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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호 십자가의 참 의미를 위하여
값싼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장에서 팔리는 값싼 물건처럼 팔려 나간다는 의미이다. 침례와 죄의 용서가 너무나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되었으며,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 회개하라는 호소 대신에,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무책임하게 난발되고 있다.
물론 은혜에는 어떠한 댓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은혜에 대한 댓가가 십자가에서 이미 지불되었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위하여 무한한 댓가가 치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줄 수 있기 위해서 치루어진 값은 결코 헐값이 아니었다. 은혜를 위해서 무한한 댓가가 지불되었으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 지불되었다.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치루어진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소중하고 값비싼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은혜를 매우 값싸게 취급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단순히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능력과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죄의 용서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께서 베푸신 용서하시는 은혜를 정신적으로 인정하고 동의하기만 하면, 은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대한 매우 위험한 오해이다. 은혜에 대해서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값싼 은혜로 거침없이 덮어씌우기 때문에,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상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솟아 나올 수 없으며, 가난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지도 않게 된다.
만일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이 올바른 진리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은혜가 값싼 것이라면, 인생 살이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바대로 살아도 된다고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비싸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은혜가 그대를 덮어주고 있으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대는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말은 율법주의자들이 하는 말이다. 그대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여전히 죗되고 이기적인 생애를 살 수 밖에 없으므로, 거룩한 생애에 대한 소망을 버려라. 은혜가 항상 그대에게 베풀어져 있기 때문에 그대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한, 그대의 생애가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을 덮어주고 있으므로, 그대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 어차피, 그대는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구태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려고 애쓰지 말라.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은혜가 그대를 구원하기에 넉넉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오는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극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애를 세상과 구별짓기 위해서 세상을 전적으로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써 베풀어진 은혜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은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값싼 은혜를 믿는다면, 만일 그대가 생명력이 없는 거짓 은혜를 믿는다면, 그대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기면서 살되, 세상보다는 조금 높은 표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라고 가르치라. 하나님의 피묻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살기 보다는, 세상을 위해서 생애를 바치라고 말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하였으므로, 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한 감정적 확신 속에서 안주할 수 있도록 만들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애쓰는 대신에, 그분의 은혜가 주는 위로와 위안을 즐기라고 말해라. 바로 그것이 값싼 은혜가 의미하는 바가 아닌가? 죄를 버리고 통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어도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부르면 의롭다고 여기는 은혜를 가리켜서 값싼 은혜라고 부르고 있지 않는가? 진정으로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그대로 품고 있는 죄인에게도 은혜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가르치는 것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아닌가? 물론, 값싼 은혜도 죄의 용서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죄의 덫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지시킴으로써, 마음 속에 죄와 이기심을 붙잡고 있는 죄인들 위에 흰색 보자기를 뒤집어 씌워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의인으로 위조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각종 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본인이다. 값싼 은혜는, 참된 회개없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확신과 행습의 개혁없이도 침례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아무런 고백도 없이 성만찬 예식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값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은혜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가치를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는 은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것을 진정으로 사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게 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은혜의 참된 가치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 마저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된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값진 진주와 같은 것이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는 그리스도인 역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이다. “또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5~46.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일 눈이 그대를 넘어지게 만들면, 그 눈을 뽑아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말한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9. 값비싼 은혜는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받기 위해서 희생과 극기의 댓가를 지불하게 된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놓고서 자신을 따르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이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헐값으로 팔아넘기려고 하는가? 누가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적당하게 슬쩍 사용하려고 하는가? 값비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라고 호소하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두드리고 도전해야 열리는 문이다. 이와 같이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물론, 우리의 극기와 노력과 희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지만, 은혜에는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댓가로 지불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험한 세상에서 오해와 희생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에, 은혜는 매우 값비싼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은혜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위선이나 가식이 없는 진실한 것으로 꼴지울 수 있다. 은혜는 죄를 죄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값진 것이며, 또한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버리고 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에 진짜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그 댓가로 지불하였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너희는 값으로 산 바 되었으니”라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값”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치루신 값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값싼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온 우주의 왕인 하나님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은혜를 어찌 값싸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치루신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댓가를 깊이 명상해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세우신 그리스도 교회는 마땅히 세속으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 은혜를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는 자가 누군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그 목적을 명상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놀라운 희생을 통하여 이룩된 값비싼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은혜의 초청장을 보내고 있다.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는 산산이 깨어진 마음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영혼에게 용서의 약속을 제공한다. 은혜는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고 가난하게 만듦으로써, 그리스도의 초청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보면서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가 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은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을 따르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호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냐하면 예수께서“나의 멍에는 쉬우며,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려고 하는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뒤를 따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멍에와 짐이 그대에게 가벼운 것이 될 때까지, 그대를 위하여 치루어진 그분의 희생과 봉사의 생애를 명상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평화를 마음에 담고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으로서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이고, 하늘 시민으로서의 확신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물들은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복음이 아니겠는가?
2.유다의 수기
가장 유망한 제자가 가지고 있던 약점
성경은 나를 한 때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똑똑했던 “유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나, 유다를 가장 유망한 복음전도자로 생애하다가, 하늘에 갈 수 있었던 사람의 생애가 가장 슬픈 종말을 고하게 되는 대표적 예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마지막 여행 전에 죽었더라면, 아마도 사람들은 나를 열 두 제자 중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제자로 기억하였을 것이고, 또한 내가 일찍 죽은 것에 대하여 매우 아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성격이 우뢰처럼 급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처럼 무식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의 음흉한 본성과 계획을 마지막 유월절 만찬 때에 적나라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는 처음부터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억울한 말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평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설명하는 나의 한맺힌 이야기를 듣고 나면 여러분들 중의 꽤 많은 분들이 여러분 자신과 나 사이에 많은 유사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비록 내가 결국에 가서는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나게 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나보다 휠씬 나쁜 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마리아인 마을에 들렸을 때,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자,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말하는 요한의 모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요한은 매우 급하고 폭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면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내게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나는 돈에 대하여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으로 제자가 되었다거나 돈에 욕심이 생겨서 제자가 되었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좋아했으며, 그분과 함께 일하여 복음 사업이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게 될 때에 그 영광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어 갖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면들은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나의 차이점은, 그들은 자신의 약점과 죄를 포기하고 돌이켰지만, 나는 한가지 죄를 끝까지 고집하는 바람에 그 죄의 노예가 되었고 결국에는 자신을 사단에게 완전히 맡겨버리게 되는 지점에까지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수많은 유대 관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의 사업을 외면하고 박해했을 때에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자원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 곁을 3년 반동안이나 지켰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제자가 된 것에 반하여,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유익을 기대하면서 스스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처음부터 사단에 사로 잡혔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대한 애정
나는 주님께서 소경들과 절름발이와 문둥병자들을 치료하시는 기적을 보면서 감격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환자들을 업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내려 놓은 광경을 보면서 나도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적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나 역시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이 내가 일찌기 들었던 어떤 사람의 가르침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래에 있을 나의 배반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런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열 둘 중의 한 자리를 나에게 내주셨으며, 나에게도 다른 제자들처럼 복음 사업의 한 모퉁이를 담당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 쫓을 능력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내게도 다른 열 한 제자들과 동일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랑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완전히 내 자신을 복종시키는 지점까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섬기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세속적인 야망과 돈에 대한 탐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내 자신의 성품과 생애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진리의 요구에 내 자신을 100% 굴복시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잘못
나의 남다른 판단력과 예리한 비평 때문에 제자들도 나를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가장 가능성이 많은 제자였으며, 다른 제자들도 이 사실을 마음 속으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의견이 예수님의 의견보다 옳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분의 사업과 방법에 대해서 때때로 비평하고 비난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뛰어난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착하고 영적인 말씀은 잘 나누어 주시지만, 사업을 효과적으로 하는 면에 있어서는 매우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아가지고는 결코 장래의 번영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분별없이 바쁘기만 하였으며, 요한은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에만 매달렸습니다. 나는 이 중요한 사업을 그런 사람들의 손에 맡겨 둘 수 없었습니다.
나의 잘못은,내 자신의 성품의 약점을 깊이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의 약점을 아시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심으로써, 이기심 없는 봉사정신을 기르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탐욕적인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버리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커다란 손해이며, 예수님의 사업에도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강력한 유대 왕국의 건설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영적 은혜의 왕국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설교를 싫어했습니다. 특별히 그분께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 수 없는 좁은 길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는 정말 귀를 막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설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듯 했습니다. 더구나 부자가 하늘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어렵다는 말씀을 공공연히 하심으로써, 부자들이 우리의 사업에 대하여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볼 때는 정말 참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한 아이의 점심 도시락으로 5천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는 광경을 본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자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실 때는 정말 그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막 8:9).
한번은 부자 법관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에 관한 자문을 구했는데, 예수께서는 그 부자 법관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의 정신을 지적하면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사업에 가장 중요한 후원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돌려 보냈을 때에는 정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복음 사업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심으로써 좀처럼 잡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사람에게 좀더 부드럽게 말씀해 주시기만 했어도, 그 사람은 많은 헌금을 냈을 것이고 사업은 보다 빠르게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상황 판단에 있어서는 내가 예수님보다 정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나귀의 등에 타시고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 가시던 날 이후로 나는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뇌리 속에서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지만, 예수께서는 세속적인 이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영적 성장과 영적 생명에 대해서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엉뚱한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분에 대하여 가장 큰 실망을 하게 되었던 것은, 예수께서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때입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요 6:53). 이러한 말씀을 듣고 나는 생각하기를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는 어떤 명예나 어떤 직위도 얻기는 커녕, 결국에는 온갖 핍박과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죄에 대한 고집
내 입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쉽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확신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에, 나는 예수님의 사업에 나타나는 온갖 어려움들을 나의 불만을 표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또한 주님의 사업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가기 위하여 장차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라는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논쟁과 불만의 정신이 어디서부터 오고 있는지 몰랐지만, 예수께서는 사단이 나를 통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악한 감화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경고해 주셨습니다(요 6:70). 이러한 경고의 말씀은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며, 나의 불만을 좀더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포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 때에 나타내신 태도와 말씀은 정말 내 마음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 날, 초청받지도 않은 마리아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 당시 시가로 삼백 데나리온, 현재 시가로 2만 5천불이나 되는 향유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일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즉시로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라는 말로 마리아와 예수님을 동시에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막 14:9)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의 정당한 항의에 대하여 예수께서 오히려 그런 식으로 나를 책망하시자, 나의 상처받은 자존심은 복수의 원한으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에도 복수의 칼을 마음에 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사단은 저항하지 않고 정복하지 못한 부패의 요소들을 무서운 원한과 보복의 정신으로 키워간답니다.
그 때까지만해도 아직 나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나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유월절 만찬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커져가고 있는 보복의 정신을 아시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유월절 만찬에도 나를 포함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에 나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마지막 사랑을 거절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깊숙히 숨겨진 나의 계획을 폭로하심으로써 돌이킬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네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요 13:27. 그러나 나는 예수께서 친히 씻겨주신 두 발을 이용해서 그분을 팔아넘기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판 이유
내가 돈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은전 30냥이 탐나서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 속에 떠오른 다음과 같은 일련의 논리적 생각들이 나의 행동을 결정시켰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얼마 전부터 가끔씩 자신은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어차피 돌아가실 것이라면, 내가 돈을 좀 받고 그분을 팔아넘긴다고해서 그분의 예정된 죽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쟎는가? 어쩌면 내가 그 분을 관원들의 손에 팔아 넘김으로써, 그분께서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게 되면, 오히려 온 유대인들, 심지어는 바리새인들까지도 예수님의 능력 앞에 굴복할 것이 아닌가?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고 말할 때, 예수께서는 결코 자신의 몸이 폭도들의 손에 붙잡히도록 가만히 계시지 않을거야! 이미 과거에도 여러 차례 관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예수님은 피신하셨으므로 이번에도 성공적으로 멋있게 몸을 피하실거야.
“내가 그분을 팔아넘기는 목적은 그분을 배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사업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야! 모든 것이 내가 계획한대로 되기만 하면, 예수께서도 앞으로는 나를 감사와 존경으로 대하게 될 것이야.” 이것이 나의 목적이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줌으로써,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는 단지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신성을 시험해 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참으로 메시야라면, 이번 기회에 위대한 기적을 통하여 자신을 구원한 다음에 백성들 앞에 자신을 왕으로 선언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분이 왕이 되면, 나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이 끌고 가는대로 조용히 따라가시는 뒷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두려움으로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권세자들의 물음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장면과,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모든 욕설과 조롱에도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서계신 예수님을 보면서 나는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 잡혔습니다. 재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자, 나는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목이 잠긴 음성으로 “그는 무죄합니다. 오! 가야바여 그를 아끼소서”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광장 가운데로 뛰어 갔습니다.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은 돌발적이고 광적인 내 모습을 보면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놀란 관중을 헤치고 나가는 나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나는 재판석으로 달려가서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주님을 판 값으로 받았던 은전을 팽개쳤습니다. 가야바의 예복을 붙잡고 예수를 놓아주도록 간청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부르짖었으나, 대제사장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조롱하면서 대답하였습니다(마 27:4).
나는 다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면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자복은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부인한 깊고도 서러운 회개의 심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죄에 대한 두려움과 앞으로 내게 부어질 무서운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발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책망하는 대신에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경탄과 함께 그분의 관용에 대해서 조그만 소리로 중얼 거렸습니다. 나는 나의 간청이 너무나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라고 부르짖으면서 절망 중에 재판장에서 뛰쳐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스스로 목을 메기로 작정했습니다. 바로 그 날 늦게 폭도들과 악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십자가에 못박을 장소로 끌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의 야유와 조롱하는 소리가 멈추어졌습니다. 그들은 으슥한 곳의 나무에 목을 메어서 축 늘어져 있는 나의 시체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잠시 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범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벌써 이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늦게 배운 교훈
나의 인생 전체를 잃어버린 후에 깨달은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에 그 음성에 굴복하는 결정을 뒤로 미루는 자는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다른 제자들과 동일한 기회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회와 시간을 내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소모했습니다.
나는 진리와 세상을 함께 사랑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좋아했지만, 돈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를 신뢰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양심에 조용하게 돌이킬 것을 호소했지만, 나는 나의 인간적인 견해와 빗나간 감정을 고집했습니다. 구세주의 변화시키는 은혜를 계속해서 거절했기 때문에 탐욕과 이기적인 정신이 영혼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결국 그 뿌리가 내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나는 오늘날에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음을 압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이 자신의 인간적 견해를 버리도록 요구할 경우에는 싫어하면서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진리가 잘못된 사상과 생활에 변화를 촉구할 때에는 그 요구를 버리거나 무시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유다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사업을 하면서 세속적인 이익도 조금 챙기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사업을 이용해서 자기 만족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과, 성경 말씀의 분명한 요구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않는 사람들은 유다가 걸었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나도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며, 진리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자신을 철저하게 굴복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Veggie Life에서 발췌
미국 여성들이 3대 사망 요인은, 첫째가 심장질환이고, 둘째가 폐암이며, 그리고 세번째가 유방암이다. 선진국의 여성들 중 50% 이상은 자신도 유방암에 걸릴 것이라는 공포감을 가지고 살고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자신을 유방암으로부터 지키는 비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엘리스의 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녀는 48세가 되는 생일 파티를 한 3일 후에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그녀가 암 선고를 받는 순간, 몇 해 전에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이모님 생각이 났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인생은 건강의 원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정상보다 높은 체중을 오래 동안 방치해 두었으며, 운동량도 거의 없었고, 창문도 없는 사무실 안에서의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이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유방암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였다. 때때로 채식으로 식사를 하고, 우유 대신에 콩우유를 먹으면서 건강한 식생활로 개선하기를 원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건강에 대한 여러가지 떠도는 정보들은 오히려 자신을 혼돈스럽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유방암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통하여 유방암으로 접근해 가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미국에서만 매해 179,000명의 여성들이 유방암 선고를 받고 있다. 어떻게 하면 유방암을 피할 수 있을까? 유방암에 대하여 오랫 동안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채식을 권장하고 있다. 채식에도 여러가지 유형이 있는데, 어떤 채식이 가장 이상적인 채식인가? 세인트 헬레나 병원의 멕도겔 의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채식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이 먹는 것은 콜라와 기름에 쩔은 감자칩이 고작이다.”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정크 푸드 채식주의자(junk food vegetarian)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유방암을 예방하는 방법으로서 채식주의를 고려할 때, 자신이 어떤 채식주의를 선택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채식주의에도 여러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채식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유형들로 분류된다.
1. vegan: 식물만을 먹는 채식주의. 과일, 채소, 곡물, 콩과 식물, 너트와 씨앗류를 섭취하는 채식주의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들에게 허락하셨던 식생활 패턴을 말한다. 건강과 치료를 위한 가장 바람직한 식생활로 평가된다.
2. lacto-vegetarian: 1번에 우유와 치즈 및 유제품을 추가한 채식 유형
3. lacto-ovo vegetarian: 2번에 계란을 추가한 채식 유형
비록 채식을 한다고 할지라도, 가공되었거나 정제된 식품(흰밀가루, 흰쌀, 흰설탕, 옥수수칩, 흰빵, 치즈, 아이스크림, 콜라, 화학 조미료 등)을 많이 섭취하면, 유방암의 발병 확률을 낮추기 어렵다. 이제부터 항 유방암 식생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많은 양의 전분
세인트 헬레나 병원의 멕도겔 의사는 가장 효과적으로 유방암의 발병률을 저하시킬 수 있는 식사법으로 전분을 위조로 한 식사법을 추천한다. 그러므로 통밀, 현미, 보리, 옥수수, 오우트, 호밀(rye)을 많이 섭취해야 하며, 뿌리류에서는 당근, 비트, 고구마, 그리고 콩과 식물에서는 콩과 완두콩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식품을 통해서 충분한 칼로리와 비타민과 광물질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방암과 싸우는 영양소들을 얻을 수 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신선한 과일과 채소에는 항산화제와 항암성분들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1995년도에 발행된 미국 국립 암협회의 져널에는 날마다 충분한 양의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는 사람들에게 유방암이 발병될 확률은 육식을 하는 사람들의 발병률보다 46%가 낮다고 발표하였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에는 발암물질의 공격을 받은 세포의 상처를 아물게 도와주는 놀라운 항산화제가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또한 “천연계의 약국”이라고 불리우는 여러 종류의 피토 케미칼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고 면역시스템을 강화시켜 준다.
억제해야 할 지방의 섭취량
고지방식이 유방암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근에 발행된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 지에서는 지방의 섭취량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지방을 섭취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는 연구를 발표하였다. 모든 종류의 동물성 기름을 금해야 하며, 식물성 지방일지라도 옥수수 기름이나 safflower 기름과 같이 액체 상태로 된 기름 속에 함유되어 있는 다량의 omega-6 지방산은 암의 발병률을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식물성 지방에서 얻을 수 있는 omega-6 지방산과 flaxseed(아마씨)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omega-3 지방산은 암의 발병률을 낮추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지방일지라도 뜨거운 불에 튀길 경우에는 지방의 성격이 변질되기 때문에 오히려 암의 발병률을 높여줄 수 있다.
최근에 스웨덴에서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올리브 기름에 함유되어 있는 지방 성분은 유방암의 발병률을 50% 가량 낮추어주면, 이와 반대로 마가린이나 버터에 함유되어 있는 지방 성분(trans-fatty acid)과 식물성 기름이라고 할지라도 식품의 label에 “partially hydrogenated vegetable oil”이라고 씌어 있는 식품은 유방암의 발병률을 40% 가량 높여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올리브 기름을 많이 섭취하면 유방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올리브 기름이 올바른 채식 생활과 접목되어 사용될 경우에 한해서 유방암의 발병률이 낮추어 질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기름일지라도, 소량으로 제한되고 억제되어야만 한다. 특별히 천연 상태 그대로가 아닌 가공 정제된 기름(참기름, 옥수수 기름, 올리브 기름 등)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인트 헬레나 병원의 멕도겔 의사는 “만일 당신이 유방암에 걸렸다면, 좋은 기름이든지 나쁜 기름이든지 간에 섭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권고 한다. 비록 지금은 건강하지만, 앞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유방암을 예방하기 원한다면, 모든 동물성 지방을 금하고 너트, 씨앗류, 올리브, 아보카도와 같은 식물성 지방을 매우 소량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
충분히 섭취해야 할 섬유질
양질의 섬유질은 가공하지 신선한 과일과 채소에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다. 특별히, 수용성 섬유질(soluble fiber)은 에스트로겐이 인체에 과다하게 흡수되는 것을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나치게 많은 에스트로겐은 유방암의 발병과 관련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1997년, Nutrition지에 발표된 논문은 날마다 반컵 정도의 밀기울(wheat bran) 씨리얼을 섭취하면 혈중 에스트로겐의 양을 낮출 수 있다고 하였다.
콩과 유방암
콩, 두부, 콩우유와 같은 콩류에는 특정한 종류의 피토케미칼이 함유되어 있다. 특히, 콩에 함유되어 있는 이소플레이본은 유방암의 발병률을 낮추어 주며,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게니스타인은 강력한 에스로로겐의 활동을 둔화시켜 준다. 또한 게니스타인은 암의 성장과 관련있는 엔자임의 활동을 억제해 준다.
멕도겔 의사는 “콩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더 많이 진행되어야 하지만, 콩 속에 들어 있는 피토에스트로겐 물질은 유방암에 대해서 염려하는 여성들에게 유익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콩 기름이나 콩가루처럼 농축된 식품은 오히려 유방암에 해로울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가공되거나 정제된 콩 식품에 대해서는 의학적 논쟁이 진쟁되고 있으므로, 천연 상태 그대로의 콩을 섭취하는 것이 지금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플랙씨드와 유방암
콩처럼 플랙씨드(아마씨)에도 피토에스트로겐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또한 플랙씨드에는 유방암의 발병률을 낮추어 주는 섬유질, omega-3 지방산, 그리고 각종 피토케미칼이 가득 차 있다.
플랙씨드는 지방의 섭취량을 최소로 낮춘 저지방식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루에 한 숫가락 정도 플랙씨드를 섭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유방암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
식생활과 암의 발전 속도: 올바른 채식 생활이 유방암의 예방과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암세포가 발생된 이후부터 유방에 덩어리(lump)가 생길 때까지의 기간은 약 10년 정도 소요된다. 그러므로 이미 암세포가 성장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올바른 채식생활을 하면 유방에 덩어리(lump)가 생길 때까지의 암의 발전속도가 15~20년으로 연장될 수 있다.
유방암과 운동: 날마다 30분 이상씩 운동해야 한다. 운동은 유방암의 발병률을 낮추어 준다. 노르웨이에서 발표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일주일에 4~5시간 이상 운동하는 여성들은 운동을 하지 않는 여성들보다 유방암의 발병률이 50% 낮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기적인 운동은 혈중 에스트로겐의 양을 낮추어 주며, 면역시스템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유방암과 태양빛: 지난해 11월, 미국 유방암 협회에서는 태양빛에 의해서 합성되는 비타민 D는 유방암의 발병률을 낮추어 줄 수 있는데, 지난 16년 동안 5천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태양빛을 많이 쬐는 여성들은 그렇지 못한 여성들보다 유방암 발병률이 30~40% 낮았다고 발표하였다. 하루에 10~15분 이상 동안 태양빛을 받으면 충분한 비타민 D를 얻을 수 있다.
유방암과 혈중 에스토로겐의 양: 표백제나 제초제, 그리고 공해물질은 혈중 에스트로겐의 양을 불필요하게 향상시킨다.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에스트로겐이 유방암의 발병률을 높이는 가장 큰 원인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므로 각종 화학물질의 증기를 흡입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도시의 수도물에 함유되어 있는 화학물질도 혈중 에스트로겐 수치를 높여주므로 여과된 물을 마시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여성들이 에스트로겐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암 종양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약 50%의 유방암 환자들은 에스트로겐에 의해서 암의 성장이 자극되고 촉진된다. 이러한 여성들은 홀몬 대체 치료(HRT)를 받지 말아야만 한다.
유방암과 몸무게: 최근에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선진국가의 55% 국민들은 체중이 정상보다 높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무서운 재앙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체중초과는 각종 질병의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체중이 정상보다 높으면, 유방암의 발병률도 높아진다. 체중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혈중 에스트로겐 수치도 높아지는데, 그 이유는 지방에서 생산되는 에스트로겐이 혈액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에 의하면, 18살 이후로 45 파운드(23Kg)이상 몸무게가 증가된 갱년기 이후의 여성은 동일한 기간 동안 5파운드(2.5Kg) 정도 몸무게가 증가된 여성들보다 더 많이 유방암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방암과 술: 유방암을 피하기 원하는 여성은 반드시 술을 금해야만 한다. 술은 유방암의 발생률을 높여주는데, 그 이유는 알콜 성분은 혈중 에스트로겐의 수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VeggiLife에서 발췌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3가지 중요 요인은 혈압과 흡연, 그리고 콜레스테롤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금연과 함께 적당하게 운동을 하면서 식탁의 메뉴를 효과적으로 바꾼다면 심장마비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들의 식탁에서 육식이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됨에 따라서 현대인들 가운데 50% 이상은 정상보다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콜레스테롤 수치가 200 mg/dl. 이하를 정상으로 간주하지만, 플래밍햄 심장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콜레스테롤 수치를 150 mg/dl. 정도로 유지할 때에 심장마비의 확률이 거의 0에 가깝게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도 콜레스테롤 수치를 정상 수치로 유지하하는 것은 심장마비에 대한 예방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전반적인 건강에 매우 커다란 유익을 가져다 준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천연계 속에 인체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유지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콜레스테롤 강하제들을 마련해 두셨다. 식사를 균형진 채식으로 바꾸고, 다음에 소개하는 100% 천연 콜레스테롤 강하제를 섭취해 보라.
용해성 섬유질
하루에 사과 한 개를 먹고, 한 컵의 랜틸(lentils) 콩을 섞어서 지은 현미 밥을 먹으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질 뿐 아니라, HDL과 LDL을 최적의 수준으로 조절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식품에는 용해성 섬유질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른 콩, 완두콩, 보리, 오트, 감귤류, 홍당무 등에 함유되어 있는 용해성 섬유질은 콜레스테롤 강하제로 놀라운 역할을 한다.
불포화 지방
모든 종류의 동물성 기름은 포화성 지방이기 때문에 인체에 해롭지만, 지방이라고해서 모두 인체에 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불포화 지방은 체내에서 오히려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는 역할 을 한다. 올리브 기름, 카놀라 기름, 너트, 아보카도, 올리브, 알몬드, 땅콩, 피칸, 마카다미아, 캐슈 등은 양질의 불포화 지방을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진한 녹색잎의 야채들, 플랙씨드, 호도와 같은 천연 식품에 함유되어 있는 오메가-3 지방산은 혈중 지방을 낮추어 주고, 피가 뭉치는 것을 방지해 준다.
미국 심장학회에서는 콜레스테롤로 인한 심장마비를 방지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식사를 추천하고 있다. “동물성 기름과 같은 모든 포화성 기름을 천연적인 불포화성 기름으로 대체하십시요.”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비록 불포화성 기름일지라도, 그 양을 절제해서 조금씩 섭취해야 하며, 요리를 할 때에 뜨거운 불에 튀기거나 볶으면 지방의 성질이 인체에 유해한 것으로 바뀌거나 변질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천연 상태 그대로 섭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피토에스트로겐
식물 속에 담겨져 있는 어떤 성분들은 인체의 건강에 놀라운 유익을 준다. 래드 클로바, 알파파, 그리고 콩 종류에 함유되어 있는 피토에스트로겐은 항암 작용을 할 뿐 아니라, 인체의 건강 유지에 중요한 도움을 준다. 콩에 함유되어 있는 이소플라본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절해주는 홀몬과 같은 작용을 한다.
가장 강력한 천연 콜레스테롤 강하제 10가지
메주 콩(soy), 사과, 오우트(oat), 일반 콩(beans), 보리, 호도, 플랙씨드(flaxseed), 그린 차(green tea), 마늘과 양파, 알몬드
문: 안녕하십니까? 매달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에 실리는 건강과 치료에 대한 매우 유익한 기사들을 읽고 온 가정이 채식으로 식생활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고기를 전혀 먹지 않으면 영양이 부족해서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들리는 여러가지 말들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부디, 올바른 건강 정보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답: 먼저,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올바른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귀하가 보내주신 질문에 대하여 답변으로 맥 더글라스 의사의 견해를 보내드리오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인체에 꼭 필요한 필수 비타민 13가지 중에서 11가지는 식물에 의해서 만들어 지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완전 채식을 할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나머지 2종류인데, 그 나머지 2종류는 비타민 B12와 비타민 D입니다. 그러나 비타민 B12 역시 특정한 해초류(algae)나 식물 또는 박테리아에서 발견되며, 인체 내에서도 필요한 만큼 자체 내에서 생성됩니다. 또한 비타민 D는 인체의 노출된 피부가 태양빛을 받을 때에 피하에서 합성됩니다.
오래 전에 의학과 식품 영양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비타민 B12가 우리가 흔히 먹는 식물성 식품 중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채식을 할 경우에 비타민 B12 결핍증에 걸리게 된다고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채식을 사람들 중에 비타민 B12 결핍증에 걸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가 희박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결과, 비타민 B12는 채식주의자들이 제조된 식물성 식품을 사서 먹을 때에 비타민 B12를 생성하는 박테리아도 함께 섭취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타민 B12를 생성하는 박테리아들이 인체의 입안과 내장 속에 충분한 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또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사실은 비타민 B12는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인체 내에 20~30년 동안 공급할 수 있는 재고가 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채식에 대한 불안감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면, 완전 채식을 하는 여성이 임신을 하였거나 모유를 먹이는 경우에 한해서 식물에서 추출하여 제조한 비타민 B12 정제를 하루에 5마이크로그램씩 복용하면 됩니다(균형진 채식을 하는 경우에는 먹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나 귀하의 가정에 한창 성장기에 있는 사춘기의 자녀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천연계 속에 있는 식물은 귀하의 가정에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 줄 것입니다.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매우 희박한 비타민 B12 결핍증에 대해서 걱정하기 보다는 육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이 나타나는 수많은 질병들과 성인병과 암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이 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돈을 빌리는 문제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잠언 22:7
재산을 쌓는 방법
“부정직으로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조금씩 모은 재산은 늘어가느니라” 잠언 13:11
하나님과 돈의 관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돈을 쓰는 방법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보여 준대로 수고함으로써 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리라” 사도행전 20:35
하늘이 지정한 재산 증식법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7.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십자가의 숨겨진 의미
강병국 목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신앙을 한다. 거의 2000을 거듭해 오면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표상으로 삼고 믿으며 가르치며 전하여 왔다.
사도 바울은“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전 2:2).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인류가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또한 주님의 구원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고 살고 있는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구속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고통을 상징한다. 인류가 당하여야 할 처참하고도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우리를 대신하여 지불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놀라운 희생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멸망 당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절규하시며 돌아오라고 탄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 교회들 지붕 지붕마다 십자가를 달게 되었고, 심지어는 십자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니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수호의 상징으로 달고 다니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그 진정한 구속의 의미를 미처 이해하지 못한채 십자가를 입으로만 찬송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들의 죄를 어떻게 대신 지실 수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지실 수가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죄의 결과를 우리 대신 경험하실 수가 있었을까? 이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잘 살펴 보아 이해하여야 할 문제이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사랑하고 찬송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우리는 베드로 전서 2:2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몸으로 남의 죄를 질 수 있을까?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경험을 이해하도록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훔치고 나면 어떠한 반응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되는가?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묘한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 땀이 몸을 적시게 된다. 그리고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우리가 우리 죄를 우리의 몸으로 지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들을 당신의 몸에 대신 지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 할 수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통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의 자신의 잘못이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여 대신 전가 시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부채를 은행의 구좌 모양으로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와 심판을 대신 경험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댓가를 다시 치루어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는 실제적인 맞바꿈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미리 예언한 말씀들 가운데 특히 시편40장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데 충분하다. 시편 40:12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르짓음을 듣게 되는데, 그 부르짓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예언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 구세주께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 사실을 보라. 다시 말해서 인류의 모든 죄악들이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내려 누르는 형편을 표현한 말씀인 것이다. 조금 전에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느끼는 죄책감과 같은 신체적인 반응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몸에 실제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들의 모든 죄를 지금 자신의 몸으로 짊어 지시고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느끼는 절망감,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두려움과 그 죄책감의 뼈아픔을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갑자기 마음에 그리고 당신의 몸에 느끼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순교자의 부르짓음이 아니었다. 어느 순교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죽어 가면서 그러한 외침을 한 적이 있었는가? 순교자들은 모두 다 기쁨과 소망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사실에 기뻐 찬미하면서 화형대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지 아니했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들이 받아야 할 죄의 결과를 대신 받아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경험이 없이 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던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십자가에서 갑자기 하늘 아버지와 절연되는 느낌을 느끼신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그 인간과의 사이를 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 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를 지신 예수께서 통렬하게 부르짖으신 이유는 죄가 예수님을 깜깜한 지옥같은 절망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으로 잘 알려진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더욱 명백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4절. 이 말씀에도 우리가 받을 죄의 값을 예수께서 대신, 실재적으로 경험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주고 있지 않는가? 예수께서 죄를 지신 것은 그 죄의 고통을 대신 경험하여 주신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대신 책임지기 위하여 전가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또한 이사야서 53:12절 중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여 죽어가는 인류들을 구원하여 내시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러, 대신 완전히 죽어 없어져 버리더라도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기를 택하겠다는 이해 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을 나타내어 준 것이다. 이 엄청난 사랑이 인류를 살게 하였다. 이것은 영원토록 연구와 경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 후서 5:21.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죄 그 자체가 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은 죄 그 자체가 되셔서 형벌을 대신 받아 주신 사실을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그러한 사실을 느끼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를 대신 몸에 지시는 경험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탄원하시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하나님과 아니 하늘 그 자체와 영원히 분리되어 죽어 버릴 가능성을 내다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 고뇌의 아픔을 과연 누가 이해 할 수 있었겠는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를 기억해 보자. 예수께서는 신음하시다가 서서히 서서히 돌아가시지 아니하셨다. 십자가의 양편 강도들은 금요일 저녁까지 아직 죽지 아니했기 때문에 속히 죽게 하기 위하여 다리를 꺽었지마는 예수께서는 벌써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는 갑자기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성경은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갑자기 파열되어 돌아가신 증거이다. 로마 군인이 죽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심장이 작동하기를 멈추고 파열되었기 때문에 혈구와 혈청이 나뉘어져서 물과 피가 따로 흘러 내린 것 처럼 보인 것이다. 인류의 죄를 지시면서 그 괴로움과 죄의 의식을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으셔서 예수님의 심장은 그만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못박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죄가 찌르는 아픔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죄악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 40편 12절은 예수의 고통의 장면을 그린 예언에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로는 “Therefore my heart failed me”(그러므로 내 심장이 멈추었나이다-필자 번역)라고 번역하고 있어 예수께서 죄의 무게 때문에 심장이 멈추어 버린 표현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엄청난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자기 개인의 마음 속으로 믿고, 정말로 감사하며 눈물겹게 받아드리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죄를 주께서 실재로 대신 져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에서 자유를 얻고 그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아 심판 당하시는 것으로 느끼셨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영혼은 떨리고 있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을 위하여 죄를 대신 져 주시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그대를 포기하고 아름답고 고통이 없는 하늘로 다시 올라가 버려야 할지를 선택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마귀는 예수의 곁에서 그를 몹시 괴롭혔다. 감사치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인류들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희생이 헛된 일이 될 것이요, 이제 이 대속의 죽음은 그를 영원히 멸망 당하게 만들 것이라는 절망적인 말들을 해 주었을 것이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을 하셔야 하였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율법을 만드신 그분만이 인류를 대속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구속의 죽음을 영원한 것으로 느끼신 것이다. 다시는 무덤 속에서 나와 부활하지 못할 것 처럼 느끼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도 더 이상 보이지 아니하는 깜깜한 영혼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민하고 계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자신의 영생과의 사이의 선택에서 촛불처럼 떨고 계셨다. 드디어 예수께서 믿음으로 승리하셨다. 그는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소리치시며 고개를 떨구셨다. 선택은 이루어졌다. 주님의 너무나도 큰 사랑이 바로 당신을 포기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차라리 당신이 죽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구하여 내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범죄하였을 때부터 결정해 놓으신 사실이다. 그러한 주님을 하늘 아버지께서는 삼일만에 부활해 내시었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아들을 영원한 구세주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과연 누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 할 수가 있을까?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모든 풀들을 붓으로 만들어 기록하려 해도 그 사랑 다 기록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믿고 가슴 깊이 받아드려 감격해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 그 훨씬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해 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려 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2.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서 이번 호의 십자가에 관한 모든 기사들을 계속 읽으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무릎 꿇고 기도 드릴 때, 한 장면이 내 앞에 펼쳐졌네.
어두운 밤중에 나는 한 인간의 두려운 형상을 보았네.
그는 양 손을 치켜들더니 흠 없는 어린 양,
즉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신 분을 움켜 잡아
보좌로부터 끌어 내리더니,
어두운 저 아래로 내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울기 시작했네
그 흉악한 자가 나의 주님을 내리쳤네.
그리고는 그 분의 손을 굳게 묶더니 나무에 메어 달았네.
거기에는 악한 자들과 악마들이 서 있는 곳인데…
그들은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면서
조롱하고 비웃었네.
그리고는 그 악한 자가 휘두르는 채찍에
나의 구세주의 지친 살이 터지고 찢어졌네.
힘있게 내려치는 채찍이 가는 곳마다 빛과 생명의 하니님이 상하셨네.
서른 아홉 번이나…
그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치 않은 곳이 없었네.
포악한 자가 묶은 끈을 끊자,
땅에 나뒹구시는 나의 주님.
아! 나는 생생한 장면을 목격하였네.
그 자가 나의 주님을 낡고 거칠은 십자가에 메다는 것이 아닌가!
마귀의 제사 의식의 상징인 끔찍한 그 곳에…
어린양은 아무런 저항도 말도 없으셨네.
그는 크고 녹슨 못을 가지고 악마적인 열심을 다하여
그분의 손을 뚫었네.
나는 도무지 볼 수 없어서 눈을 돌리려 하네.
그 악한 자와 악마들의 비웃음을 나는 견디기가 어려웠네.
들려진 십자가가 구덩이에 떨어져서
박히는 소리와 함께,
주님의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느껴졌네
오, 하늘이여, 놀랄지어다!
가깝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아, 경악할지어다.
모든 피조물들이여, 신음하라!
그대들의 창조주께서 죽임을 당하고 계시다.
악마는 일을 만족하게 마친 후,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는 나의 죄된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겠는데”
나는 비통하게 부르짖었네.
도대체 이 가증하고 잔인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을 높은 보좌에서 끌어내려
나무에 메어 단 이 파렴치한 악인이…
그 때, 어두움을 가르는 번개와 천둥이
그의 얼굴을 드러내었다.
오! 너무나 두려웠다. 내 눈에 보인 그 얼굴은,
그 얼굴은…
그 악한 자는 바로 내가 아닌가!
바로 내가 거기 서 있지 않은가!
어린양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자는 바로 나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나의 죄를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님을 살인한 죄를 용서하소서
당신의 고통과 상함을 이제 마음 아파 합니다.
나의 죄된 마음을 정결케 하옵소서
살 수 있는 길을 발견케 하옵소서.”
나는 어린양의 동정어린 음성을 들었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죄인들이시여, 아십니까? 이 사람이 바로 나인 것처럼,
그 사람이 또한 그대들인 사실을…
그대는 진실로 죄를 회개하고 슬퍼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시 그분을 못박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부디 죄인들이시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악을 행하기를 그치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시오.
그리고 죄 없으신 생애를 사신 그분의 모본을 따르시오.
다시는 방황이나 반역이 없는 순결한 생애를 사시오.
그리고 다른 길이 아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택하시오!
말조리 루이스 로이드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을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구속 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 내실 수 없으셨을까?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도로 사시기 위하여서 다른 선물을 마련하실 수가 없으셨을까? 천사가 인류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었을까?
예수께서 갈보리로 가신 것은 전혀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이 세상의 인류들을 저들의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사단 마귀와 싸우는 우주적인 전쟁의 의미도 내포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전쟁은 십자가에서 최고도에 달하였다. 그 전쟁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거나 끝나지 아니했다. 십자가는 창조 이전 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혹시 인간이 자유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될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은혜를 통하여 다시 구속할 것에 대한 계획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가 생긴 이유
십자가가 생긴 이유는 사단이 하늘에서 반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아름다운 그룹 천사 중 하나였다. 에스겔은 마귀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청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 났도다.” 에스겔 28:13-15.
또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사단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 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라.” 이사야 14:12-15.
위의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그의 타락은 교만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비기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천사들을 꼬이면서 하늘에서 반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천사들 중 삼분의 일 정도를 미혹하는데 성공한 사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요한 계시록 12장의 말씀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꼬리가 (용의 꼬리-필자 주)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으로 던지더라 ...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요한계시록 12:4,7-9. 여기에서 미가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용은 말씀 그대로 사단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도전장
이 전쟁에서 사단이 인류를 꼬인 수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꾀이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꼭 마찬가지이다. 그는 해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실과를 따 먹어도 괜챦다고 꼬였다. 즉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역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해와에게 다른 모든 실과들은 먹을 수 있지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선악과 자체에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성립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성을 위하여 주신 명령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 세상의 평화와 생명을 영원히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존 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단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해와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기만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고소하였다. 그 사실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사단은 아담과 해와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아는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한 기만술에 인류의 조상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불순종이 이 세상을 이러한 파멸로 몰고 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 에덴 동산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분의 율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악하여 지고 불순종에 익숙하여졌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그러므로 하나님께 두가지의 사단의 고소를 침묵시키셔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첫째로 A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고 인류의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원하시는 크신 사랑의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고, 두번째로 B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그것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날에는 세상의 파멸과 슬픔이 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전, 십자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시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것이다. 십자가는 에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속죄의 의미 이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버린 모든 인간들이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은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인류의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지켜야 할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가 어떠한지는 이 세상의 타락의 모습을 통하여서 지난 수천년간 증명되어 온 바이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이 하늘의 천사들과 거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품성의 차이점을 너무도 명백하게 살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었다. 사단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의 주장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온 우주가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악랄한 마귀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그의 주장을 인정하는 자들이 없어졌다. 십자가에서 악한 마귀의 본성과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의 큰 대조가 드러난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서게 되었다. 십자가는 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는 영원히 패배자가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는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십자가는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표상이 되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로 죽이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랑을 통하여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사단은 그래서 십자가를 미워한다. 그렇다고 그는 십자가를 없이 할 수가 없다. 십자가의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바닥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사단의 기만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선악간의 전쟁이 십자가에서 결정지어지긴 했으나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이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능력과 의미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또 다른 작전을 세운 것이다. 십자가를 그리스도인들이 믿더라도 십자가의 참 뜻을 오해시켜 버리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미묘한 작전을 세웠는데, 그것은 오히려 아예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서울지 모르는 기만술인 것이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자기의 주장에 맞게 색칠을 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사람들이 믿고 따르도록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는 원래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은 꼭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폐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꼬여 왔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인류의 조상들을 기만한 방법이 아니였던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찬양하고 설교하며, 갈보리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십자가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찬송하며 설교하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나 찬송은 사단에게 조금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가르치며 믿게 하고 있다.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가 마치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좋은 핑게가 되도록 믿게 하고 있다. 십자가를 믿는한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도록 권한다. 십자가를 믿는한 죄를 계속 지어도 충분한 용서 속에 있으니 염려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믿고 살도록 격려 한다. 사단은 갈보리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믿게 만든다. 십자가가 마치 우리들을 죄로부터 구해낸 것이 아니라, 그 죄 가운데서 구원을 준 것으로 믿게 만들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낸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에 자유케 해 주신 양으로 생각케 하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그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로 만들어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브리서 9:14.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그 위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율법을 그렇게 쉽게 폐해 버리실 수 있으셨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값을 치루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냥 쉽게 율법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셔야만 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 5:1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31). 사도 바울이 설명한 예수께서 십자가로 폐하셨다는 것은(골로세서 2:14-16 참조)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의문의 율법 곧 유대인들이 지키던 모세의 율법 즉, 절기들이나 종교 의식적인 절차들을 가르켜 말한 것이었다.
십자가를 찬송하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감사하자!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상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목적을 잊지 말도록 하자. 오늘날,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범람하고 있다. 그것은 마귀가 뿌린 씨들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착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죄인들을 변화시키어 하늘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살 수 있기에 안전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 하시고 구속하시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한 자들로 만드시기 위하여서 구원하신 것이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죄를 짓는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케 해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 준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 하겠다.
10.Father & Son
한번은 아버지가 먼 곳의 여행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왔는데, 꼬마 아들이 아버지께 달려와 안기면서 “아버지 나에게 줄 선물 사오셨죠?” 그러자 아버지는 “그럼 내가 너를 위하여 좋은 선물을 사왔단다.”라고 대답하였다.
아이는 그 선물을 보여 달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집안으로 뛰어들어가면서 “아버지가 선물을 사오셨다! 아버지가 선물을 사오셨다!”라고 외쳤다. 이 때 그 모습을 보던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불러서 “얘 너 선물을 보았니?”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금새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아니 아버지 그럼 선물이 없단 말이에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양심의 가책이 되어 금새 “아니 선물을 사왔지. 아무 걱정 말아라.”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선물을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했지만, 아버지의 말 한마디를 신뢰하는 아들의 믿음을 보게 된다. 아버지께 있는 선물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아들의 믿음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성경에는 선물에 대한 약속이 수천 번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 땅의 아들들은 그 아버지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막연한 마음으로 약속을 생각하며 죄와 악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말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아들. 아버지가 무엇을 말할 때 의심하고 불신하는 아들, 그것은 진정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일까? 아이가 아버지의 말에 대하여 갖고 있던 것과 같은 순수하고 완전한 신뢰를 가진 자들만이 하늘 아버지가 준비한 선물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11.십자가의 참 의미를 위하여1부-제자들의 빗나간 기대
1.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
예수께서 그의 지상 봉사의 거의 마지막 시점까지 십자가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십자가는 하늘에 태양이 떠있는 것과 같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복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왜 구주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 사실에 대하여 숨기셨을까?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 상징적인 말로 가끔 신비롭게 말씀하셨을 뿐이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 나오는 “성전”이 무너지고 삼일만에 재건되리라고 하신 것과, 요한복음 3장 14절에 언급된 “구리 뱀”과, 마태복음 12장 39절에 그의 육체를 세상의 생명으로 주실 것이라는 것과, 마태복음 9장 15절에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를”것이라는 말씀이 이러한 예들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확실하고,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어떠한 사건을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믿음의 시련이 오기 몇 달 전, 빌립보를 방문하셨을 때까지 십자가에 대한 모든 자세한 설명을 숨기셨다. 또한 이 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도 묻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초기에 들었던 상징적인 말씀들이 그들의 지식과 믿음에 융화되어 서서히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정말로 제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 깊은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예수께서는 묵묵히 자신을 “인자”라고 명하시고 계속해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기를 즐겨하셨다. 예수께서는 계속적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희망에 실망을 주셨다.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예수로 하여금 한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하였지만, 점차 이러한 지지가 사라져 갈 때도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으로 남아있기에 만족해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인정을 받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고 도리어 그들의 분노를 사는 길을 가셨다.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이 있은 후, 드디어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은 모두 떠나가고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을 왕으로 받들려는 사람들을 퉁명스럽게 해산시키기도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멸시받고 거절 받는”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거절할 수 있는 많은 이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었는가?
그러나 이 때에도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계속적인 확신의 말씀이 들려왔다. 그들의 마음은 이러한 많은 혼란 속에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배우고 있었다. 이러한 증거들은 단순히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만이 아니었다. 물질적인 증거들은 친구들과 적들에 의하여 거짓되게 풀이될 수 있으며, 또한 물질적인 증거들은 진정한 믿음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믿음을 심어주고 확신을 갖게 하였던 그 증거는 바로 예수의 모든 행동과 말씀에 깃들여져 있었던 기적적이고 진정한 사랑이었다.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에는 심오한 영적 지혜와 하늘의 지식이 실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빌립에게 믿음을 심어 준 요소였다. (요한복음 14:11:12) 진정한 사랑의 진리를 깨닫기를 거절한 것이 바로 희망 없고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의 죄였다. 이들의 죄는 인자를 거절한 것이 아니고 성령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었다. 그들은 십자가가 세워지기 몇 달 전, 빌립보를 방문하였을 때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마태복음 16:13)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부추기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예수를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그 때 당시 화려한 명칭이었다. 예수께서는 만족스럽게 생각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속에 모호하게 남아있는 인자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 시키려하셨다.
베드로는 그의 용감한 믿음을 표현하고자 첫 번째 대답을 함으로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절)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자만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충고도 주셨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절)
베드로는 비록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 명철할지라도 자아 만족적으로 되어서는 안되었다. 아무리 명철하고 재간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은밀히 나타내실 때에 그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2000년 전 예수께서 이 땅의 먼지 나는 인생 길을 가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육체와 피를 통한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이제 그의 교회의 기반을 놓으려 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그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신속하게, 뛰어난 건축가로서, 또한 신성한 기술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를 대항하여 제자들의 믿음 위에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십자가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는 일이었다. 그 동안 구름에 싸여있던 십자가에 대한 모든 신비로운 베일을 벗기시고 예수께서는 이제 명확하게 그가 앞으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고 죽게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16:21절)
제자들은 두려움보다는 놀라움으로 그 말씀을 들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들이 있다는 것도 개혁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아들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었다. 영광의 왕위를 받으셔야 할 메시아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더 확실해 지면 질수록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었다.
특별한 축복을 받았던 베드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첫 번째로 선언한 그가 십자가를 첫 번째로 부인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2절) “십자가는 흉악범을 위한 것이다... 십자가는 의로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것은 특별히 아니다...!” 십자가는 제자들에게 걸림돌이요 어리석음이요 또한 모욕이었다.
우리는 제자들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가 도달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직 성령만이 이것을 깨우쳐줄 수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믿음의 고백을 먼저 하게 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함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한 것처럼, 예수를 떠났을 것이다. 사람이 만든 종교도 메시아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상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주시며 고난 당하시는 예수를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보다 나은가?
우리도 십자가의 진리에 눈이 어두웠던 예수의 제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아마 더욱 큰 위험 속에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증명하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이 사실을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베드로보다 더 계몽된 사회와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의 가장 큰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베드로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생각해 내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표상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18,24 참고) 이것은 고상한 기술로 이루어진 영적 전쟁의 성스러운 전략이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베드로의 반응은 십자가에 대한 불쾌하고 어리석은 감정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불 경건한 행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마태복음 16:23) 베드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이해하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우리보다 더 흉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의존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려 하였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반대하여 나타낸 그 사상의 출처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화를 내신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씀은 폭발하는 감정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엄격하고 마음을 찌르는 예수님의 책망은 베드로의 세상으로 기울어진 감정을 드러내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마태복음 16:23)
불쌍한 베드로!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을 사단의 도구가 되도록 허용하였다. 십자가를 이루지 못하게 하려는 베드로의 말속에서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반역하여 이 땅에 쫓겨온 사단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베드로가 사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생각은 단지 연약하고 무식한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사단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침울해지고 잠잠해진 제자들의 마음속에 강한 힘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견책이 서서히 스며들어가기 시작하였다.
2.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교훈
만약 베드로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생을 책망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가 고기잡이 시절에 정신병자에게 했던 식으로 예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경외심과 깊은 감동으로 예수께서 처음으로 여시는 하늘 나라의 법에 대한 신비로운 말씀을 경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4,25)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요약한다면 - ‘너희들은 인자인 내가 십자가를 통하여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만 놀라고 있지만, 만약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너희도 나와 같이 십자가에 자신을 죽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에 하나가 되었고 십자가의 법이 우리를 두르고 있기 때문이란다’ - 하신 것이다.
죄가 시작되기 이전, 멀고 먼 태고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 만약 인간이 죄에 빠진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주고, 아들은 자신을 세상을 위하여 주어서, 지구를 자아를 추구하는 이기주의의 멸망 속에서 구원하시고자 경건한 협정을 맺으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같이 든 모든 자들을 하늘 보좌에 앉게 할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그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죄짓지 않은 우주의 존재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에 그의 십자가를 지고 계셨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들만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사제나, 수도승, 성직자, 선교사, 교회 직원, 종교 지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 죽기를 싫어하는 씨는 결국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고, 땅속에 들어가 죽는 씨는 많은 열매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 안에 바로 하늘 나라가 세워진 창조적 원칙이 숨어있는 것이다.
죄가 하나님의 정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하는 일이 바로 십자가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선악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전략은 십자가를 통한 길 이외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한다. 그 이유는 십자가만이 완전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주시고자 작정하셨다. 예수께서도 그 길을, 인류를 위한 신성한 사랑으로, 따르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신 것이다. (계시록 13:8, 참고)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 들어가시든지 신성한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죄에 대항하는 여러분과 나의 싸움은 창조주께서 하시는 똑같은 원칙에 근거하여서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예수와 십자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진리의 십자가는 깊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비록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종류의 시험을 당하셨지만 그의 마음은 죄 없으셨으며, 정결하셨다. 이 사실은 놀라운 경이요 사랑의 보고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이세상의 모든 인간들과의 다른 점이다.
아기로서 태어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처럼 태어나셔서 인간의 아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셨다. 그는 목자들의 숭배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박사들의 방문을 알지 못하였다. 큰 도시에 가보았던 운 좋은 아이처럼 시골 산 동네에 사는 친구들에게 하늘에서 천사들의 사령관이었던 때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예수께서도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우리가 배웠던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아이가 자라며 강건하여지고...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라고 적고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2:40, 52)
예수에 관한 신비는 바로 그의 태어나심에 있다. 신이 인간이 되시고 이 땅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라나셔야 하시고, 죄 없이 사신 것은 큰 신비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태어나실 때에 그의 지식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늘에 두고 태어나셨다.
아이가 12살이 되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때가 이르렀다. 그의 마음속에는 장래의 일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모형이 세워지게 되었다. 예수께서 유대 나라 명절이었던 유월절에 참석하였던 때는 12살 때였다. 처음으로 그는 유명한 사원들과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피 흘리는 희생 재물을 제단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어린 예수의 마음은 희생양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였다. 제사장도,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갈물린 말처럼 묵묵히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행할 뿐이었다. 400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바쳐왔다. 그러나 아이들이 “왜 이러한 일을 행합니까?”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아무도 신비로운 그 희생의식을 설명할 수 없었다. 예수는 아마 “소나 염소의 피가 정말로 죄를 없앨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 하였을 것이다.
어린 예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잡담과 놀이를 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피를 뿌리는 그 장면이 그의 마음속 깊이 어른거렸다. 바울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짐승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으로서도 무릎을 꿇고 깊은 심오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말이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브리서 10:5-7)
“아버지여 당신에게는 이러한 짐승의 피가 필요 없나이다! 당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기쁨을 찾을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이것들이 어떠한 인간의 죄도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만드셨고, 내가 바로 그이오니 나는 줄 수 있는 몸이 있고, 나눌 수 있는 피가 있나이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아버지여.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제가 세상 죄를 위하여 죽겠나이다. 제 피가 속죄제물이 되겠나이다. 제가 이사야가 말한 그 ‘고통받는 일꾼’이 되겠나이다. 저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상처받게 하시고, 멍들게 하시고, 채찍질 받게 하소서. 당신의 의지를 따르리이다..... “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구약의 표상적인 봉사를 제하여 버리시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셨다고 하였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9,10)
영원 전에 미리 존재하였던 과거의 기억이 유월절 의식의 신비를 대신 설명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이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평화의 협정”은 “그 두 사람 사이에” 있었으며 (스가랴 6:13),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아 세상의 죄를 씻기로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하신 그 계약을 기억해 내실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죄로 더럽히지 않은 정결한 마음은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본 상징들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9)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
“이것은 모두 비유이지..” 예수께서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무죄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누군가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여 잃어버린 인류를 대속 해야 한다.. 이렇게 의미 없이 계속되고 있는 무의미한 의식은 이제 극적인 마지막을 맞게 함으로 의식의 실제적인 의미가 거룩한 희생으로 나타나야 한다.. “
이것은 이스라엘의 박사들과 제사장들이 수 천년간의 의식을 통하여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아왔던 상징을 단지 한번 봄으로서 12살 짜리 어린 예수는 그 의미의 중심을 이해하였다. 그의 어린 마음은 강한 의지의 힘으로 감싸지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보려는 불쌍한 영혼들의 노력은 하나님의 은총의 자비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이사야 59:15,16)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9:14)
이 놀라운 사랑의 사업을 보라! 그는 인간의 몸에 거하셨고, 영원전의 모든 기억을 알지 못한 채 10년 동안 어린이로서, 단지 성경말씀만 믿음으로서 사신 그리스도.. 그는 영원 전 하늘의 사령관으로서 내리신 그 결정을 인간으로서도 선택하셨다. 그는 십자가로 가시기를 선택하셨다.
구원받을 수 있는 오직 한 길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비춰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그 길, 또한 어린아이로서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심하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을 품고 있던지, 죄인의 마음을 갖고 있던지 간에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부활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한복음 12:25)
두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너와 나의 십자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그 강도가 졌던 그 십자가는 곧 우리들의 십자가이다. 또한 갈바리에는 세 번째 십자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구원이 내릴 수 없었다. 그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굴복하지 않았다. 반역적인 그의 정신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예수와 동료를 저주하였다. 우리도 그 강도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를 따라서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것인가?
우리의 거룩한 모본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기에 쉽게 하신다. 그의 십자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기쁨으로 이것을 지게 하는 힘을 찾을 수 있다.
3. 나는 어떻게 십자가를 발견하였는가?
나는 어렸을 때에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이야기를 공포가 느낄 정도로 자세하게 들은 적이 있다. 또한 중세 암흑기에 비참하게 죽어갔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어린 나의 마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겪으셨던 그 고통과 이러한 순교자들이 견디어야 했던 그 비참함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다. 사실, 많은 순교자들이 당했던 고통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것보다도 더 심했으며 길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그 고통과 수치와 외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순교자들이 죽을 때에는 그들의 친구들이나 잘 아는 누군가가 그들의 옆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응원하여 주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십자가를 두고 모두 도망갔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도 그렇게 큰 차이점을 주지 못했다. 이와 비슷한 외로움과 거절과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은 순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나 다 그들이 착한 사람이었다면 그들이 맞을 밝은 죽음 저편의 세계를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배운바 대로는 만약 착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하늘에 가서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이었다면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는다고 알았다. 예수는 당연히 착한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예수께서 죽으신 다음 곧바로 하늘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과 즐거운 주말을 보내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도 “오늘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처럼 보였다.
예수께서는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시고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께서 그 사이에 하늘에 가셨다 오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예측은 예수께서 그 고통을 더 쉽게 견딜 수 있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어떠한 확실한 영광과 행복이 앞날에 있을 것이 확실하다면 인간은 초인간적인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고 있는 특별한 영광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고민하였다.
더욱이 예수께서 겪으셨던 육체적인 고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모든 고통의 시간은 12-15시간 이내에 끝이 났다. 그렇다고 내가 이러한 고통의 시간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순교자들이 더 긴 시간동안 더 큰 고통으로, 또한 곧바로 하늘에 가서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이 순교를 당했던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 보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고 있는 특별한 영광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감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그 십자가에서 내가 깊은 감사를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들은바 대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이에 영광을 돌리고 특별하고 심오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감흥을 느껴야만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며 울기도 한다. 나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한 말씀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없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감동 받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 보았으나 헛된 일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어떤 풀 수 없는 실마리에 묶여져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장래에 어떠한 일이 있을 것을 아셨으므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처럼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내 생각 속에 머물렀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아셨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과 다시 돌아갈 것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이 땅의 육체적 고통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했어.....”
나는 어렸을 때 세상에서 가장 이름난 부자 중 하나였던 헨리 포드에 대한 책을 읽은 것을 기억한다. 그 유명한 자동차 회사의 건립자인 헨리 포드는 어느 날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한 친구와 함께, 그날 따라 제일 작고 싼 차를 타고 어느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싸구려 자동차가, 가난한 사람들이 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경험하는 것처럼, 갑자가 길 한가운데서 망가져 서 버렸다. 포드는 시골 자동차 수리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불편한 시간이었지만 헨리 포드는 그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고 적고 있다. 나는 그 때 포드가 그 망가진 작은 차를 꼭 고쳐야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라도 회사에 전화해서 Lincoln과 같은 좋은 차를 보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이러한 사실이 포드로 하여금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만약 보통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면 그 기분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리스도도 이 같은 상황에 있지 않았는가? 나는 스스로 변론하였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3) 하신 것은 바로 헨리 포드의 자동차가 고장났을 때의 상황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총알이 더 많이 있는 군인이 하나도 없는 군인보다 더 용감할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나를 혼란케 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남겨 두셔서 내가 그리스도께서 내게 하신 일을 잘 이해할 수 없게 하셨는가? 나는 고민하게 되었다. 그냥 내가 그 사실을 믿는다고 해 버릴까? 아니면 내가 어떤 중요한 감흥을 느낀다고 해버릴까? 내가 느낄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나는 구원받기를 열망하였지만, 동시에 나는 진실 되고 싶었다. 내가 진정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작가들과 강사들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늘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나에게 위안이 되기보다는 더 큰 혼란을 주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바울을 포함한 예수의 제자들의 마음이 십자가를 통하여 깊은 감동과 변화를 경험하였다. 어떤 놀랄만한 현상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까지도 고통받기를 자초했으며, 울거나 슬퍼하기는커녕 그들이 받는 고통과 박해와 모욕과 불편함을 즐겁고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에게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이 있었다. 아마 이것을 나는 하늘에 갈 때까지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를 괴롭힌 것은 내가 만약 그것을 지금 갖지 못한다면 나는 하늘에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렇게 희망 없는 쳇바퀴만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충고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당신과 같이 있지 못해서 도와줄 수 없어 참 안됐군.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십자가에 대하여 특별한 감흥을 느껴야만 하늘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냥 단순히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받아들기만 하라고. 이것은 단순히 보험카드에 싸인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간단한 것이야. 눈물이나 어떠한 감정도 싸인하는 일에 필요하지 않아. 그래도 싸인하는 동시에 당신은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받는 거야. ..”
내가 이러한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의 만족도는 예수의 제자들이 경험한 그 불타는 신앙과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경험하신 그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의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린도후서 11:25-30)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같은 믿음은 푹신한 교회 의자에 매주 앉는 것도 힘들어한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33, 27) 만약 누구든지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섬기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내 마음에 깃든 음성이었다.
십자가를 볼 때 감추어진 것
사람이 죽을 때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상태로 살게 된다는, 영혼은 절대로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가르침은 큰 오류이다. 단순히 비타민이 부족하여 어떤 병이 걸리는 것처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혼 불멸적인 사상은 내 마음에 복잡한 혼란을 만들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죄를 지을지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하였다. (창세기 2:17 참고) 지금도 사단은 우리에게 “너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4)고 유혹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어떤 인간도 결코 완전히 멸망 받을 수 없어. 영혼은 자연적으로 불멸한다고..”
이러한 사상이 이방인들의 종교의 기본사상이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기독교에 퍼져나가 이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겉으로 볼 때 이러한 생각이 별 나쁜 결과를 끼친다고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여 보라. 이 사상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하신 로마서 5:8절의 말씀과 대치된다. 왜냐하면 영혼불멸설 안에는 실제적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사단이 우리에게 이 사상을 통하여 속이려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겪으셔야만 하였던 경험은,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릴 것도 없고, 포기해야 할 것도 없으며, 그래서 참기에 충분하였다고 사단이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희생은 어디에 있는가? 희생은 존재할 수 없다.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쇼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다. 나라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전쟁 용사들의 죽음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게 십자가를 만들어 버리는 사상이 바로 죽음이 없다는, 영혼 불멸의 사상인 것이다.
십자가가 주는 진정한 의미
그리스도께서 경험한 십자가의 고통은 그 어떤 육체적 고통이나 순교자들의 경험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는 어떠한 수치나, 억지로 믿어야만 하는 짐이 없다.
이사야서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죄악”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죄악은 우리로 하나님과 분리되게 만들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하였다. (이사야 59:2) 죄는 우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빼앗기게 하였으며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구주께서는 진정으로 우리들의 죄악을 자신에게 옮겨놓으셨다. 이 의미는 죄악이 갖는 모든 죄책감과 외로움, 완전히 버림받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이 멸망 받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사형선고 받은 죄인의 처절함을 모두 느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시킨 요소들이었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정말로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부르짖음이 영화 속의 배우가 극적인 표현을 하기 위하여 꾸미는 연극과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예수께서 버림받았다는 사실로 울부짖었을까?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24)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그의 어깨에 우리의 짐을 지시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마음과 영혼 깊숙이 우리의 죄를 지셨다. 그의 모든 신경조직에, 그의 마음과 영혼에 우리의 죽음의 죄를 지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예수께서는 죄인이 아니셨다. 그는 죄 없는 분이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죄와 저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지셨던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 만약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시고, 죄의 저주를 받으셨다면, 그는 죄의 결과가 주는 고통도 경험하셔야만 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브리서 2:11)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받으신 그 죽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두 가지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으로 “잔다”는 의미에서의 죽음 (요한복음 11:11,13 참고)을 말하고, 두 번째 죽음은 완전한 죽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11, 20:6, 21:8절에 나오는 이 두 번째 죽음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며, 모든 빛과 즐거움과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하신 그 죽음은 바로 이 두 번째 죽음이었다. 영원히 이 땅과 온 우주에서 사라져 가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거나 창조함 받을 수 없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상태로 가버리는 죽음이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9) 예수께서는 인류 모두가 각기 당하여야할 그 죽음을 맛보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죽음은 우리가 늙어서 죽는 그러한 죽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 한번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만약 그들이 죄를 짓는다면 받을 것이라고 말한 그 죽음을 당하셨다. 이 지구에 그 동안 살았던 수 천억의 인류 개개인의 모든 죄의 결과를 마음에 지시고 한 사람의 죄책감이 아니라 수 천억 명의 죄책감과 그들의 불안함과, 희망 없음을 모두 느끼시며 영원한 죽음을 당하시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 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브리서 2:17,18)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로부터 완전히 가려졌다. 희망도, 빛도 두 번째 죽음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시 창조되는 부활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당하셨으므로 더 이상 부활을 기대하거나 용서를 바랄 수 없었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의 소망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맛보기에 부적합하였을 것이고, 진정으로 자신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애원하실 때에 그의 인성은 움츠려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8,39) 그리스도께서 마셨던 그 잔은 어떤 인간도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것이었다. 실제로 우주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셨다.
소름끼치도록 두렵고 절망적인 두 번째 죽음을 온전한 정신으로서 경험하신 그리스도. 그의 손을 찌른 못도, 그의 뚫어진 발도, 매서운 채찍도 그를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끼실 수 없을 정도로 그 마음의 고통이 극심하셨다. 그를 죽인 것은 겟세마네부터 흘리시기 시작한, 피땀 흘리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시편 69:20)
이 땅에서 사신 모든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부활에 관한 확신이 있으셨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보실 수 있으셨으며, 이러한 영광의 햇빛 아래서 마음이 움츠려들 수 있는 어떠한 큰 장벽도 없었다. 심지어는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가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였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즐거운 확신 속에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곧 이러한 감흥은 사라지고 예수께서 마셔야 할 그 잔이 그의 몸과 마음을 침투해 들어왔다. 급속한 변화가 그에게 이르렀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태복음 27:42, 40) 그리스도께서 마신 그 쓴잔은 이렇게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구원하시려 왔던 바로 그 사람들로 인하여 더욱 쓰게 변하였다. 십자가 위에서 이러한 말씀을 들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 번 내려와 봐!” “하나님이 왜 너를 구원해주지 않지?” 그리스도의 손은 넓게 벌려져 나무에 박혀 있었기에 귀를 막으실 수 조차 없으셨다. 그저 기도할 수만 있었을 뿐... 승리의 기도가 아니라, 희망의 기도가 아니라, 버림받는 울부짖음의 기도뿐.. 하늘은 닫혔고 어느 누구도 그를 돕는 손길을 뻗히지 않았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치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2)
여러 시간동안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짐과 싸우셨다. 구경꾼들의 잔인하게 모욕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 조금 후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하나님과 자신과의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음의 절망을 선고하셨다. 사람들의 모욕은 독에 담겨 가시 돋친 화살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일으켰으며,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가는 예수의 영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제 완전한 죽음이 그리스도의 영혼을 빼앗아 갔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감출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두움을 보내어 놀리는 군중들로부터 그의 얼굴을 숨기셨다. 오직 짙은 암흑 속에서 들리는 것은 갈바리로부터 메아리치고 있었던 그의 사라져 가는 적은 신음소리 뿐... 얼마나 잔인한 인간들인가? 또한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이신가? 아들의 마지막 고통을 숨기시는 그 자상한 사랑. 천사들조차도 보기를 허락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고통의 마지막 장면들, 영원한 죽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동정, 그러나 마지막 격정의 모습을 사람들로부터 숨기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의 법과, 구속과, 사랑의 원칙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었다.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지만, 사랑은 견디었다. 시편 22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겪으셨던 그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믿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지이다. 그러나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수난을 통과하실 때에 그 마음과 영혼은 오직 죽어 가는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서 채워져 있었다. 그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희망이 전혀 없었지만, 사랑은 그 영원한 죽음을 끝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순교자의 죽음이 아닌 죄인의 죽음을 택하시고, 희망 없는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그의 얼굴을 돌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하늘의 원칙을 기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을 위하여 구속의 경륜을 세우사 자신을 희생 재물로 바치기로 결심하시고, 겟세마네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통과 모욕과, 아픔과, 외로움과 희망 없음과 싸우셨으며, 끝까지 변함없이 그 영원한 죽음을 받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셨다. 희망은 완전히 없어졌으나, 사랑은 이를 견디었다. 믿음은 움츠러들었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 얼굴 붉어질 것 같으면
결코 생각하지 말게
그대 무슨 말 속삭이는지 모르지만,
예수님 듣기 원치 않으시는 것이걸랑
한 마디도 말하지 말게.
그대 무엇을 쓰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 보여드리기 어려운 것이거든
그대의 펜을 놓게.
그대 어디를 가든 예수님께
“그대 어찌 여기 왔느뇨?”란 말 듣기 창피하거든
한 발자국도 그런 곳에 들여 놓지 말게.
그대가 추구하는 쾌락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너 무엇하고 있니?”라고 물으실 때,
깜짝 놀라 움츠려 드는 것이걸랑
거기에서 돌아서게.
그대가 생각하고 말하고, 읽고, 쓰고, 노래하고,
걷고, 무엇을 추구할지라도,
그것이 집안이건 집 밖이건 순결하고
십자가 바라보며 사는 사람처럼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