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기도는 이루어지나 봅니다.
시흥동 성당의 유리화 복원을 결정하신 주수욱 신부님과 시흥동 성당 신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래 내용은 시흥동 성당 유리화 작가인 고 이남규 루가 화백의 아내 조후종이 쓴 <이남규, 한국 유리화의 선구자>에서
시흥동 성당 유리화에 관한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다시 책을 재인쇄하게 된다면 복원된 내용도 꼭 첨부하여 다시 기록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가 유리화 공방 (www.lukegalss.com)
시흥동 성당의 유리화
중림동 성당의 유리화가 첫 작품으로 기억되고 명동성당이 고통 가운데 이루어진 복원작업으로 기억된다면 가장 큰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시흥동 성당 작품이다.
한 폭의 크기는 세로 육미터 가로 일미터 사이즈로서, 스물 한 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한 벽면을 이루고 있다. 성전 뒷면 전체벽이 유리화로 그 자체가 외벽이 되는 셈이다. 시흥동 성당 유리화를 완성하고 났을 때 작품 크기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유리화의 단일 크기로는 동양 최대의 크기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파리에서 같이 공부했던 강석원 선생께서 설계를 하고 시공하면서 유리화 제작을 의뢰해 왔다. 이문주 신부님이 계실 때였다.
바깥에서 성전 뒤 벽면을 통과해서 성전 안쪽으로 비추는 빛은 내부 전체를 신비스런 빛의 색으로 채광하여 성전 안을 온통 환상의 분위기로 바꾸어 버린다.
유리화 작품 ‘빛이 있으라’ 는 암흑 속에서, 또는 우주의 혼돈 가운데서 서서히 생성하는 빛의 순간을 표현했다. 칠흑 같은 어둠의 빛깔로부터 점차 밝아지며 블루우 블랙에서 초록의 빛으로 바뀌어 간다. 비로소 세상은 오색찬란한 광명의 빛깔로 눈이 부시다. 유리화에 대한 예비지식이 달리 없어도 빛을 통해 보이는 유리화는 신비 그 자체이다.
유리의 컷팅 각이 섬세할수록 그 시간과 노고는 같이 비례한다. 가까이에서 한 부분,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커팅 각이 살아나며 조각은 모자이크 집합체가 되는 것이다. 그 유리 조각 하나하나에 손길이 가고 색체를 넣고 혼을 새겨 넣었다.
시흥동 성당의 유리화는 두꺼운 유리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견고하고 투명하면서도 다듬지 않은 원석의 투박함을 보여준다. 그 두꺼운 유리에 채색된 빛깔은 깊이와 발광에 강도를 더해 준다.
시흥동 성당 건물 자체는 실용성 있게 지어진 건축으로 기교를 거의 부리지 않았다. 이를 보완이라도 하듯 유리화로서 성당 안의 전체 분위기를 풍부하게 살렸다.
그러나 제작 완성 후 얼마 있지 않아 그 유리화에 속상한 일이 일어났다. 유리화 벽면의 시야가 잘려지게 된 것이다. 앞면이 열린 다락형태가 뒷벽에 부착되어 새로이 지어지고 그 다락은 현재 성가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유리화는 전체 규모에서 위로 삼분의 일 정도가 잘려서 안 보이게 되고 아랫부분은 좌석에 가려 뒤 벽 구실만 할 뿐 유리화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애석한 일이다. 차라리 성당 밖으로 나가서 그 벽면을 바라 볼 때에야 겨우 작품의 크기와 전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1996년 유리화 도록제작 당시에도 안쪽에서의 촬영이 불가능해서 바깥으로 나가 뒷면에서 찍은 사진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겨우 본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성전의 크기는 한정된 것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라 불가피한 일이라고는 하나 작품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작품이 제대로 보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찾아가 부탁도 드려보았지만 성당 공간의 형편상 어쩔 수 없다는 답만 들었을 뿐이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에 더 이상 별도리가 없었다. 작품이 제대로 감상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지 않아 서운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너무 좋은 작품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지 않나 하는 교만한 마음이 들 때도 있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2010 조후종 저, <이남규, 한국 유리화의 선구자>, 열화당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