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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1~14절을 중심으로~
박 재 순
1 세계화와 동서 문명의 만남
우리는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민주화, 고도 산업화, 세계화를 동시에 겪고 있다. 이것은 농업정착 사회를 이룬지 1만년, 기록된 국가문명 5천년 역사에서 우리 세대만 누리는 행운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사적인 변화는 여기에 걸맞는 새로운 삶과 철학을 요구한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동서 문명의 창조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 500년 전부터 서구문명의 팽창과 확산으로 시작된 세계화는 유럽과 미국 밖에서 동서 문명의 충돌과 융합을 초래했다. 정신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지역은 동아시아 3국 한국, 일본,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에서 서구 정신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기독교와 한국·아시아 정신문화가 깊게 창조적으로 만났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가 줄기차게 진행되었다는 것과 기독교가 민족사회의 중심과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왔다는 점에서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 우리에게는 유교·불교·도교와 같은 동아시아 종교문화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풍성하게 생생하게 살아 있다.
오늘 우리가 동서 정신문화가 가장 깊고 풍성하게 만나는 정신사적 문명사적 과정의 한 복판에 있다는 것은 인류사적으로 특별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시사한다.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생을 위한 힘과 지혜를 제공하고 세계평화의 철학과 정신을 제시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세계평화시대를 열어갈 길을 열 책임을 지고 있다. 어쩌면 인류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평화시대를 열기 위해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이 혹독한 시련과 험난한 고통의 길을 걸어 온지도 모른다.
민주화, 산업화, 세계화 속에서 우리는 문명사적인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밝은 미래와 함께 어둡고 고통스런 미래를 보여준다. 오늘날 자본과 시장 중심으로 전개되는 세계화 속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삶의 뿌리가 뽑혀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기술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일 자리는 줄고, 가정은 파괴되고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빈곤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화·산업화·세계화는 인류의 새로운 미래와 함께 혼돈과 파멸의 깊은 심연을 보여준다. 지금이야말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요구된다. 자본과 시장의 세계화에 맞서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오늘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운동에 앞장 서야 할 한국교회가 깊은 불신을 받고 있다. 불신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한국사회 대중 속에 확산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교회제도와 형식도 잘 갖추었고 사람과 돈도 많고 선교에 대한 열정도 넘친다. 그러나 철저한 회개와 근본적인 자기성찰이 없다.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고 시대의 아픔과 문제에 대한 통찰이 없다. 한 마디로 깊은 영성과 바른 실천을 지향하는 신학, 철학이 없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나서 제 구실을 하려면 깊은 영성과 철학(신학)을 가져야 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한국 근현대의 이런 문명사적 상황과 사명을 깊이 자각하고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정신과 철학을 제시했다. 이들은 기독교 정신, 그리스철학과 서구 근대철학의 이성적 사고, 동아시아의 도(道) 철학을 한국의 한(韓, 큰 하나) 정신으로 융섭하여 깊은 영성과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민주적 생활 철학을 닦아냈다.
오늘은 유영모·함석헌의 철학을 말하기 위한 준비 작업의 하나로서 요한복음의 첫 머리를 중심으로 기독교 정신과 그리스철학의 만남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요한복음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것은 믿음과 앎, 앎과 행함, 개인의 영성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요한복음이 구도자적 수행과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는 동아시아인의 심성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2 그리스의 로고스 철학과 성경의 만남
오늘 읽은 성경본문도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제국에 의해 지중해를 중심으로 세계화가 강력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생성되었다. 예수님과 초대 기독교는 오늘 우리처럼 지중해 세계에서 동서 문명이 합류하는 상황에서 살았다. 지중해 동쪽의 변두리 지역에서 예수님과 초대기독교는 정복과 수탈을 일삼는 서방문명의 지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다스리는 평화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리스 로마의 거대하고 화려한 제국주의 물질문명과 군사력 그리고 이성주의 철학에 맞서 신의 사랑과 정의의 말씀이 실현되는 나라를 선포한 것이다. 그리스·로마가 권력과 부, 문화의 힘으로 세계화를 추진했다면 예수님과 초대교회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추진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는 세계화 운동이었다. 위로부터의 세계화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가 만나서 유럽문명이 형성되었다.
기독교와 그리스철학의 만남,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와 위로부터의 세계화의 만남은 성공했는가? 요한복음은 성경의 말씀, 창조의 말씀, 다바르를 로고스로 번역했다. 이것은 문명사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고 그 문제가 유럽역사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 개념과 히브리 신앙의 말씀 개념이 서구인들의 삶 속에서 문명적 세계관적 차이를 극복하고 화해와 융합을 이루었다면 서구사회는 위대한 기독교 문명을 이룩했을 것이다. 오늘 서구 기독교문명이 해체되고 쇠퇴한 것은 로고스와 다바르(말씀)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참된 화해와 융합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희생자에게서 구원을 발견하는 종교인데 서구문명을 주도하는 것은 승리자 정복자 의식이다. 실패자, 패배자를 뜻하는 loser가 욕설로 널리 쓰이는 것은 기독교보다 그리스 문명이 서구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을 뜻한다.
1) 그리스문명의 군사적 정복적 성격과 그리스 철학
로고스와 다바르의 차이는 단순히 개념적, 사상적 차이만이 아니라 사회 신분적 차이를 내포한다. 말씀과 로고스는 어떻게 다른가? 먼저 로고스를 살펴보자. 본래 로고스는 “모으다. (수를) 세다, (기억한 것을) 열거하다. 말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본래 로고스는 계산의 의미를 지녔으며, 전체 틀의 윤곽에 대한 직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말이 말하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인간이성의 작용과 행위를 나타내고, “이성, 원리, 법칙, 논리, 말”을 뜻하게 되었다. 로고스는 사물을 창조하거나 생성시키거나 변혁시키지 못하고 주어진 조건이나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소통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보았으나 우주만물의 변화는 우주의 불변적인 격식, 법칙, 법도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불변적인 격식과 법칙은 이성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로고스가 만물을 생성하고 창조하고 발생시키며 관장하는 내적 원리이며 힘이라고 함으로써 로고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준다. 그러나 로고스의 창조와 생성도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는 성경의 말씀과는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로고스는 주체성과 의지를 나타낸다기보다 항구적 원리와 법칙성을 나타내며, 창조와 변혁과 초월의 성격보다는 항구적 질서와 격식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세상을 창조하고 역사를 변혁시키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성경의 말씀 다바르와는 전혀 달랐다. 일반적으로 로고스가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하는 것이라면 다바르는 창조하고 생성시키며 주체적이고 인격적이다.
로고스를 핵심어로 삼는 그리스철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첫째 그리스철학은 그리스 식민지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의 정치사가 그렇지만 특히 그리스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들의 국가이고 문명이었다. 끊임없는 민족전쟁을 통해서 승리한 정복자들이 노예와 식민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제국과 물질적 번영을 누리는 문명세계를 이룩했다. 그들의 철학은 고상하고 귀족적이며 아름답고 심오하지만 그들의 정치와 문화는 매우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귀족적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는 노예제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 없었고 현실을 변혁하기보다 현실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이성적으로 통제하고 이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의 정복자적인 문화가 철학에 반영되어 있다. 사물과 존재를 인식하는 인식론 자체가 공격적이고 정복적이다. 대표적인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사물, 존재와 사건을 인식하는 4원인, 형상인, 목적인, 질료인, 운동인을 제시했다. 여기서 원인은 아이티아인데 법정에서 신문과 공격을 뜻하는 말이다. 존재와 사물을 인식할 때 형사가 취조하고 신문하듯이 “네 정체가 무엇이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 성분이 무엇이고, 어떻게 움직였느냐?”고 따져 묻는 것이다. 서구의 인식론에는 인식대상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없다. 서구철학은 사회법정의 논변과 설득에 기원을 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둘째 그리스 철학은 비신화화, 신화비판에서 시작했다. 그리스 철학은 자연 현상과 역사 사건에 대한 인식에서 신의 개입이나 기적을 배제하고 자연 현상과 역사 사건들의 인과 관계를 밝히고 객관적 항구적 법칙성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리스철학은 인간이성인 로고스를 인간의 본질과 본성으로 볼 뿐 아니라 국가와 역사, 우주와 신의 본질과 본성이라고 보았다. 인간이성의 작용인 로고스를 우주와 신, 국가와 역사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주어진 조건에 대한 이성적 대처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주어진 조건에 체념하고 순응하거나 조정을 통해 조건을 완화하려고 했지 주어진 조건을 초월하거나 전적으로 변혁하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조건들에 속박되었기 때문에 우연[운명]과 필연[법칙]이 일치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자연적 위력들이 신들로 표상되었다. 위력적인 타자, 주어진 조건들을 이성능력인 로고스를 통해서 소통하고 설득하려고 했다. 타자, 현실, 조건을 이성적으로 로고스적으로 조종하고 움직이려 했다. 합리적으로 경영하려고 했다.
그리스철학이 이처럼 인간의 로고스 안에 머물렀기 때문에 로고스의 인식대상인 물질현상과 우주세계 그리고 로고스의 인식내용인 관념, 이데아의 세계, 실체와 법칙, 논리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철학은 주어진 조건에 충실한 사유였다. 언제나 주어진 재료, 생각, 의지(행위)로써 일과 사물이 제작되고 생성된다.
따라서 그리스철학에서는 주어진 현실, 조건, 재료 없이 이루어지는 창조, 다시 말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사상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주어진 물질세계(자연 우주 현실)와 인간이성에 의해 파악된 이상 세계(이데아와 관념의 세계, 원리, 법칙, 이론의 세계)가 탐구될 뿐 순수한 주체 ‘나’의 절대적 초월적 자유와 의지를 말하지 않았다. 주어진 현실과 조건을 혁명적으로 변혁하거나 초월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고 맞추어 유리하고 현명하게 합리적으로 대처해가자는 생각이었다.
플라톤에게서 인간의 덕은 “적극적인 탁월성의 성취요, 인간의 온갖 능력이 이상적으로 발휘되어 완성에 도달함”을 뜻한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네 가지 덕을 말했다. 지혜는 국가의 궁극적 목적, 이상적 가치에 대한 지식이며, 용기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향락에의 탐닉을 물리치는 견고함이며, 절제는 강자와 약자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덕이며 균형의 원리이다. 정의는 이 세 가지 덕이 함께 모여서 이루게 될 절정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세 계급은 영혼의 세 부분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생산자 계급의 욕망은 절제의 덕과 상응하고 전사 계급의 기개는 용기의 덕과 상응하고 지배계급의 이성은 지혜의 덕과 상응한다. 인간 영혼의 최고의 덕은 이성의 능력에 있다.
이러한 로고스 중심의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공격적 인식론의 반성이다. 초월적 차원, 신을 배제하고 인식대상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없는 공격적 분석적 인식론이 과학을 위해 필요하나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인식론이 과학과 기술을 자연과 인식대상에 대해서 적대적 공격적 정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태계패괴와 공동체 파괴는 이런 인식론에서 나온 게 아닌가? 인식대상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지닌 인식론이 과학을 이끌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발명을 위해서도 영감이 필요하고 인식대상에 대한 감정이입(感情移入)과 존중, 신뢰가 필요하다. 인간의 분석적이고 지배적인 이성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그리스 철학은 사회정치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한 그리스철학은 그리스인들이 비교적 안정된 조건 속에서 살았음을 뜻한다. 제국주의적으로 정복자로서 식민지와 노예들을 통치하고 경영하는 위치에 있었을 때는 더욱 그렇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산들에 둘러싸여 서로 고립된 작은 도시국가들 안에서 자유민들로서 안정되고 독립된 삶을 사는 그들에게는 혁명적 초월적 의지와 사고를 가질 필요가 없고 주어진 현실과 조건에 맞추어 지혜롭고 평화롭게 이성적으로 사는 일이 중요했다.
한 마디로 그리스 철학은 이성을 가지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진선미의 삶을 살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욕망과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루터는 인간 이성이 악마의 창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인간 이성이 악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성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사용하는 인간의 영혼, 주체가 죄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입장이다. 기독교는 인간 주체를 문제 삼는다.
2) 하나님의 창조와 주체성의 진리
성경에서는 주체성의 진리가 강조된다. 성경이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도 사회역사적으로 주체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떠돌이요, 종살이하는 억눌린 백성이며 패배자요 희생자였다. 이들은 결코 불의하고 잔혹한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기보다 이 조건을 돌파하고 새롭게 창조하고 초월해야 했다. 따라서 현실을 변혁하고 돌파하는 의지, 주체가 강조된다. 이렇게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민중의 고난의 상황에서는 단순히 사물과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데 머물 수 없고, 현실의 감추어진 이면을 꿰뚫어보고, 현실을 변혁하고 넘어서는 실천적 의지와 행동이 요구된다. 이들에게서 창조 신앙이 나왔다. 이들의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 “빛이 있어라!”고 명령하니 없었던 빛이 생겨났다. “육지와 바다가 갈라지라!” 하니 그렇게 되었다.
자연과 물질의 세계 이전에 관념과 법칙의 세계 이전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하시는 의지가 있었다. 의지의 주체가 있었다. 신의 창조는 주어진 현상과 존재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주어진 물질세계가 (그것이 하나의 점이라고 해도) 어떻게 변화되고 발전되고 전개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를 말하는 것은 주어진 물질세계 이전에 그 세계가 존재하고 작용하기 이전에 없음과 빔 속에서 그것을 있게 하고 움직이는 의지와 뜻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에 우주 위에 우주의 중심에 자유로운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얼, 영, 정신인 주체가 우주의 주인으로서 있다!
이런 주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주체가 없다고 생각하면 우주 전체가 캄캄하고 황막하여 죽은 것 같은데 이 우주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면 우주 전체가 살아 생동하고 나의 몸과 맘이 우주 전체와 하나로 이어져 소통하는 것을 느낀다.
3) 하나님의 이름--야훼 “나다!”
히브리인들의 창조자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만물과 뭇 생명의 근원이고 주체이므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영원한 주체, 거룩한 영, 얼, ‘참된 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 영, 혼이 ‘나’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 생명, 정신을 움직이고 진화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주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주었다. 주체를 상실하고 종살이하는 백성에게 참된 주체를 회복시키라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였다. “스스로 있는 자” 다시 말해 “나는 나다.”라고 하였다.(출3,13~4) 이것은 여호와, 야훼, 에흐예 에흐예라는 히브리어의 풀이말이다. I am that I am. I am! 가장 정확한 풀이는 그저 “나다!”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이 자기 이름 말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영원한 주체, 영원한 ‘나’이신 하나님은 모든 물질과 존재, 생명과 정신의 창조자적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연현상이나 사건, 개별적 존재자들처럼 이름 지을 수 있는 한정된 대상이 아니다.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고 한정지을 수 없는 영원한 궁극적인 주체, 자유, 의지일 뿐이다. 모든 것을 살리고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자라게 하고 완성하는 주체이고 근원일 뿐이다. 그래서 “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분이다.
하나님이 “나다!”라고 자신을 알리는 역사의 자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국의 불의와 억압으로 고통당하며 종살이하는 상황이다. 짓밟힌 민중이 주체를 상실하고 고통 받는 자리에 하나님은 “나다!”하며 영원한 창조와 역사변혁의 주체로 나서신다.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이 편집되고 완성된 자리도 바벨론에서 종살이 하던 상황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나다!”하면서 역사 속으로, 민중현장으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어떤 절망적인 조건과 상황도 희망으로 바꾸고, 돌무덤을 열어젖히고 부활의 생명으로 채워주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불신을 신앙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신이다.
3 요한복음 풀이
승리한 자유민의 진리와 패배한 희생자의 진리가 만나서 화해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류사의 목적이고 완성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좌절하고 패배한 민중의 상황을 드러내며 기독교 진리는 희생자의 진리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희생자(희생양)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요한복음에서 신의 사랑과 의, 말씀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번역한 것은 매우 과감한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 장벽뿐 아니라 사회적 장벽을 넘은 것이다. 신의 사랑과 의의 말씀이 인간 로고스와 결합된 것이다. 해방의 말씀이 정복자의 이성과 융합되었다.
이제 요한복음의 말씀에로 돌아가자.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1절)
요한복음은 그리스 철학의 핵심어 로고스를 끌어들이면서도 구약성경의 핵심사상을 부각시킨다. 창조의 말씀이 세상을 빛과 생명으로 채운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의 첫머리는 구약성경의 중심사상을 강조하였다. 구약성경은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로서 긍정한다. 이 점에서 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와는 다르다. 요한복음은 구약성경의 중심과 그리스철학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로고스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그리스철학에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로고스는 창조나 생성의 의미를 가질 수 없고, 사랑이나 은혜를 나타낼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는 창조의 주체이고 근거이며 생명과 빛, 은혜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1) 혼돈과 공허의 깊음 속에서 말씀에 매달린 세계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것은 모두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3~4절)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의 깊음 위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 말씀에서, 사랑과 의에서 우주물질세계가 나왔다. 신의 사랑과 의가 우주만물의 창조적 근원이고 지탱하는 근거이고 힘이다. 말씀이 아니면 우주세계는 혼돈과 공허의 심연 속으로 몰락한다. 말씀이 없으면 우주 세상은 몰락한다.
요한복음 1장 3~4절은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 생겨났다고 한다. 함석헌은 이 진리를 우주만물과 역사와 관련지어 매우 역동적으로 풀이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말씀으로 만물이 지은 바 되었다.’ 이대로 진리다. 이 우주는 말씀을 가진 우주다. 법칙의 나타남이 아니다. 기계의 움직임이 아니다. 물질의 변천과정이 아니다. 산 말씀의 나타남이요, 그 말씀에 돌아감이요, 말씀하고 있음이다. 요한은 또 이 말씀의 본질을 설명하여 사랑(아가페)이라 하였다. 우리의 역사는 아가페의 역사다. 역사현상의 뒤에 서는 인격자는 아가페다. 우주의 모든 현상은 이 사랑의 말씀을 발하는 음성이다. 히말라야의 높은 봉도, 미시시피의 긴 흐름도, 태평양의 큰 물결도 이 사랑의 말씀을 표하는 부호다. 설선(雪線) 위에 웃는 천자만홍(千紫萬紅), 숲속에 우는 가지각색 새와 벌레,...물결 위에 부서지는 달빛, 구름 위에 깜작이는 별들, 모든 것이 이 말씀의 표현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자연보다도 더 높이 깊이 감동적으로 이 사랑의 말씀을 발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인데 사랑과 정의 안에서 우주세계는 창조되고 지탱되고 발전하고 진화하며 실현되고 완성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없으면 우주 생명 세계가 생겨나지 않았고 존재할 수 없고 목적에 이를 수 없다. 이런 주장은 순전히 자연과학적 성찰로는 확인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의 지나친 탐욕과 불의가 자연생태계를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파괴하는 현실은 생태계가 사랑과 정의 안에서 지탱될 수 있을 확인해 준다.
말씀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은 이기심이나 당파심이 없는 것으로 정의와 일치한다. 아가페는 절대의 자리, 전체 하나 됨의 자리이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절대의 자리에서는 개인이 있으면서도 또 전민족 전인류가 한 사람이다. 개인 속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 속에서 개인을 보는 것이 참의 눈이다. 참에는 하나도 여럿도 없다. 나도 너도 없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없지만 또 다 있다.” 이 자리는 살고 죽고 이기고 지고가 없는 자리이다. 무조건 사는 자리다. 죽어도 살고 저도 이기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는 믿음으로, 하나 됨으로만 들어간다.
역사는 사랑에서 나왔고, 사랑에 이끌려 사랑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 ‘아가페’를 공자는 ‘인’(仁)으로 보았고, 노자는 ‘도’(道)로 보았고, 석가는 ‘빔’(空)으로 보았다. 노자의 말대로 억지로 붙인 이름이다. 그 자리에 들어가려는 운동을 믿음이라 해도 좋고, 통일이라 해도 좋고 영화(靈化)라 해도 좋고, 영원으로 돌아간다 해도 좋다.
말씀, 사랑이 창조와 개벽의 근원이며 절대 초월, 주체, 의지이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곧게 되고 하나 됨에 이른다. 초월자 하나님, 우주의 ‘나’는 모든 다양하고 복잡한 물질세계를 초월한 하나, 통일이다. 영혼의 ‘나’는 통일된 초점을 가질 때 비로소 힘이 나고 생동한다. 생명과 정신은 말씀이 없으면 혼돈과 공허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말씀에 의해서만 ‘나’는 혼돈과 공허를 딛고 하나님께로 솟아오를 수 있다. 영혼은 하나 됨(통일)에서 살아나고 힘이 난다. 절대 하나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영혼은 생동한다.
신이 주권적 자유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고 역사를 변혁한다. 이것은 주어진 조건에 안주할 수 없었던, 불의와 억압 속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신앙이다. 주어진 현실의 조건을 돌파하고 혁신하고 초월하려는 강력한 의지와 신앙에서 나온 진리다. 조건을 초월하고 변혁하고 창조하는 주체인 ‘나’의 자유와 진리가 성경에서 제시된다. 신의 명령, 말씀, 의지가 사랑과 정의가 불의하고 잔인한 현실을 변혁하고 초월한다. 불의와 억압의 현실은 혼돈과 공허의 심연이며, 모든 생명과 정신이 빠져드는 멸망과 쇠퇴의 늪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의 토대이고 근거이다. 함석헌은 땅이 있어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하늘이 열려서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땅을 얻기 전에 먼저 마음속에서 하늘이 열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 말씀을 받아야만 나라를 세울 수 있다. 마음속에서 하늘과 통하는 말씀이 없으면 나라는 무너지고 멸망한다.
2) 말씀을 받은 신의 자녀
세상에서는 말씀을 모르고 영접하지 않으나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12~13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 우리의 고향, 집, 본적은 하나님 계신 하늘이다. 땅에 살되 하늘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뿌리가 하늘에 있으니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나그네이고 하늘이 고향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 성경의 인물들이 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존재, 흔들리는 존재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바칠 수 있었다.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인간은 쉽게 늙고 뻣뻣해진다. 70년대까지 여류작가로 유명했던 루이제 린자가 한국에 왔을 때 60이 넘었는데 젊고 생동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랬다. 젊게 사는 비결을 묻자 “나는 나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자기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면 젊게 살 수 있다.
하늘에 뿌리를 둔 사람은 물질과 본능에 휘둘리지 않는다. 감정과 본능, 욕망과 집착에 휘둘리는 나는 자유로운 나가 아니다. 그것은 물질화된 나, 물질의 종이 된 나일뿐이다. 물질이 된 나를 놓아버림으로써 내가 없어짐으로써 죽음으로써 말씀으로 사는 나가 살아나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물질에 매인 육적인 나가 죽고 영의 나로 얼의 나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밀알처럼, 씨알처럼 깨지고 부서지고 녹아지고 흙 속에 버려져서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나,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나, 자유로운 나가 되기까지 나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의 눈에서 편견의 들보가 뽑힐 때까지, 이기심과 탐욕의 들보가 빠질 때까지 나를 놓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하여 진실을 보고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사랑이 솟을 때까지 정의의 실천을 하는 용기가 나올 때까지 나를 놓는 것이다. 함석헌은 아주 작은 티끌처럼 먼지처럼 작은 ‘나’, 사심이 눈동자를 가리면 온 세상이 캄캄해진다고 했다. 사심에 물든 나, 티끌 같은 나만 떼어버리면, 나의 이해관계만 빼버리면 세상이, 모든 일이 대낮처럼 밝아진다.
3) 육신이 된 말씀: 흙(물질) 속에 묻힌 하늘(주체, 영혼)
“(하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의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성육신 인카네이션이라고 하는데, 플라톤철학에서는 인카네이션(육신을 입음)이 이데아 또는 형상이 물질이나 육체에 부분적으로 관련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이데아가 물체와 전적으로 동일화되는 것을 뜻하지 않고 물체에 성격을 부여하는 정도로만 관련되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전적으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철학에서는 하늘의 이데아를 존중하고 땅의 현상은 무상하고 덧없는 것으로 낮추어본다. 위로 올라가는 것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늘이 땅 속으로 내려온 것을 강조한다. 물질 속에 숨은 말씀이다. 질그릇 같은 몸에 보화인 그리스도의 생명, 영이 들어 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와 몸, 말씀과 세상을 일치시키면서도 대립시킨다. 하나님과 혈통, 육정을 대립시킨다. 세상과 물질을 존중하나 세상과 물질의 악한 원리와 경향은 부정한다. 요한복음은 물질과 몸을 전적으로 긍정하면서 물질과 몸의 절대화, 우상화, 악한 원리는 철저히 부정한다. 일원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이 땅 속으로 들어오고, 말씀이 육신 속으로 들어왔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이다. 주역에서 지천태괘(地天泰卦)를 길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괘라고 했다. 하늘이 땅 위에 있으면 흉하고 위태롭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이 겸허하게 땅 속으로 들어오면 평화롭고 형통하다고 했다. 성육신과 지천태는 통한다. 기업가나 정치가, 고위 관료들이 땅바닥에 사는 민심 위에 높이 있으면 흉하고 위태롭다. 그러나 민심 속으로 들어가 민을 높이면 길하고 태평하다.
유영모는 노자가 말하는 진인, 참 사람의 최고 높은 경지인 화광동진(和光同塵)을 햇볕에 그을린 농부의 얼굴에서 보았다. 흙 속에 묻혀 사는 농부에게 하늘의 진리, 최고 가치가 있다. 노자에 대한 이런 해석은 다른 데서 찾아 볼 수 없다. 말구유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보고 어린이와 민중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성경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농부에게서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은 권력욕, 소유욕, 명예욕, 물욕과 색욕에서 벗어나 겸허하게 삶의 바닥에 선 이다. 인생의 바닥에 설 때 십자가에서 부활생명, 하나님의 사랑, 구원을 본다. 거기서 물질, 육신과 함께 썩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 농부의 얼굴에서 화광동진을 볼 때 정치적 민주화도 이루어지고, 세계화의 문제도 실마리가 풀린다.
4) 영혼과 물질의 해방과 실현
성육신의 진리는 영혼과 물질의 실현과 완성을 지향한다. 영혼은 영혼답게 물질은 물질답게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오늘날 물질의 깊은 신비가 드러나며 엄청난 힘과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물질 속에 놀라운 보물을 숨겨놓고 인간에게 찾아서 적절하게 쓰라고 하신 것 같다. 모든 물질은 우주적 깊이와 신비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닿아 있다.
물질과 영혼이 구별되어야 각자 완성될 수 있다. 물질은 인과관계의 법칙을 따르고 영혼은 자기 안에 원인을 가지고 있다. 현대과학에서 물질에 대한 정의가 어려워지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 입자와 파동, 물질과 에너지, 정신과 물질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물질은 인과관계와 법칙으로 설명된다. 모든 물질은 서로 인과관계 속에 있다. 현대과학에서 불확실성이론을 말하는 양자역학의 영역에서도 물질현상은 확률적이지만 원인결과의 합법칙성이 인정된다. 인체의 신경세포나 생리현상에서는 고전물리학의 인과율이 적용된다. 물질은 존재와 활동의 원인, 이유, 까닭이 밖에 타자에게 있다. 프리고진은 미시적 요동의 결과로 거시적으로 안정된 새로운 구조가 생성됨으로써 물질의 자기조직화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 어떤 동인이 주어질 때 자기조직화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비가역적이지만 물질의 인과관계는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물질과 현상을 움직이는 주체 ‘나’, 의식적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 정신, 영혼은 물질적 구조, 신체, 유기체 안에 있으면서 물질의 영역을 초월한다. 물질 현상은 다원적이고 다양하며 복잡하지만 주체인 영혼은 하나 됨(통일)을 추구한다. 모든 영혼은 내적 통일성과 큰 하나의 전체성을 지향한다. 주체인 영혼은 내적 통일. 초점을 가짐으로써 존재한다.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의 전체는 물질과 이성의 빛이 들어갈 수 없다. 하나 또는 전체는 분석이나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다!”하는 하나님은 하나이며 전체이다. 이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람은 주체로 일어서서 전체이며 하나인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하나이며 전체를 지향하고 하나와 전체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주체(영혼)는 존재와 활동의 까닭을 자기 안에 가진다. 제가 저의 까닭이다. 신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와 활동의 근원적인 이유이고 까닭이다. 인과관계가 끊어지는 자리이고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생성되는 자리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절대 자유하고 모든 것에 대해 무한 책임지는 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모든 물질과 관념의 인과관계와 법칙과 논리와 원리를 넘어서 아무 것도 매일 것이 없는 빔과 없음의 자리에서 주체인 ‘나’, 의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인격적 주체와 의지의 자유가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모든 생명과 정신, 역사와 사회의 진정한 변화와 창조는 인격적 주체의 자유의지에서 온다. 물질의 인과관계와 법칙은 인간 로고스에 의해서 발견되고 설명될 수 있으나 창조와 변화의 주체인 나의 자유 의지는 신의 말씀 안에서 생겨나고 움직인다.
성경에서 말씀은 신의 명령, 계명을 뜻하고 말씀, 명령의 내용은 신의 사랑과 정의이다. 사랑은 주체인 생명의 근원이고 본질이며 힘이다. 사랑 안에서 생명과 생명의 주체인 영혼은 생기고 자라고 완성된다. 정의는 나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더불어 자라고 실현되고 완성되는 질서이고 관계방식이며 구조이다. 신의 사랑과 의의 말씀 안에서 ‘나’는 창조되고 자라고 완성된다. 말씀 안에서 영혼이 물질과 육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비로소 물질은 물질답게 실현되고 완성된다.
4 유영모의 자유로운 삶: 맘대로, 몸 되게
창조신앙은 이성과 영성, 영혼과 물질의 실현과 완성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창조의 말씀은 로고스 철학과 만나야 한다. 창조의 말씀과 인간 이성의 로고스는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다석 유영모는 이성적인 사유로써 과학적인 추리를 하다 보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영감에 이른다고 했다.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지듯이 가다가 날아오르듯이 추리를 하다가 영혼의 진리인 영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생각을 하다보면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또 생각하게 된다.”고 함으로써 이성적 사유와 영성적 사유를 결합했다. 그리스철학의 이성적 과학적 사유와 성경의 영성적 창조적 사유가 만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유영모는 이성과 영성의 차원을 종합함으로써 영혼과 물질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살게 하는 철학을 제시했다. 이성과 영성을 종합하여 영혼과 물질을 해방하고 실현하는 자유로운 삶의 경지를 “맘대로 몸 되게”란 말로 표현했다.
1) 맘대로 몸 되게
물질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물질을 절대화, 우상화하여 거기 사로잡히면 물질세계 전체를 혼란과 파멸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물질의 우상화는 인간의 영혼을 예속시키고 파괴한다. 물질에 잡히지 않아야 영혼이 해방되고 물질을 물질로 존중하고 물질이 물성에 따라 실현되고 완성되게 할 수 있다. 모든 욕심은 바깥의 물질이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며 마음이 물질에 잡힌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본능도 심리도 인과관계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의식도 욕망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심지어 우리의 어떤 선의도 이기심에 물들어 있다. 그런 한에서 물질적 인과관계와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에는 자유로운 ‘나’가 없다.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는 나,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힌 ‘나’는 자유로운 주체, 사랑과 의를 행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면 마음도 물질도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하고 완성할 수 있다. 영혼은 물질적 인과관계의 모든 결정론에서 벗어나 “마음을 마음대로”함으로써 미정의 인생을 완결해 간다. 삶에 매이지 않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맘과 마음의 집착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자연과 타인을 정복하거나 괴롭히지 않게 된다.
이 자유로운 삶의 경지를 다석은 ‘을 대로 하고, 몸은 몸대로 되게’로 표현한다. 다석의 ‘대로’는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식의 ‘맘대로’가 아니다. “서양에는 자연을 정복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있는데 동양에서는 그 따위 소리 않는다.” 반대로 “몸에 대해 부자연하게 간섭하지 말라...자연을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 노릇하고 몬은 몬들 절로 되게’!”하라는 것이다. 이러면 “만족한 세상 온다.”는 것이다.(하게 되게. 1, 809-12)
2) 물질과 주체의 완성
정이천과 주희는 격물을 이치에 대한 탐구로 보고 왕양명은 마음의 뜻과 생각을 바로 잡는 것으로 보았다. 격물에 대한 논의에서 전자가 사물과 인간본성의 이치를 탐구하고 후자가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에 힘썼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유영모는 사물과 타인과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으로 격물을 이해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서 “진리를 파악해서 생명을 완성시킨다. 물성을 알아서 그것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물건을 완성시켜야 나도 완성된다.”고 했다.(여오. 1,831)
‘나’의 호기심이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물과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 존재와 본성이 완성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기심이나 욕심을 가지고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덕(속알)이 영근 사람은 물성과 인간성을 알아서 완성시킨다. 성숙한 사람이 물성을 완성시킬 수 있다. 성숙해야 ‘좋고 싫고’하는 주관적인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편견에서 벗어나야 모든 일이 법도대로 처리되고 사람의 삶이 올바르게 된다. 그리고 물건을 완성시켜야 나도 완성된다. 남을 완성시켜야 나도 완성된다는 것이다. 물성의 완성과 ‘나’의 완성은 순환적으로 맞물려 있다.
온갖 시비판단을 넘어서서 물성과 인간을 완성시키는 일은 “나쁘게 가는 마음을 참고 어질게 가는 마음을 살려 모두를 잘 살게 하자”는 신[조물주]의 마음에 이르러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가야 편견을 넘어서고 만물을 살릴 수 있다. 다석은 격물치지를 서로를 완성시키는 생명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격물치지의 근거와 궁극적인 목표를 하나님에게 두었다. 유영모는 하나님 안에서 물성을 완성시킬 것을 말한다.
이런 모든 편견과 감정,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신의 사랑과 정의의 말씀이다. 말씀 안에서 비로소 물질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고 물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나’에 이를 수 있다. 신의 말씀 안에서 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나는 나로서 자유로운 나가 될 수 있다.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날수록 생명과 정신의 주체인 ‘나’가 실현되고 완성된다. 말씀 안에서 나의 감성과 지성과 영성이 자유롭게 발현되고 실현되고 완성된다. 하나님께 갈수록 예술가의 감성과 과학자의 지성과 신앙인의 영성이 발휘되고 실현되고 완성된다. 유영모는 세상에서 솟아올라 하나님께 나아갈수록 나아지고 나아간다고 했다.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옳은 것이고 나아지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로 올라갈 때, 물질은 물성대로 되게 하고 영혼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다. 이 육신을 가지고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니다. 물질과 이성의 빛이 닿을 수 없는 참 하나의 전체, 절대 자유의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영생이다. 창조의 말씀을 잡고 사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며, 물성을 물성대로 완성하는 길이다.
5 큰 하나의 종합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의 시대와는 달리 기독교 정신과 그리스철학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정신문화 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간다. 한국사회는 전통종교인 불교와 유교의 영향이 여전히 강력하고 기독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의 이성적 과학적 사고도 지배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정신문화, 기독교 정신. 그리스의 이성 중심적 철학에 근원을 둔 서구의 과학적 합리적 정신과 사고가 오늘 우리의 정신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생각과 정신에는 이 세 가지 정신문화의 흐름이 합류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정신문화는 도(道), 길로 표현되고, 그리스 철학에 근원을 둔 서구철학의 핵심어는 로고스, 이성이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어는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dabar)이다.
중국 성경은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를 “도가 사람의 몸이 되었다.”(道成人身)고 번역했다. 도는 생명과 정신이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존재와 활동의 과정이며 원리이다. 오랜 세월 농본적 사회질서 속에 살았던 동아시아에서는 자연생명질서와 사회생활의 일치와 조화 속에서 살았고 자연생명과 사회의 삶이 함께 실현되고 완성되는 과정과 원리를 도라고 했다. 도는 삶의 본성과 원리이며, 삶의 본성이 실현되고 완성되는 과정이며 목적이기도 하다. 도는 생명의 정신의 본성이고 과정이며 목적을 나타내는 포괄적 개념이다. 서양에서 길 way이 목적과 구별되는 과정,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과 구별된다.
중용(中庸) 첫머리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고 했다. 하늘 명령, 하나님 말씀이 인간과 만물의 본성이고, 이 본성을 따름이 길(道)이고, 길을 닦아나가는 것이 가르침이라고 했다. 성리학에서는 하늘명령이 인간의 본성인데 본성은 사랑과 의(仁義)이며 이것이 이(理)라고 했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理)에는 성경의 말씀과 같이 사랑과 의가 내포되어 있다. 서양의 로고스에는 서로 소통하고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법칙과 질서가 있으나 사랑과 정의가 들어 있지는 않다. 말씀이 주체(영혼)의 진리라면 도는 전일적 관계적 생명의 진리이고 로고스는 법칙적 논리적 과학의 이해와 소통, 설득의 진리이다.
로고스, 말씀, 도(道)가 오늘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규정하는 핵심어이다. 유영모·함석헌은 성경을 볼 때 이 세 핵심어, 범주를 가지고 보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세 문명이 합류하고 있다. 로고스와 말씀과 도가 만나고 있다. 세 문명이 합류하는 방식과 원리를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인 ‘한’에서 찾았다. ‘한’은 개체와 전체를 아우르는 큰 하나이며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대종합의 정신이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곧음과 초월(죄의식과 영혼)을 나타내고 그리스철학의 로고스는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보편적 이성(합리성과 경영)을 나타내며, 동아시아의 도는 천지인의 조화와 합일에 이르는 길과 원리(주체와 물성이 실현되는 길과 목적)를 뜻한다. 한의 정신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융합하여 문화적 장벽과 사회적 장벽을 넘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넘어 큰 평화바다로 나가는 길을 열 수 있다.
예수의 가운데 큰 길
예수는 아주 단순한 물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은 삶과 사랑을 긍정하는 살림의 길뿐이다. “살리려 하느냐, 죽이려느냐?” 이것은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앞에 놓고 바리새파를 향해 물었던 물음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언제 어디서나 물어야 할 궁극적 물음이다. 이 물음으로 삶과 영혼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우주 생명의 근본에 이르며 하나님의 우주적 생명의지와 만나게 된다. 이 물음은 살림의 길로 이끄는 물음이다.
살림의 길로 가는 사람은 먼저 자기와 싸우고 자기를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 뱀처럼 옆으로 기지 말고 위로 솟아올라야 한다. 일어나서 솟아오른 사람만이 세상의 모든 죽이려는 경향과 세력에 맞서 싸울 수 있다. 모든 부패와 불의와 폭력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하고 죽이는 것이다. 모든 부패, 불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은 살리기 위한 것이다. 원수와 싸워도 원수를 살리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사랑으로 살리기 위해서 싸움을 없애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살리기 위해 싸우는 이는 예수처럼 굽으러짐 없이 사랑으로 싸운다. 살리려면 사랑으로 싸우려면 위로 솟아올라야 한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두고 곧게 선 사람만이 하늘로 솟아오른 사람만이 전체의 자리에 서서 자기와 남을 함께 살릴 수 있다.
선과 악을 넘어서 생명을 살리는 큰 길로 가야 한다. 선과 악을 넘어서는 큰 길이 하나님 나라의 길이다. 예수가 걸어가셨던 하나님 나라의 길은 이전의 길과는 전혀 다른 새 길이며, 이 길은 선과 악, 높고 낮음, 강하고 약함, 잘나고 못남, 의인과 죄인을 가리지 않고 다 함께 갈 수 있는 길이다.
유영모는 “예수는 믿은 이”라는 신앙 시에서 “높·낮, 잘·못, 살·죽 한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라고 했다. 물질(돈과 권력)의 기준이나 이성의 논리로 보면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살고 죽고 하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보면 그 사이로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길이 있다.
하나님의 영과 뜻에 비추어 보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가운데 길이 보인다. 생명사랑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판단기준이다. 생명을 살리는 가운데 길을 가신 예수는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든 가치와 판단기준, 질서와 체계를 뒤집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창녀와 세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 지옥의 바닥이 하늘나라로 통한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 종교 인종의 장벽도 무너뜨린다. 유대인의 원수, 신앙과 혈통을 더럽힌 사마리아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된다.
예수는 먼저 선과 악, 의와 죄, 옳음과 그름의 인간적 구별을 없애버렸다. 오직 생명과 영혼을 살리셨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에게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을 때 예수는 “선한 이는 오직 한 분밖에 없다.”고 하셨다. 세상에서 선악의 구별을 거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보고 그에게서 늘 선을 기대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누구를 선하다, 악하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욕심과 감정과 편견이 들어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늘 선한 사람, 늘 악한 사람은 없다.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 선하고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 악한 것뿐이다. 나는 선하고 남은 악하고 우리 편은 좋고 상대편은 나쁘다는 것은 편견일 뿐이다.
바리새파는 좋은 사람, 나쁜 놈을 가리며 살았다. 사람에게 죄인과 의인의 딱지를 붙여놓았다. 겉보기에 도덕적이고 경건하고 의로운 것처럼 보이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은 더 나빠지기만 한다. 생명은 고갈되고 영혼은 죽어간다. 남에게서 선하다고 칭찬받는 사람은 자기가 선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더욱 겸허해져야 하고 남에게서 나쁜 놈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아무도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른바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일깨웠다. 바리새파가 예수를 선과 악, 죄인과 의인에 대한 시비판단과 토론에 끌어들일 때 예수는 그런 토론에 말려들지 않고 삶의 현장으로 바리새파를 끌어들이셨다. 예수는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떤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고 의이며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악이고 죄이다.
예수는 언제나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문제 삼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거스르느냐가 문제였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고 선한 것이며 죽이는 것이 그르고 악한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 나라이다. 생명은 개인 영혼의 깊은 속에서부터 인류 전체, 우주 생명 전체를 아우른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에는 생명의 우주적 인류적 차원과 개인 영혼의 깊은 차원이 맞물려 있다. 인간 영혼의 속의 속, 가운데의 가운데, 중심의 중심이 인류 전체, 우주 생명 전체의 중심 한 가운데와 뚫려 있다. 인류 전체,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회개를 통해서 열리고 뚫리고 새롭게 되는 인간 영혼의 속의 속, 가운데와 하나로 통해 있다.
인간 영혼의 속의 속이 뚫리고 살아나야, 우주의 중심에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맞을 수 있다. 예수는 우리의 영혼 속의 속에서 길이 뚫리게 하셨다. 영혼의 한 가운데서 열리는 가운데 큰 길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큰 길이다. 이 길은 남이 대신 갈 수 없고 나 스스로 홀로 가는 길이면서 누구나 다 함께 갈 큰 길이다. 내가 구원받는 길이면서 우주 전체가 구원 받는 길이다. 모두가 하나로 만나는 가운데 큰 길이다. 예수는 가운데 큰 길을 내셨고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이 되셨다. 이것은 서로 살리는 길, 하나 됨에 이르는 큰 평화의 길이다. 믿음과 사랑으로만 갈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