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국내 신문들은 해경 비행정 탑승원들이 전원 무사히
구조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제주항에 귀환한 사진도 크게 보여주었다.
중국 청도를 떠나 일본 고오베로 가던 5,000톤급 일본 화물선
고요마루[幸洋丸]가 72시간이나 표류하던 비행정을 발견하고
해경 대원들을 구조했다.
구조 무전에 급파된 해경 868정이 3월 2일 새벽 7시 제주도 남쪽 160마일
해상[일본 가고시마현 앞 해상]에서 네 명의 해경 인원을 모두 인수하여
3일 아침 7시 제주항에 돌아왔다.
무사히 돌아온 조난자 4명들을 대신해서 해양 경찰 경비과장
주 사원 총경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쳐서 죄송하다는 사과로서 첫 귀환 소감을 밝혔다.
이어서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들의 조난 경위를
들려주었다.
비행정이 결정적으로 조난하게 된 이유는 출발 당시
예상도 못했던 뱅크 포그를 제주도 서북방에서 만났기
때문으로 제주도를 찾지 못하고 안개 속에서 한 시간이나
헤매면서 조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연료가 떨어지고 비행정은 해상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곧 밤이 왔고 캄캄한 절해(絶海)속에서 풍랑에 몸을 맡긴
비행정에 목숨을 걸고 표류 한 시간 만에 지나가는
어선을 발견하고 불을 피워 구조 신호를 보았으나 허탕,
두 번째 배 그림자를 발견한 것은 새벽 한 시경,
- 네 사람은 제각기 옷을 벗어 태워 결사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는데도 또 허탕이었으며 이날 아침
8시경과 밤 11시에도 세 번째와 네 번째와 배를 보고
구조 신호를 올렸으나 모두 허탕이었다.
3월 1일 아침 9시 30분 쯤 5천 톤 급의 화물선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또 횃불을 올렸으나 또 허탕이었다.
이날 오후 2시 20분쯤 고요마루를 멀리서 발견하고
여섯 번째 구조 신호를 보냈다.
참으로 우연이었다.
고요마루의 기관사 다케나카[竹中]씨가
갑판에 나와 바람을 쐬다가 표류중인 비행정을 발견하고
쌍안경으로 보니 조난자들이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고요마루는 선수를 돌려 이들을 구조했다.
조난 해경 인원을 인계하고 멀어지는 고요마루, 5,000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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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사원 총경은 생환 경위와 함께 이들이 다가오는 죽음과의
투쟁과 비행정의 아쉽기 짝이 없는 최후를 들려주었다.
탑승원 홍 경위와 손 순경은 갈증을 이기지 못해 바닷물을
퍼서 마시려고 했으나 해군 소령 출신 주(朱)총경은
“해수를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진다.”고 타이르기도 했으며
29일에는 갈증을 참다못해 제각기 오줌을 누어 제 오줌을 마시고
나서 갈증은 사라졌으나 다음에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는
피로와 함께 졸음이었다.
죽음에의 초대를 거부하기 위해서 서로 꼬집어 가며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하였다.
구조된 다음날[3월 2일] 새벽 4시쯤 일본 선원들이
잠든 탑승원들을 깨우면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예인중인 비행정에 물이 들어와 가라앉고 있다”였다.
조종사 정 경감이 발가벗고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어 애기(愛機)를
보수하려했으나 우측 날개가 부러져서 기울어지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비행정은 결국 기우러지며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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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높은 바다를 장시간 예인 되면서 우측 날개의
부주[플로트]가 금속 피로로 약화되어 파손되고 따라서
날개도 수면에 기우러져 졌다.
예인되던중 날개도 부러져 수면에 기운 기체에
침수가 되어 침몰했을 것이다.
두 개의 연약한 지지대로 날개에 장착 된 플로트는
이런 장시간 파도 가르기의 시련을 버티기가 힘들다.
실종 소식과 함께 신문에 보도한 제해호 사진- 오른쪽으로 기운
모습이 보인다. 거친 파도에 플로트가 부러지기 좋은 구조임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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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이기지 못한 승조원들은 해경정이 사라진 바다에
묵념으로서 애도했다.
이 때가 해경이 급파한 인수함과 만나기 30분전이었다.
제해호가 기체 고장이 아니라 악천후에 의한 연료 고갈로
조난했었고 탑승원들이 모두 구출된 뒤에 7년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밤바다에서 조용히 마감한 것은
드라마같은 스토리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그 제해호가 오늘날 한국에 남겨준 의미를 분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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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발기 제해호가 첫 비행을 한 1957년 무렵에는
우리 손으로 만든 라디오도 없었고 전화기도 없었다.
프라스틱 제품이 한국에서 처음 제조 된 것이 이 무렵이었고
백설표 설탕이나 미원 같은 조미료가 겨우 국내 생산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 때 미 공군이 활용한 SA-16 비행정은 제해호보다
훨씬 크다.제해호가 미군 비행정의 설계도를 가지고
복제 생산한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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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니 뭐니 하는 것은 먼 나라의 꿈같은 이야기였었다.
고성능 기계라야 자전거 정도나 있었을까?
이런 때에 순수 우리 기술로 쌍발 비행기를 제작했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는 대단한 민족 발전적 사건이었다.
여기서 조 경연[1918-1991]이라는 이인적[異人的] 인재를
다시 안돌아 볼 수가 없었다.
조 중위는 이 시대 한국의 실정으로 보아서 이인이라는
고풍스러운 타이틀을 부여 해줄만한 대단한 능력의
보유자였었고 능력대로 큰 업적을 남겼었다.
이 분은 분명 한국의 라이트 형제라고 할만한 분이다.
나는 항상 요새 유행하는 라이센스니 뭐니하는 호사스런 외국 기술
도움없이 순전한 국산 수작업으로 이 비행정을 설계하고 제작해낸
그 분의 정체가 궁금했었다.
조 경연씨 -해군 본부 김한솔 중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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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어도 그 분이 일본에서 제대로 항공기 제작 교육을 받고
나카지마[中島-육군 전투기 하야부사 생산]나
미쓰비시[三菱-해군 제로 전투기 생산],또는 비행정 전문회사인
가와니시[川西-1식 비행정 생산]항공회사에서 일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알고 본즉 그런 전문 교육이나 경력이 없는 분이었다.
단지 타고난 재주꾼이고 항공 메니어였다.
고향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신안 부락이다.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아 라디오도 만들었고
오토바이 엔진으로 전봇대 높이를 단시간이나마 날았던
비행기를 직접 제작했었다.
원래 부잣집의 아들로서 해군에 들어오기 전에 시골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고 한다.
제해호가 착수 하는 장면 - 구하기 힘든 사진이다
해군 본부 김 한솔 중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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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후 비교적 늦은 나이인 33 살에 해군에 들어갔다
[기술 좋은 그에게 좌익들이 여러 수리 일을 맡겼는데
수복 후에 이 일이 트집이 될 가능성이 있자 군에 갔다는 증언이 있다.]
조 경연 씨는 해군 항공대가 해산 할 무렵 해군 중령으로 제대하고
고향인 강진으로 돌아와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1년 작고하였다.
해군이 더 이상의 항공대 제작과 운용을 못하게 되자
실망한 그는 군복을 벗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사업을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든다.
강진군의 신원면에는 아직도 그 분의 며느님이 살아 계시고
집에 조 경연 씨가 남긴 조종복등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선배의 업적을 기린 해군 항공대는 포항의 항공대 사령부의
한 건물에 경연관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었던 조 경연 씨, 그리고 한국 해군
항공과와 항공대의 인사들은 물론 제해호는 한국 국방사나
항공 산업사에서 크게 평가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엉성한 창고에서 T-6를 개조하는 해군 항공반[항공과 설치
이전 가칭]요원들.
이들은 일본 해군 항공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던 문관들이었다.
선견지명이 있던 당시 해군에서 이들을 전원 고용했었다.
현재 KAI에서 국산 초음속 연습기 T-50을 제조하는
현대식 조립 현장과 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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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미래 한국이 국가 전략산업으로 성장시킬 수도
있는 항공기 생산의 선구자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항공 관련 전문 교육도 받지 않은 분들이 외부 기술 지원없이
그처럼 놀랄만한 일을 해냈다는 것은 한국 과학 인력 자원이
원석(原石)상태에서도 그 잠재력을 보였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만약 그 때 미 해군 고문단이 이 항공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속 운영하게 했었고 그 뒤 국가의 재정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한
박 정희 정부 때 해군의 이 항공기 제작을 미래 투자적으로
적극 후원했더라면 오늘날 어떤 결과로 발전했을까?
가능성을 상상해볼 한 사례가 있다.
믿을 수없는 제해호가 탄생하기 2 년 전 미군 불하된
미군 찦 차체와 엔진에 드럼통을 두들겨 만들었다는
‘시발’승용차가 출현했었다.
그 뒤 우여곡절은 겪었으나 이 시발 자동차 제작은
한국 자동차 공업의 초라했지만 소중한 출발이었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세계 5위를 넘보는
거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첫 단추였었던 것이다.
시발 자동차와 오늘날 세계로 뻗는 한국 자동차 산업은
제해호와 이를 제작한 인재들이 계속 활동을 했다면
대단히 많은 항공인재들이 배출 되었었고 겨우 본격적인 시동을 거는
한국 항공 산업을 훨씬 전에 본 궤도에 올려놨을지도
몰랐다는 상상도 가능케 한다.
일본은 전시 대형 비행정을 제작하던 기술을 그대로
간직해서 해상 자위대용 대형 비행정을 제작했다.
일본의 비행정 제조 기술은 현재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비행정 제조업체 가와니시가 이름을 바꾼 신메이와
PS-1 비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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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제해호의 시작과 끝을 소개하는 간단한 첫 글을
소개했지만 한국 항공기의 원조 제해호는 내가 항상 개발과 운용에
참여하신 분들을 찾아뵙고 그 자세한 이력을
국내 사회에 소개해보겠다는 염원을 지녀왔었던 대상이었다.
이 제해호에 대한 나의 특별한 관심은 그 배경이 있었다.
나는 아직 아장거리는 아기 시절 금강 하구에서
제해호를 처음 보았었다.
그때 제해호는 밀물 때 금강 어구에서 상류 쪽으로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상공으로 박차 올랐었다.
정말 장쾌한 장면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이 바로 앞 상공으로
스쳐 지나가는 비행정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
쌍발인 그 비행정은 폭음이 무척 컸었고 기체를
푸른색 아니면 녹색으로 도장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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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조 경연 씨의 오른 팔 역할을 하며 고생하였던
정 회근 대위가 아직도 생존해 계셔서 자신이 직접 만든
제해호의 모형을 포항 해군 항공대에 기증했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꼭 한번 만나 뵈려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해군 항공대에 개발에 참여했던 정 회근 대위가
제해호 모형을 직접 깎아 만든 모형을 기증하고 있다.
이 모형이 현재도 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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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일본에서 항공 공부를 제대로 하신 분이다.
제해호 설계와 제작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기사에 이 분의 사시는 곳이 거제시 신현읍이라는
글도 있어서 접촉을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지금도 건강하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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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블로그를 하는 동안 제해호에 관한 취재가
성공적으로 되어서 추가적인 글을 다시 쓸 날이 있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