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은 홍유한 선생 유택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이 1784년, 이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연마한 선각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농은 홍유한(隴隱 洪儒漢, 1726-1785년)이다. 비록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九邱里)는 바로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서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유교와 불교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리를 발견하고 바로 이곳에서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간 학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했다.
본래 구구리는 순흥부 동원면(順興府 東園面) 지역으로 마을 뒷산에 무학봉이 있는데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시전(詩傳)에 있는 옛 뜻을 따라 ‘구고’라 하였다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현리, 이목리와 등영리, 상암리 각 일부를 병합해 ‘구구리’라 하여 영주군 단산면에 편입되었다.
홍유한은 본관이 안동현의 풍기(豊基)인 풍산 홍씨(豊山 洪氏) 명문가의 16대손으로 서울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미 8세경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한 신동으로 전해진다. 그의 조부모는 손자의 장래를 위해 고향인 충청도 예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고 16세 때인 1742년 그는 당시 유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순암 안정복, 녹암 권일신, 복암 이기양 등과 함께 수학했다.
1750년경 성호 이익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그의 제자들도 이 신학문과 종교 서적을 탐독하게 됐고 이때 그는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성호 이익은 서학을 받아들임에 있어 피상적인 보유론적 입장에 머물렀고 함께 수학하던 순암 안정복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고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홍유한은 유교와 불교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여기에서 발견하고 1757년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1775년까지 18년간 홀로 신앙을 연마했다. 그러던 중 다시 1775년 더욱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아래 있는 순흥 고을 구고리(현재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로 옮겨 가서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냈다. 선종 후 그의 시신은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를 처음 깨달은 후부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해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쌓기 위해 매월 7일째 되는 날을 주일(主日)로 정해 세속의 모든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나아가 욕정을 금하여 30세 이후는 정절(貞節)의 덕을 실천했다. 그리하여 천진암 강학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는 서학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최초의 수덕자로 기록되었다.
홍유한의 신앙은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져 13명이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하였다. 그 중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고, 홍낙민 루카 · 강완숙 골룸바 · 홍필주 필립보 · 홍재영 프로타시오 · 심조이 바르바라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현재 구구리의 하이목 마을에 있는 홍유한 유택지에는 당시 그가 사용하던 대문이 남아 있는데, 그 위에 경종 4년(1724년)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洪重明)이 하사받은 효자문 현판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순교자 권일신과 서신 왕래하던 친필 서찰들이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현재는 천진암의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내용 출처: 가톨릭 굿뉴스 성지 소개 -사진 포함 >
우곡 성지
소백산맥 자락의 문경 지방과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있는 주흘산(1106m), 조령산(1017m), 백화산(1063m), 대미산(1115m) 등은 이 지방에서 최고봉에 속하는 산들이다. 이 산들 사이의 조령(642m), 이화령(548m), 하늘재(525m) 등은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이름난 통로로 숱한 전설과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일명 ‘새재’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예로부터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다. 그런 이유로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서울로 과거(科擧)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陳安里)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순교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와 순교 복자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6년 15세 때 모방(Manbant, 羅, 1803-1839년) 신부에 의해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1820?∼1837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1837년 11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부제 때인 1846년에는 한국의 첫 사제이자 동료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 아픔을 겪은 후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상해 서가회(徐家匯) 성당에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다.
그 해 12월 변문을 떠나 어렵게 조선으로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道)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은 그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 언양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다. 이때 스승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에서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다행히 죽림굴에서 빠져나온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Berneux, 張, 1814-1866년)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내용 출처: 가톨릭 굿뉴스 성지 소개 -사진 포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