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0편은 제4권을 여는 시일 뿐만 아니라 150여 편의 시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원조 시'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92편은 안식일 찬송 시입니다. 90편과 92편은 각각 표제어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유일무이한 특징을 지닌 시들입니다. 이 시들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세월 참 빠르죠? 여러분의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어제 같지 않으신가요? 옛날 어른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환갑 되었다고 하셨는데, 여기 계신 분들 다 환갑 지나셨잖아요. 시편 90편은 인생의 한계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그 내용을 보기 전에 표제어를 보겠습니다. 표제어에 단순히 '모세의 기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적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등장하는 성경의 인물들 중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을 맨 처음 들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오늘 모세를 공부하고 있으니 당연히 모세겠지요. 시편 90편을 읽기 전에 모세오경에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사람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 구절이 어디일까요?
함께 신명기 33장 1절을 보겠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이고, 그중 33장은 모세의 마지막 유언적 노래를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33장 1절이 시작하면서 뭐라고 말하나요?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여기 신명기 33장 1절이 성경에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표현한 첫 구절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부름을 받은 것은 모세가 처음입니다.
그 외에 '여호와의 종'이라는 표현은 누가 맨 처음 들었을까요? 그것도 모세입니다. 함께 여호수아 1장 1절을 보실까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성경에서 사람을 가리켜 '여호와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도 모세가 처음입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호도 처음 들었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칭호도 처음 들은 사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구약에서는 신명기 33장 1절 이후에, 특히 사사기를 읽어 보면 천사가 인간의 모습으로 주의 종들에게 나타날 때 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기드온에게 나타나며…" 하는 식으로 표현되지요. 신약에 오면 누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될까요? 디모데전서 6장 11절을 보시죠. 바울이 구체적으로는 디모데를,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 의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4권을 여는 첫 시의 표제인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를 구약 시대로 한정해서 읽으면 '하나님과 직접 교통했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기도'라는 뜻이 되지만, 신약적인 관점으로 읽으면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 모두의 기도로 다가오게 됩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다윗의 시'가 붙어 있었고, 아삽의 시도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든 아삽이든 모세보다는 한참 후대의 인물들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시대의 인물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가 모세의 기도라면 150편의 시편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시를 '원조 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시는 모두 17개 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2절: 하나님에 대한 찬양
3~12절: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깨달음과 간증
13~17절: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
1절과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90편 바로 앞의 시들을 보십시오. 88편에는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86편 1절 "여호와여", 85편 1절 "여호와여", 84편 1절 "만군의 여호와여", 83편 1절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나님' 혹은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90편 1절은 뭐라고 부릅니까? "주여"라고 부릅니다. 이 '주여'를 히브리어로 읽으면 '아도나이(Adonai)'입니다. '아돈'은 말 그대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여(엘로힘)"라고 부를 때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르는 것이고, "여호와여"라고 부르는 것은 언약 관계를 부르는 것이지만,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호칭 속에 담겨 있습니다.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91편 9절에도 '거처'라는 똑같은 히브리어 단어 '마온(Maon)'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마온'은 화려한 궁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짐승들의 굴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전일 수도 있고, 나그네의 임시 숙소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거기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산이 생기기 전입니다. 왜 하필 바다가 생기기 전이 아니라 산이 생기기 전일까요? 팔레스타인에서는 거센 사막 바람이 불어 지형이 변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것이 산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상징이 바로 산이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기도로 산을 옮기리라"라는 표현도 산이 요지부동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코 변하지 않는 상징인 그 산이 생기기 전, 그 산을 받치고 있는 땅과 세계가 조성되기도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의 핵심 단어가 바로 2절의 '영원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왜냐하면 3절부터는 이 '영원'과 정반대되는 단어들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4절: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니이다
5절: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9절: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절: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 모든 표현은 2절에 나오는 '영원'과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함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지나가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거대한 자연이나 고산 지대에 올라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Awe experience) 교만은 사라지고 겸손해집니다. 시인은 지금 공간적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심 앞에서 인간의 유한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하던 때가 엊그제 같고, 첫사랑을 만나 가슴 뛰던 때가 엊그제 같으며, 갓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 목회를 시작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인생이 이렇게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3절부터 12절까지 시인이 무엇이라 고백하는지 보시지요.
3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인간이 본래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으나 범죄한 결과로 흙으로 돌아가게 된 현실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노래합니다. 창세기 3장 19절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5절: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이 구절을 쓴 사람이 모세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모세가 인생을 "홍수처럼 쓸어가신다"라고 표현할 때 무엇을 떠올렸겠습니까? 바로 홍해 사건입니다.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밤새 동풍이 불어 갈라졌던 바다가 다시 합쳐지며 바로의 군대가 한순간에 수장되던 그 광경을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100년이라는 한 세대의 관점에서 내려다보면, 수많은 인류가 마치 홍수에 휩쓸려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갑니다.
7~8절: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은밀한 내면의 죄, 교만, 이기심까지도 주님의 얼굴빛 앞에 낱낱이 드러납니다.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조선 왕조 왕들의 평균 수명이 40대 중반이었고,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의 평균 수명도 40대 중후반이었습니다. 모세 당시 70~80세는 비교적 천수를 누린 긴 수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70년, 80년을 살아도 그 세월의 본질은 수고와 슬픔뿐이며 신속히 날아갑니다.
시편 90편 12절이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노래한다면, 312절은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고발합니다. 연약하여 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한순간이며, 순식간에 지나가고 신속히 날아가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철권을 휘두르던 권력자들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성인들과 예술가들도 모두 세월 앞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유한함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시편 90편의 핵심 요절인 12절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는 120세를 살았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그가 남긴 기도는 "인생이 얼마나 연약하고 짧은지를 깨달아 날수를 계수할 줄 아는 지혜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계수하다(마나)'라는 단어는 다니엘서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메네'와 어원이 같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한 인생의 의미를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13절부터 17절까지 기도가 이어집니다.
14절: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으므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힘입어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기를 간구합니다.
15절: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고생하고 고통받았던 세월만큼 하나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채워 달라는 간구입니다.
17절: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얼마나 간절했으면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겠습니까? 농사를 지었든, 세탁소를 운영했든, 자녀를 길렀든, 지나온 내 모든 수고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의미 있는 열매로 영구히 남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