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손진숙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 가로에는 은행나무가 죽 늘어서 있다. 이맘때면 노란 은행이 보도에 숱하게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아왔다.
현기증이 일어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는 딸아이와 통화하는 중에 은행이 혈액 순환 촉진에 좋다는 말을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은행 습득 작전에 나섰다.
면장갑과 비닐봉지를 챙겨 들고 은행나무 길로 갔다. 오가며 보았던 것과는 달리 은행은 별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차도에 굴러 떨어진 은행 몇 알을 주우려고 교통신호가 바뀌어 지나는 차량이 멎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내가 끼니를 잇기 위해 폐지나 고철을 주우려고 구석진 데를 살피는 사람 같기도 하고, 주전부리를 하기 위해 살구나 감을 주우려고 주인의 눈을 피하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 같기도 했다.
가로수 아래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잔디에 숨어 있는 은행을 보물찾기라도 하는 듯이 찾고 있을 때 건장한 남자가 내 곁을 지나갔다. 경쾌한 등산복 차림이었다. 개의치 않고 보물찾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앞쪽에서 ‘탁’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저만큼 멀어져 간 남자가 돌아서서 내 쪽을 보고 서 있었다.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손짓으로 은행나무 밑을 가리키고는 돌아섰다.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노란 은행 알이 질번하게 떨어져 있었다.
알았다는 고개를 꾸벅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생전 모르는 사람이 은행을 줍는 나를 위해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이다. 발길질당했을 은행나무에게는 무척 미안한 노릇이었지만 나로서는 매우 고마웠다. 그 마음 헤아린다는 듯 은행잎 한 장이 내 어깨를 살며시 치고 땅에 내려앉았다.
태풍이 불다 그친 다음날 아침이었다. 창밖을 보니 먹장구름이 떠다니며 태양을 희롱하고 있었다. 문득 어젯밤 비바람에 은행이 많이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은행나무 밑은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맥이 풀려 돌아오면서 보니 은행나무 밑동에 환경미화원이 쓰는 공공용 쓰레기봉투가 기대어 있었다. 그 공공용 쓰레기봉투 속에 은행 두어 알이 눈에 띄었다. 손으로 헤집으니 은행잎 석건 셀 수 없이 많은 은행이 담겨 있는 게 아닌가. 뜻밖에 쓰레기를 뒤지는 넝마주이가 되고 말았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었다.
은행은 줍는데서 끝나지 않았다. 껍질을 벗기는 일이 만만찮았다. 우선 모양이 둥글고 작아 손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 알 한 알 주울 때마다 씨껍질을 벗겨서 봉지에 넣었지만 그게 수월치 않아 껍질째 봉지에 담았다.
아파트 화단 옆 수돗가에서 고무대야에 은행을 붓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말랑하게 손에 닿는 감촉이 미묘했다. 보드레한 아이의 옷을 벗기고 살을 만지는 기분이 그럴까. 겉옷을 벗겨내면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하고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경비 아저씨가 지나다가 말을 붙였다.
“은행 어디서 주웠어요?”
“요 근방에서요.”
“한 되가 넘겠네요.”
“좀 드릴까요?
“아니요, 주워서 씻느라 힘든데.”
“…….”
“은행은 냄새가 고약하고 독성까지 있어서….”
혼잣말처럼 뇌며 경비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행을 맨살로 접촉하면 위험하다는 걸 하루가 지나서야 알았다. 자신을 보호해 주는 옷을 벗긴 데 대한 보복이었는지, 내 손바닥 껍질을 마구 벗겨 멋대로 지도를 그려 놓았다. 은행의 노란색 외피는 악취를 풍기는 독성 물질이 있어 피부에 닿으면 피부염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였다.
악취의 원인은 은행나무의 씨앗을 동물이나 곤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은행을 줍고 껍질을 벗기고 씻으면서 냄새와도 정들어 버렸는지 그 일들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소나무 껍질처럼 벗겨진 손바닥을 보면서도 오히려 기특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깨끗이 씻은 은행을 소쿠리에 담아 볕 잘 드는 거실에 널어놓고 말렸다. 청명한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들거렸다. 양 면으로 나뉘어 갸름하고 동그랗게 빚어진 모양이 대부분이고, 어쩌다가 세 면을 이룬 모양도 있다. 밤하늘에 흩어져 빛나던 별들이 소쿠리에 모여들어 도란도란 속삭였다. 별들은 내 마음에서도 소곤소곤 속닥였다. 별일 없을 거라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요 며칠 동안 나는 은행만 주운 것이 아니었다. 덤으로 주운 소득이 쏠쏠했다. 이번 주말에 딸아이가 온다는 전갈이다. 반듯하게 생긴 놈으로 골라 손에 들려 보내야겠다.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바람이 거칠어진 내 손을 감싼다.
《경주문학》56호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