 그 여운은 살아 있다. 번역자는 “그럭저럭”이라는 말을 선택했다. 그럭저럭, 이 두 음절은 한숨 같으면서도, 묘하게 위안이 된다. 소세키의 미학은 바로 이런 단어 선택의 힘에서 비롯된다.
작품의 문체적 특성은 또 다른 전복적 효과를 낳는다. 보통 소설은 서사적 긴장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사건이 아닌 문장 자체가 독자를 잡아끈다. “나는 살이 찌지 않았다”라는 평범한 진술이, 맥락 속에서 사회 비판이 된다. 문장은 사실과 농담, 자기비하와 풍자를 교묘하게 섞으며 독자를 미끄럽게 이끈다. 그 미끄러짐 속에서 독자는 어느새 웃으면서도 불편함을 느낀다.
소세키의 문체를 오늘날의 언어에 빗대자면, 고양이의 서술은 일종의 ‘트위터적 문체’에 가깝다. 짧고 단호하며, 농담처럼 던져지지만, 그 뒤에 사회적 의미가 붙는다. 그러나 그 농담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한 줄의 문장이 한 시대의 초상을 비춘다. 바로 이것이 소세키 문학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다.
결국, 소세키가 창조한 고양이의 목소리는 문학사적 의미와 더불어 미학적 실험이기도 하다. ‘나는 이름이 없다’는 선언은, 언어가 스스로의 권위를 해체하는 순간이다. 문장은 자기의 무력함을 드러내면서도, 바로 그 무력함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고양이의 무명은 문장의 자유이고, 문장의 자유는 곧 독자의 자유다.
오늘날 우리가 소세키의 문장을 다시 읽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날렵하고, 여전히 유머러스하며, 여전히 아이러니하다. 고양이의 짧은 자기 고백은 단순히 웃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름 없이, 쥐도 못 잡고,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것이 과연 패배일까? 아니면 가장 인간적인 해방일까? 소세키의 문장은 여전히 우리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다. 웃으며 읽다 보면, 어느새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얼굴과 마주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1905년에 발표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 이정표와 같은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 이정표는 장엄한 기념비가 아니라, 마당 구석에서 뒹굴며 한숨을 쉬는 고양이의 발자국처럼 보잘것없다. 소세키는 그 보잘것없음 속에 시대의 진실을 담았다. 고양이는 이름조차 없지만, 오히려 그 무명이야말로 사회의 허위를 비추는 힘을 가진다.
소세키 자신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히 서구화된 일본 사회 속에서 늘 이방인이었다. 그는 1867년,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릴 무렵 태어나 메이지 일본을 청년으로 맞았다. 런던 유학 시절 서구 문명을 직접 경험하면서, 일본이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근대화’의 실체를 낱낱이 본다. 전깃불, 철도, 빅벤의 시계탑이 상징하는 근대의 빛은 그를 설레게 하기보다는 철저한 소외감을 안겼다. 그 소외는 이후 그의 문학 전반을 관통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속 무명 고양이는 바로 이 소외된 자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한다.
작품 속에서 고양이는 구샤미 선생의 집을 중심으로 인간들을 관찰한다. 구샤미 선생은 한심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소세키가 자신을 풍자적으로 투영한 인물이다. 선생 주변에는 온갖 인물들이 드나든다. 허세 가득한 학자, 출세 지향적인 신사, 허영에 들뜬 부인들. 고양이는 그들을 구석에서 조용히 바라보며 속으로 평가한다. 그 평가는 독설이자 풍자다. 그러나 동시에 고양이는 자기 자신도 비하한다. 쥐도 못 잡는 무능함을 스스로 인정하며, 무명으로 살겠다고 선언한다.
인간을 조롱하면서도 스스로를 낮추는, 이 이중적 태도가 작품을 독특하게 만든다. 풍자는 대개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 그러나 소세키의 풍자는 고양이의 낮은 시선에서 이루어진다. 낮은 곳에서 위를 바라보는 풍자, 그리고 그 와중에 자기 자신을 함께 비하하는 풍자. 이 자기 비하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사실은 인간 사회 전체를 향한 냉혹한 비판이다.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통해 일본 문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전의 일본 소설은 개인적 서정이나 영웅적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미시적 장면과 인간의 하찮은 허영심을 날카롭게 잡아냈다. 고양이는 주인공이 아니라, 사실상 카메라다.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 사회는 우스꽝스럽고 위선적이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일본 근대화의 허위를 드러내는 사회적 풍자가 된다.
나쓰메 소세키는 짧은 생을 살았다. 1916년, 불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 이유는, 그의 고양이가 단지 일본 근대의 지식인 사회를 풍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쥐를 잡지 못하는 무능한 고양이들이다. 그러나 그 무능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이름 없이, 결핍 속에서, 그러나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그래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단순한 풍자소설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한 선언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쥐를 잡지 못해도, 이름이 없어도, 우리는 살아간다. 그럭저럭이라는 말은 패배가 아니라 해방이다. 무명 고양이의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이름이 없어도 그럭저럭 잘 지낸다.” 이 목소리는 지금도 우리 귀에 맴돌며, 오늘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이름과 성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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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