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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義湘)의 화엄사상이 선(禪)에 미친 영향
대한불교조계종 관음정사주지 망우법상
- 차 례 -
Ⅰ. 서 론
Ⅱ. 중국의 화엄과 선
1) 중국의 화엄교판(華嚴敎判)
2) 중국의 화엄관법(華嚴觀法)
3) 중국의 화엄(華嚴)과 선(禪)의 통로
Ⅲ. 의상(義湘)의 화엄교학과 그 전개
1)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2) 의상화엄의 전개
Ⅳ. 신라와 고려의 선과 화엄
1) 나말려초(羅末麗初)의 선 전래와 화엄
2) 고려중기의 선과 화엄
Ⅴ. 결론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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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신라 중기 우리 나라에 화엄이 전래되어 1600년의 성상(星霜)을 지나고 있다. 이러한 화엄교학(華嚴敎學)은 화엄행자 두순(杜順)과 화엄의 기초자 지엄(智儼)의 화엄교학을 이은 해동(海東)의 화엄초조인 의상(義湘)에 의해서 법성게(法性偈)와 법계도(法界圖)가 이루어져 의상대사의 후학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주석(註釋)되어 고려·조선을 지나 지금까지도 선사상이나 의례 속에 젖어들어 신수봉행(信受奉行)되고 있다.
특히 의상대사의 화엄교학사의 총체적 연구서(硏究書)라 할 수 있는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에는 신라 후대에 이르러 의상화엄학계 후학들에 의해서 면밀하게 연구된 내용들이 담겨있는 중요한 고려 후기의 텍스트라고 한다. 이러한 의상대사의 화엄사상은 신라 후기 국토를 화엄도량으로 만들었으며, 중국의 화엄교학의 대성자라 할 수 있는 법장(法藏)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의 현수법장(賢首法藏)과 청량징관(淸凉澄觀)·규봉종밀(圭峰宗密)을 거쳐 신라의 의상계(義湘系) 학승들과 고려의 균여(均如)에 의해서 나말려초(羅末麗初)에 전래된 중국의 조계혜능(曹溪慧能) 문하(門下)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禪)과 성상융회(性相融會)의 다리를 놓아 선에 접맥시키는 기틀을 마련케 하였으며, 고려 중기 대각의천(大覺義天)에 의해서 비록 순수한 화엄교학적 입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화엄에 입각한 교선일치(敎禪一致)가 이루어지고, 보조지눌(普照知訥)에 의해서 교선(敎禪) 또는 선교일치(禪敎一致)사상의 바탕을 이루어 마침내 조선초(朝鮮初) 설잠(雪岑)스님에 의해서 화엄과 선이 완전한 융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화엄과 선은 화엄의 일승법계무진연기(一乘法界無盡緣起)의 궁극으로서 성기사상(性起思想)을 바탕으로 융합되고 실천되는 과정에서 많은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보이는가하면 상보적 관계 즉 화엄과 선의 병립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려 중기 지눌에 의해서 화엄과 선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사상적 일치를 이루어 실천면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하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지향한 것이다. 이러한 의상의 화엄사상은 조선초기 설잠에 의해서 화엄과 선이 융합되어 조선의 영·정조대에 이르러 불교의식(佛敎儀式)에 유입되고 도봉유문(道峰有門)에게 {법성게과주(法性偈科註)}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살피기 위해서 먼저 중국의 화엄논사들의 화엄과 선의 관계를 간략히 살펴 화엄과 선의 통로를 고찰해 보고,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개관하여 나말려초에 선을 수용한 주체들과 해동화엄의 주류를 개관하면서 고려 초·중기의 선과 화엄의 융합과 일치의 과정을 고찰하여 고려중기까지 선사상에 미친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한 영향을 살피고자 한다. 이를 고찰함에 있어서 원전텍스트를 통해 자세히 고찰할 수는 없고, 기존의 연구논문들을 통해 그 요점을 이해하면서 화엄과 선의 연관관계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Ⅱ. 중국의 화엄(華嚴)과 선(禪)
화엄사상은 천태사상과 아울러 중국불교철학의 쌍벽을 이루는 사상이다. 그런데 화엄사상은 인도에서 직수입한 불교철학이 아닌 중국인이 새로이 창조한 독창적인 사상체계이다. 중국에서 천태종은 천태산의 불교를 발전시키고, 화엄종은 오대산을 개창하여 함께 중국인의 신앙대상으로서 깊이 존숭받았다. 또한 사상계에 있어서도 천태종은 조송(趙宋)의 천태(天台)를 발전시키고, 화엄종은 선종과 더불어 신유학(新儒學)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쳐 쇠퇴한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나아가 중국의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정토종과 선종 가운데 선종은 화엄사상에서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화엄사상은 당연히 {화엄경}에 기초한다. 그러나 {화엄경}은 인도에서 처음부터 {60화엄}·{80화엄}·{40화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각 품별로 산발적으로 성립되어 산발적으로 전해진 것을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 대경으로 합본되었다고 전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화엄종의 선구적 종파로 지론종이 일찍이 성립되어 화엄학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1. 화엄가의 계보
중국의 화엄조사를 제1조(祖) 두순(杜順), 제2조(祖) 지엄(智儼), 제3조(祖)를 법장(法藏)으로 하는 종밀(宗密)의 3조설에서 시작된 후, 제4조에 징관(澄觀), 제5조에 종밀을 덧붙인 5조설과 그 외에 두순 앞에 인도의 마명과 용수를 놓는 7조설이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세친과 문수·보현보살을 합해 화엄10조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7조설과 10조설은 신앙적인 입장에서 조통설(祖統說)을 세우는데 일반적으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두순→지엄→법장→징관→종밀로 이어지는 5조설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두순→지엄→법장으로 이어진 3조설은 명백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관계가 있어 이의가 없지만 5조설은 문제가 있다고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또 두순의 화엄관계 저술이 진찬(眞撰)이 아니라는 문제로 초조를 지엄 또는 지정(智正, 559-639)을 거론하기도 한다.
하여튼 두순(杜順, 557-640)에 의해서 화엄종의 교학적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저작은 알 수 없고 다만 지엄(智儼, 602-668)이 그의 영향을 받아 화엄교학의 체계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러한 두순은 어떤 스님이 "무변(無邊)한 찰토(刹土)의 경계에는 자타가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다고 하지만, 이미 자타가 있는데 무엇으로 인해서 간격이 없다고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답하길, "회주(懷州)에 소가 벼를 먹음에 익주(益州)의 말이 배가 부르다"하고, 또 묻기를 "십세(十世) 고금(古今)의 시종(始終)이 당념(當念)을 여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미 종(終)과 시(始)가 있는데 무엇으로 인해서 여의지 않는다고 합니까?"라고 묻자. 답하길, "천하의 의사를 찾으면서 어깨 위에 뜸을 뜬다"라고 하였을 만큼 선적인 화엄행자였다고 한다.
지엄은 12세에 두순의 문하에 들어가 달법사에게 맡겨진 후 지정으로부터 화엄을 배우고 지론종(地論宗)의 남도파 혜광(慧光)의 {화엄소}를 접하고 [별교일승무진연기(別敎一乘無盡緣起)]를 납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신이(神異)한 스님으로부터 [육상(六相)]의 의미를 추구하고 마침내 일승(一乘)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아 화엄경의 주석서인 {수현기(搜玄記)}5권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특히 지엄은 세친이 주목한 {십지경}의 육상교학(六相敎學)에 주력하여 중국 화엄교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지엄은 대사회적 활동은 미비하였고 의상과 법장 등의 제자를 훈육하는데 주력하였다. 임종하려 할 때에 제자들에게 말하길, "나의 이 허깨비 같은 몸은 인연에 따라서 자성이 없다. 지금 곧 잠시 정토에 가서 후에 연화장 세계에서 놀아야겠다. 그대들은 나를 좇아 또한 이 뜻을 같이 하라"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그의 중요한 저서로는 {수현기}5권, {일승십현문} 1권, {오십요문답} 2권, {공목장(孔目章)} 등이 있다.
1) 중국의 화엄교판
이러한 지엄은 그의 저술에서 당시 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화엄의 법계연기설에 초점을 맞추어 대략 4가지 교판을 하고 있는데, {수현기}에서 점(漸)·돈(頓)·원(圓)으로 삼교교판(三敎敎判)을 하면서 돈(頓)·점(漸) 또는 돈(頓)·점(漸)·시교(始敎)·종교(終敎)라고 교판(敎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목장}에서는 5교로 교판하여 소승(小乘)·초교(初敎)·종교 도는 숙교(熟敎)·돈교(頓敎)·원교(圓敎)인 일승(一乘)라고 하였는데, 다음에 이것은 화엄교학을 대성한 법장의 오교십종판(五敎十種判)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지엄은 다시 {수현기}에서 동(同)·별(別) 또는 {오십요문답}에서 공(共)·불공(不共)이라는 2교로 교판하기도 한다. 특히 지엄은 {공목장}에서 동(同)·별(別) 2교(敎)에 대해서 {수현기}와는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해인삼매(海印三昧)를 바탕으로 교판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법장은 법(法)에 의거하여 오교(五敎)를 나누고 이(理)에 의거하여 십종(十種)으로 교판하였는데, 크게 소승과 대승으로 나누고 소승교에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유법아무종(有法我無宗)·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을 들고, 대승을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삼승을 다시 돈점(頓漸)으로 분류하는데 점(漸)에 시교(始敎)로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과 종교(終敎)로 진상불공종(眞想不空宗), 돈(頓)에 돈교(頓敎)로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일승(一乘)을 원교(圓敎)라고 하여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으로 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피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에서는 오교십종(五敎十宗)으로 달리 설명하고 있다. 먼저 오교(五敎)는 1) 사제(四諦)와 십이인연(十二因緣) 등을 설한 소승교(小乘敎), 2) {반야경}에 입각하여 반야 공사상을 설하고 {해심밀경}이나 {능가경}에 입각하여 오성각별(五性各別) 등을 설하는 대승시교(大乘始敎), 3) {능가경}·{열반경}·{승만경}·{여래장경}·{부증불감경}·{기신론} 등에 입각하여 진여연기(眞如緣起)를 설하여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하는 대승종교(大乘終敎), 4) {유마경} 등에 입각하여 언구(言句)나 위차(位次)에 구애받지 않고 단박에 진리를 철견(徹見)하는 돈교(頓敎), 5) {법화경}이나 {화엄경}에 입각하여 원만하고 완전한 일불승(一佛乘)을 설하는 원교(圓敎) 등이다.
다음에 화엄종의 오교(五敎)는 교리상의 분류인데 반해서 여기서 말하는 십종(十宗)의 분류는 나타나 있는 원리상의 이치를 열 가지로 나눈 것이다.
1) 법성구유종(法性俱有宗)은 주관의 자아나 객관의 사물도 함께 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석존께서 일반세간을 위해서 설하신 인천승과 소승 중의 독자부(犢子部) 등이다.
2)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은 객관의 사물은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에 걸쳐 실유(實有)하지만 주관의 자아는 없다고 주장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등이다.
3)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은 사물은 현재에 있어서만 실체(實體)가 있고 과거와 미래에는 그 체(體)가 없다고 주장하는 대중부(大衆部)의 설이다.
4)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은 모든 사물은 과거·미래에 무체(無體)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오온(五蘊)의 법은 실체가 있으나 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는 잠정적이라고 주장하는 설가부(說假部)나 성실론(成實論) 등이다.
5)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은 세속의 사물은 허망하고 출세간진제(出世間眞諦)인 불교만이 실다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출세부(說出世部) 등이다.
6)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온갖 사물은 다만 이름 뿐으로 실체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설부(一說部) 등이다. 이상의 6종은 부파불교의 주장인데 여섯 번째의 주장은 대승초교(大乘初敎)인 시교(始敎)에 통한다.
7)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은 모든 사물은 다 빠짐없이 진공(眞空)이라고 하는 반야경 등의 대승시교(大乘始敎)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공(眞空)은 미혹한 마음으로 공(空)이라고 생각하여 공한 것이 아니라 분별 이전의 그대로가 곧 공(空)이라는 것이다.
8)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은 모든 사물은 결국 진여(眞如)의 현현(顯現)이므로 번뇌에 덮여 있는 진여는 여래장(如來藏)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한 덕(德)을 함유하고 청정하여 수 없는 공덕의 장이라는 오교 중의 종교(終敎)이다.
9)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은 참된 진리는 객관의 대상과 주관의 마음이 다 없어지고 상대가 끊긴 불가설(不可說),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곳에 있다고 하는 오교 중의 돈교(頓敎)인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세계를 말한다.
10)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은 낱낱의 사물은 모두 다 일체의 공덕을 구족하고 온갖 현상이 서로 방해됨이 없이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별교일승(別敎一乘)이라는 것이다. 이상은 법장(法藏)의 {화엄오교장} 권상과 {탐현기} 권1에 설해진 것이다.
다음에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은 선(禪)·율(律)·천태(天台)·삼론(三論) 등의 모든 불교학을 섭렵한 박학다식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이 저작에 {화엄경소(華嚴經疎)}와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疎演義 )}가 있는데 모든 불교의 교학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본류는 어디까지나 화엄에 두고 있는데, 그는 법장의 교판을 비판하여 돈교(頓敎)를 언망려절(言亡慮絶)의 선종의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법장의 오교(五敎)에 순서를 바꾸고 있는데, 법장이 제시한 1) 소승교(小乘敎), 2) 대승시교(大乘始敎), 3) 종교(終敎), 4) 돈교(頓敎), 5) 원교(圓敎) 등에서 종교(終敎)와 돈교(頓敎)를 바꾸어 말한다. 그리고 또 법장의 십종교판(十宗敎判)에 대해서도 징관은 {화엄현담} 권8에서 제7 삼성공유종(三性空有宗)에서 삼성(三性)과 삼무성(三無性)을 설하는 것을 상시교(相始敎)라 하였고, 제8 진공절상종(眞空絶相宗)을 들어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에 해당시키고, 제9 공유무애종(空有無碍宗)을 들어서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에 배당하였다. 그리고 제10의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을 원융구덕종(圓融具德宗)이라 이름을 달리 하여 법장(法藏)이 본체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을 융합일치(融合一致)시키는 성상융회(性相融會)를 주장한 반면에 징관(澄觀)은 본체와 현상을 구별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법장은 십종(十宗)을 교판론(敎判論)으로 보는 반면에 징관은 종취론(宗趣論)으로 보고있다.
이상의 십종은 법상종(法相宗)의 팔종(八宗) 교판을 참고한 것인데 1)∼6)은 십종의 6종과 같고 제7의 반야경전이나 삼론을 승의개공종(勝義皆空宗), 심밀(深密)·법화(法華)·화엄(華嚴)의 모든 경이나 무착(無著)·세친(世親)의 설을 응리원실종(應理圓實宗)이라고 하였다. 하여튼 징관은 화엄교학에 기초를 둔 선과의 통로를 제시한 것이다.
이어서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은 유학에도 능통하였고 특히 {圓覺經}에 중점을 두고 그의 교학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선과의 관련한 교판으로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小초)}에서 부처님의 일대교설(一代敎說)을 점(漸)과 돈(頓)으로 나누어 교판하고 있는데, 먼저 일대교를 점교(漸敎)와 돈교(頓敎)로 나누고 점교(漸敎)에 오시(五時)로 하여 초시(初時)에 유교(有敎)인 소승경(小乘經), 제이시(第二時)에 공교(空敎)라고 하여 반야경(般若經), 제삼시(第三時)에 중도교(中道敎)에 심밀경(深密經), 제사시(第四時)에 동귀교(同歸敎)인 법화경(法華經), 제오시(第五時)에 상주교(常住敎)인 열반경(涅槃經)을 위치시키고, 다음 돈교(頓敎)를 화의돈(化儀頓)에 화엄경(華嚴經), 축기돈(逐機頓)에 원각경(圓覺經) 등 40여부를 위치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돈(頓)과 점(漸)의 2교로 나눈 것은 남북조시대부터 행해졌던 것이다. 여기서 점교 중에서 초시에서 제3시가지는 법상종의 유(有)·공(空)·중(中)을 따른 것이고, 제4시 동귀교와 제5시 상주교는 남북조시대의 오시교(五時判)의 명칭을 따른 것이다. 다음에 화의돈(化儀頓)은 종밀의 독자적인 설인데 이는 천태종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축기돈(逐機頓)이란 법장의 {오교장(五敎章)}에 화엄칭법본교(華嚴稱法本敎)에 대한 축기말교(逐機末敎)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축기말교(逐機末敎)란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이루신 후 27일에 보리수 아래에서 해인정(海印定)에 들어서 움직이지 않고 설하신 교법을 칭법본교(稱法本敎)라고 하는데 반해서 동시이처(同時異處)와 이시이처(異時異處)의 설을 함께 축기말교(逐機末敎)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축기돈(逐機頓)이란 원돈(圓頓)의 가르침으로 상근기(上根機)를 위한 가르침이지만 근기에 대한 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축기돈(逐機頓)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 그는 {원인론(原人論)}과 {도서(都書)}에서 1) 세간에서 세간적인 선행에 의해서 선취(善趣)에 태어난다는 인천인과교(人天因果敎)인 인천교(人天敎), 2) 성문이나 연각의 수행을 완성하는 단혹멸고교(斷惑滅苦敎)인 소승교(小乘敎), 3) 상시교(相始敎) 즉 유식불교의 수행과 이론을 지향하는 장식파경교(將識破境敎)인 대승법상교(大乘法相敎) 등을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 4) 공시교(空始敎)에 해당하는 반야 공에 입각해서 모든 상을 파하는 대승파상교(大乘破相敎)를 밀의파상현성교(密意破相顯性敎), 5) 종국적이고 곧바로 진리를 뚜렷이 나타내는 일승현성교(一乘顯性敎)를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로 선과 교의 교판을 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종밀은 앞의 교판에서 {화엄경}과 {원각경}을 나누는데 주안점을 두었으나 여기서는 양자를 다같이 일승현성교(一乘顯性敎)에 두고 있다. 종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학상의 우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사상의 교학적 밑받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북조이래 화엄교학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교판을 아우르면서 선사상의 교학적 토대를 마련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교판은 마침내 두순의 법계삼관(法界三觀)이래 지엄·법장을 이은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이며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의 화엄은 징관을 거쳐 종밀에 이르러 화엄법계연기설(華嚴法界緣起說)의 사법계관(四法界觀)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이 사법계관은 바로 본체(本體)인 평등의 이(理)와 현상인 차별의 사(事)가 서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연기(緣起)한다는 1) 사법계(事法界), 2) 이법계(理法界), 3)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4)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등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관법이 확정되기까지 여러 화엄조사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추적해 보기로 한다.
2) 중국의 화엄관법(華嚴觀法)
먼저 혜윤(慧潤)의 {화엄법계관법(華嚴法界觀法)의 구조와 특징}을 통해 핵심만을 가려 간략히 정리해보면 두순의 법계관문에는 진공관(眞空觀)·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이 있고, 오교지관(五敎止觀)으로 법유아무문(法有我無門)·생즉무생문(生卽無生門)·사리원융문(事理圓融門)·어관상절문(語觀雙絶門)·화엄삼매문(華嚴三昧門)이 있는데, 이는 법장의 {화엄유심법계기}에 설해진 법시아비문(法是我非門)·연생무생문(緣生無生門)·사리혼융문(事理混融門)·언진이현문(言盡理顯門)·법계무애문(法界無碍門)과 유사하다.
다음에 지엄은 통관(通觀)을 비롯하여 이종관(二種觀)으로 유식관(唯識觀)과 공관(空觀)을 들고, 오종관(五種觀)으로 부정관(不淨觀)·자심관(慈心觀)·연기관(緣起觀)·안반염관(安般念觀)·계분별관(界分別觀)라고 하였으며, 그리고 열 여덟 가지 觀法으로 진여관(眞如觀)·통관(通觀)·유식관(唯識觀)·공관(空觀)·무상관(無相觀) ·불성관(佛性觀)·여래장관(如來藏觀)·맹관(盲觀)·고무상관(苦無常觀)·무아관(無我觀)·수식관(數息觀)·부정관(不淨觀)·골관(骨觀)·일체처관(一切處觀)·팔승처관(八勝處觀)·팔해탈관(八解脫觀)·일체입관(一切入觀)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화엄교학의 대성자인 법장은 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으로 여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성경귀심진공관(攝境歸心眞空觀)·종심현경묘유관(從心現境妙有觀)·심경비밀원융관(心境秘密圓融觀)·지신영현중연관(智身影現衆緣觀)·다신입일경상관(多身入一鏡像觀)·주반호현제망관(主伴互現帝網觀) 등과 이 밖에도 해인병현삼매문(海印炳現三昧門)·화엄묘행삼매문(華嚴妙行三昧門)·진함시방삼매문(塵含十方三昧門)·사섭섭생사매문(四攝攝生三昧門)·적용무애삼매문(寂用無碍三昧門)·불과무애삼매문(佛果無碍三昧門) 등과 섭상귀진관(攝相歸眞觀)·상진증실관(相盡證實觀)·상실무애관(相實無碍觀)·수상섭생관(隨相攝生觀)·연기상수관(緣起相收觀)·미세용섭관(微細容攝觀)·일다상즉관(一多相卽觀)·제망중중관(帝網重重觀)·주반원융관(主伴圓融觀)·과해평등관(果海平等觀) 등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법계(四法界)와 십현문(十玄門)을 융섭(融攝)한다고 하였다. 법장의 가장 유명한 관법은 {탐현기}에서 설하고 있는 열 가지 유식관(唯識觀)이다. 이는 화엄경의 "삼계허망(三界虛妄) 유일심작(唯一心作)"을 인용하여 {성유식론}을 증명하고 있는데, 1) 상견구존고설유식(相見俱存故說唯識), 2) 섭상귀견고설유식(攝相歸見故說唯識), 3) 성수왕고설유식(攝數王故說唯識), 4) 이말귀본고설유식(以末歸本故說唯識), 5) 섭상귀성고설유식(攝相歸性故說唯識), 6) 전진성사고설유식(轉眞成事故說唯識), 7) 이사구융고설유식(理事俱融故說唯識), 8) 융사상입고설유식(融事相入故說唯識), 9) 전사상즉고설유식(全事相卽故說唯識), 10) 제망무애고설유식(帝網無碍故說唯識) 등이라고 하였다.
이를 징관(澄觀)은 일심(一心)을 들어 약간 달리 설명을 하고 있지만 일심에 귀착하여 화엄의 심요(心要)를 설명하고,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부처가 되기 위한 인위(因位)가 바로 비로자나불의 지혜경계인 과위(果位)가 원융(圓融)하게 하나로 통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종밀에 이르러 사법계관(四法界觀)이 확정된 것이다.
여기서 화엄(華嚴)과 선(禪)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겠다. 즉 부처님께서 출세한 뜻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에 오입(悟入)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중생의 근기(根機)와 번뇌는 천차만별이어서 다양한 방편을 베풀어 인도한다. 따라서 붓다의 일대시교(一代時敎)는 응병여약(應病與藥)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부처님께서 시설하신 오묘한 가르침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법문 중에 화엄의 묘법은 신묘한 지혜의 작용을 다하여 허공계를 다하고 극미(極微)와 극대(極大)를 다하여 법계에 두루 원융(圓融)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의 본체와 현상을 통달하게 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마음의 작용을 불가설(不可說)불가설(不可說)의 해인삼매(海印三昧)와 화엄삼매(華嚴三昧)로 7처(處) 9회(會)에 걸쳐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 원리는 [한 티끌 속에 3세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건립한다]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 하여 모든 원인과 결과, 본체와 현상 등의 전후의 법문이 동시에 나타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일음(一音)으로 설하지만 중생들은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위대한 가르침이 수많은 조사와 선사들에 의해서 교(敎)와 선(禪)을 제창케 하였다. 먼저 교(敎)로써 심지(心地)를 밝혔고, 다음에 교(敎)에 의거하여 관행(觀行)을 일으켰으며 해행(解行)이 원만하게 하였다. 이것은 중생의 미혹을 혁파하여 일승진실(一乘眞實)을 밝히어 각자(覺者)가 되게 하는 길이었다. 이를 중국에서 연기(緣起)·공(空)·중도(中道)의 중관(中觀)과 심외무경(心外無境)의 유식(唯識)을 통해 기초가 다져지고 천태(天台)에 이르러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일심삼관(一心三觀)과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지관수행(止觀修行)과 이법(理法)의 성구설(性具說)을 구현하였다.
이를 화엄종에서는 실상론(實相論)과 연기론(緣起論)를 종합하여 유심연기(唯心緣起)의 걸림 없는 법계부사의(法界不思議)를 천명(闡明)하여 성기사상(性起思想)을 근본으로 삼아 종취(宗趣)를 세웠다. 이러한 화엄은 실천면에서 천태(天台)의 영향을 받아 관행(觀行)의 실천법문을 대단히 중요시하였으며, 여기서 언급한 실천은 이론과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융섭(融攝)한 관행인 것이다. 만약 교의(敎義)를 이론으로 보고, 관행(觀行)을 실천으로 본다면 서로 대치된다.
그러나 천태의 실천 수행법을 가지고 교(敎)가 곧 관(觀)이며, 관(觀)이 곧 교(敎)이어서 교(敎)와 관(觀)이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고, 두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고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관법(觀法)이 곧 교상(敎相)이며, 교상(敎相)이 곧 관법(觀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심(一心)의 관법이 곧 교상이라는 것은 관법이 곧 실천이며 또한 교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상이 곧 관법이라는 것은 교상이 곧 이론이며 또한 관법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로 교관일치(敎觀一致)의 원리이자 이론과 실천이 불이(不二)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일심(一心) 또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은 둘 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의 일심법계(一心法界)의 체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선적 체험이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화엄실천의 특징은 바로 사사무애(事事無碍)한 원융무진(圓融無盡)한 법계(法界)를 서술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리하여 관행의 실천법문을 중요시하여 반드시 관문(觀門)을 경유해야만 법계 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법계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심경합일(心境合一)의 이치를 명료하게 이해해야 하고 이를 체득(遞得)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법(理法)의 심(心)과 사법(事法)의 대경(對境)이 합일하는 이사원융무애관(理事圓融無碍觀)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서 낱낱의 존재도 두루두루 계합(契合)되는 것이며 또 하나와 전체·대소·고저·장단이 모두 융섭(融攝)되는 것이다.
3) 중국의 화엄과 선의 통로
이상과 같은 화엄조사들의 관행(觀行)을 다시 정리해 보면 초조(初祖) 두순은 이론(異論)이 있기는 하지만 실천수행의 관문(觀門)을 1) 진공관(眞空觀), 2)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이라 하여 삼관(三觀)을 세웠다. 이러한 관행(觀行)을 뚜렷이 나타냄으로써 하나의 참된 진리의 세계에 깨달아 들게 한다. 그의 [오교지관(五敎止觀)]은 화엄의 깊은 뜻을 체득하여 나타내고, 실천의 관법(觀法)으로 법유아무문(法有我無門), 생즉무생문(生卽無生門), 사리원융문(事理圓融門), 어관쌍절문(語觀雙絶門), 화엄삼매문(華嚴三昧門) 등 다섯 가지 관문(觀門)을 설정하고 이것을 화엄 5교의 근거로 삼았다. 두순이 관문에서 탁월함은 먼저 교리의 연구로부터 관문의 실천법칙을 확정하고 다시 교리를 화엄수행의 과정에 융합한 것이다. 마치 십현연기관(十玄緣起觀)의 이론이 실재로 관문을 경유하여 하나의 참된 진리의 세계인 일진법계의 심인(心印)에 깨달아 들어가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다음에 제2조 지엄은 성상(性相)의 융회(融會)에 전력을 기울였다. 즉 제1조의 실천적인 관문을 계승하여 십현무진연기(十玄無盡緣起)의 이론을 분명하게 앙양하고 초조의 관행 위에 교리를 첨가하여 교(敎)와 관(觀)을 함께 갖추었다.
그 다음에 제3조 법장은 앞서 두 조사와 의상의 이론을 계승하여 정(情)과 이법(理法)을 융합하여 현상과 본체가 다르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여 일승원교(一乘圓敎)의 무진법계연기(無盡法界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의 교법을 세우고, 그 교상(敎相)을 관법(觀法)의 실천론에 합치하는 것을 화엄의 근본적인 진리로 삼았다.
이어서 제4조 징관(澄觀)은 또한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원융(圓融)은 항포(行布)와 걸림이 없음으로 하나가 온갖 것이 되어도 그 작은 것을 보지 않고 항포(行布)는 원융(圓融)과 걸리지 않으므로 온갖 것이 하나로 되어도 그 많은 것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징관은 선(禪)의 영향을 받고 또 천태의 가풍과 융화했기 때문에 모든 문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서 모든 것과 융합하여 하나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제5조 규봉종밀(窺峰宗密)은 {원각경}에 의지하여 원돈(圓頓)의 교리를 깨닫고 일심(一心)으로 모든 존재를 통일하여 정(定)과 혜(慧)를 분리하여 6바라밀을 열고, 모든 관행(觀行)을 해산시켜 버리고 일심으로 복귀시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라 하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여 회통(會通)하였다. 특히 실천적인 관행(觀行)을 선가(禪家)의 제종과 관련시켜 교판하면서 화엄을 사사무애(事事無碍)하고 원융무진(圓融無盡)한 실천관법인 사법계관(四法界觀)에 도달하게 하여 고려 선가에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도 징관의 화엄교학(華嚴敎學)에 큰 영향을 준 이통현(李通玄)의 삼성원융(三聖圓融)의 사상과 근본무명(根本無明)이 곧 부동지불(不動智佛)이라는 가르침은 선(禪)과 화엄(華嚴)의 통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중국의 화엄조사들이 신라와 고려의 선과 화엄에 끼친 영향을 간략히 고찰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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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성각별이란 오종성(五種姓)·오종종성(五種種姓)·오종승성(五種乘姓)·오승종성(五乘種性)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姓)자는 성(性)라고 쓰기도 하는데, 법상종에서는 중생이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성질 또는 소질에 다섯까지가 있어서 본래적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 가운데 가지고 있는 본유종자(本有種子)에 의해서 결정되고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오성각별(五姓各別)의 설을 세운다. 즉 보살정성(菩薩定姓)·독각정성(獨覺定姓)·성문정성(聲聞定姓)·삼승부정성(三乘不定姓) 또는 부정종성(不定種性)·무성유정(無姓有情) 또는 무종성(無種性) 등으로 이 중에서 보살정성과 독각정성·성문정성은 각기 불과(佛果)·벽지불과( 支佛果)·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데 정해진 결정성(決定性)이고 부정종성(不定種性)은 오계(五戒)·십선(十善)이나 각종 수행을 하여 인천(人天)이나 성불할 수 있는 종성이지만 무종성(無種性)은 일천제(一闡提)로서 영원히 미혹의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능가경}이나 {해심밀경}에 의해서 세워진 설인데, {법화경}이나 {정토경전}에서는 이것을 대승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고 설한다.
* 중국 교상판석(敎相判釋)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오시팔교(五時八敎)에 대해서 인데 수나라 천태종 지의대사는 이상의 교판을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불교의 모든 경전의 내용을 분류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경전의 성립시대를 무시하고 석존의 설법순서를 따라서 화엄(華嚴)·녹원(鹿苑)·방등(方等)·반야(般若)·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의 오시(五時)로 나누었는데 이것을 다시 중생을 교화하여 인도하는 형식과 방법에 따라서 처음부터 불타자신의 깨달음을 중생에게 가르치는 돈교(頓敎), 교의내용이 얕은 가르침에서 점점 나아가 중생을 교화하는 점교(漸敎), 중생의 근기(根機)와 능력에 따라 각기 은밀하게 이익을 주는 비밀교(秘密敎), 역시 중생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체득하는 교법이 일정하지 않는 부정교(不定敎)로 나누고 있는 것이 [화의사교(化儀四敎)]라고 하였다.
다음에 중생의 성질이나 능력에 응해서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리내용에 따라서 근기가 하열한 중생을 위하여 단공(但空)의 도리와 석공관(析空觀)에 의해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게 하거나 또 보살은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절복(折伏)하고 번뇌를 모두 끊지 않고 중생교화를 위해서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의 긴 시간에 걸쳐서 깨달음을 보류하는 인행(因行)을 닦는 삼장교(三藏敎), 삼승(三乘)에 공통으로 통하는 여환즉공(如幻卽空)의 도리에 의해서 체공관(體空觀)을 닦는 통교(通敎)가 있다. 이것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대승초입의 공통(共通), 근기가 하열한 보살이 이승(二乘)과 같이 삼장(三藏)을 이해하여 얻은 통동(通同)인 수승한 보살은 중도의 묘리(妙理)를 깨달아서 별(別)·원(圓) 이교(二敎)에 들어가는 통입(通入)의 의미가 있다.
다음은 별교(別敎)인데 여기에는 불공(不共)과 격력(隔歷)의 의미가 있다. 불공(不共)은 이승(二乘)과는 다른 보살만을 위한다는 의미와 격력(隔歷)은 모든 것을 차별의 측면에서 보고 이에 따라서 공(空)·가(假)·중(中)의 삼관(三觀)을 차례로 관한 다는 것이다. 또 이것은 각각의 수행차제 즉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 등을 닦아 차례로 깨닫는 것이다. 끝으로 원교(圓敎)는 편벽되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융합하여 완비해 있다는 뜻으로 미(迷)와 오(悟)가 본질적으로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원교(圓敎)는 불타의 깨달음을 그대로 설한 것이라는 의미로 공(空)·가(假)·중(中)을 일심(一心)으로 관(觀)하기 때문에 원융(圓融)한 삼관(三觀)이며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네 교법을 약해서 장(藏)·통(通)·별(別)·원(圓)이라 하고 [화법사교(化法四敎)]라고 한다. 이것을 총칭하여 [오시팔교(五時八敎)]라고 한 것이다.
Ⅳ. 신라와 고려의 선(禪)과 화엄(華嚴)
우리 나라에 선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나말려초라고 한다. 즉 법랑(法朗)·신행(神行)·무상(無相) 등에 의해서 초전(初傳)된 이래 도의(道義)·홍척(洪陟)·혜조(慧照)·도헌(道憲)·혜철(慧哲)·현욱(玄昱)·무염(無染)·범일(梵日)·도윤(道允)·이엄(利嚴) 등에 의해서이다. 이 밖에도 순지(順之)·경헌(慶猷)·충심(忠湛) 등에 의해서도 전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신라말 고려초의 선승들은 고려 중기에 들어서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정리되어졌다. 이 '구산선문'이란 표현은 이의가 있기는 하지만 나말여초에 성립된 것으로 본다. 이것은 한국선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는 말로 선문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여졌다.
하여튼 이 가운데 각각 산문을 개창(開倉)한 것을 조선후기(1660)에 성립된 {선문조사례참문(禪門祖師禮懺文)}에 의거해서 나열하면 가지산문(迦智山門)의 도의국사(道義國師)·사굴산문(사굴山門)의 범일국사(梵日國師)·사자산문(師子山門)의 철감국사(哲鑑國師)·성주산문(聖住山門)의 무염국사(無染國師)·봉림산문(鳳林山門)의 현욱국사(玄昱國師)·희양산문(曦陽山門)의 도훤국사(道憲國師)·동리산문(桐裏山門)의 혜철국사(慧徹國師)·수미산문(須彌山門)의 이엄국사(利嚴國師)·실상산문(實相山門)의 홍척국사(洪陟國師)·중흥조(中興祖) 보조국사(普照國師) 등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산문은 중국 오종가풍(五宗家風)을 혼합하여 받아들여 오지만 초전(初傳)의 가풍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종문(宗門)과 산문(山門)이라는 이중 구조적 위상을 나타내고 법통(法統)인 법맥(法脈)보다는 종통(宗統)인 인맥(人脈)을 중시하는 한국선가의 독특한 유풍(流風)내지는 종풍(宗風)이라고 하였다.
1) 나말려초의 선(禪) 전래와 화엄(華嚴)
이에 대해 다시 살펴보면 신라 법랑(法朗)의 법을 계승한 신행(信行, 704∼779)이 신수(神秀)의 문인 지공(志空)에게서 북종선(北宗禪)을 받아 와서 선법(禪法)을 폈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신라 말기 헌덕왕 13년(821)에 중국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문인인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받아 귀국한 가지산(迦智山)의 체징(體澄, 804∼880)은 도의(道義)의 법을 이어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開倉)하므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라말에 홍척(洪陟)·혜소(慧昭)·현욱(玄昱)·혜철(惠哲)·무염(無染)·도윤(道允)·범일(梵日) 등은 모두 남종선(南宗禪)을 전수(傳受)받아 귀국하고 각자 산문(山門)을 열어 종풍(宗風)을 드날렸기 때문에 고려초기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구산선문의 개조(開祖)들 모두가 마조도일의 선풍(禪風)을 전해온 것이다. 당시(9세기경) 중국 선종계는 마조의 홍주종(洪州宗) 외에도 우두종(牛頭宗)·정중종(淨衆宗)·북종(北宗)·하택종(荷澤宗) 등이 있었고, 석두희천계(石頭希遷系)도 새로운 선풍(禪風)을 드날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홍주종(洪州宗)은 그런 여러 종파(宗派)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신라의 입당승(入唐僧)들이 굳이 마조문하의 선법을 전해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마조는 한때 신라승 정중사(淨衆寺) 무상(無相)의 제자였다. 따라서 신라승들은 당연히 그에게 친밀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런 지연관계라면 직접 정중종의 법을 계승해 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연관계보다 홍주종의 독특한 선사상에 신라승들은 자국의 사회적 현실문제와 화엄이나 유식교단 내의 사상문제를 해결할 어떤 실마리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해결하고자 했던 사상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의상문하 화엄사상과 유식계통의 유식사상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교학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함은 아닐까? 이에 대해서 비록 고려말의 저술이라고는 하나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나타난 화엄계의 선승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 하대의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20대 155년간의 사회상은 방계(傍系) 김시왕실(金氏王室)이 등장하여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감행되고 있었지만 교계 또한 전통적인 화엄교학이나 유식학계가 현학적이고 사제(司祭)적인 불교로 전락하여 이를 올바로 계도할 방책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교학의 주류를 담당하고 있었던 화엄교학의 이론적 한계에 봉착했던 것이다. 즉 실천실증을 중시한 의상의 화엄성기사상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심행처멸(心行處滅)임에 대해서 각각의 화엄가는 자내증(自內證)적 확신을 목말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여망에 입당승들은 화엄과 사상적 궤(軌)를 같이하는 마조계의 선법(禪法)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홍주종의 마조선은 화엄의 성기심(性起心)의 실현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하고 이것을 시심시불(是心是佛)·즉심즉불(卽心卽佛)을 지향한 관행(觀行)이다. 규봉종밀은 당시의 선(禪)과 교(敎)를 회통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였는데, 북종(北宗)은 일체를 모두 망(妄)으로 보고, 홍주종은 진(眞)이라 하였으며, 우두종(牛頭宗)은 무(無), 하택종(荷澤宗)은 영지(靈知)이라 하여 석가가 하생하고 달마가 원래(遠來)한 본의라 극찬하였다. 그리고 화엄과 하택종과 홍주종을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홍주종은 능가종(楞伽宗)→동산종(東山宗)→남종(南宗)→홍주종(洪州宗)→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발달하였는데, 이런 발달과정에서 능가종과 동산종은 능가경(楞伽經)의 여래장사상이 바탕이 되고, 남종(南宗)은 금강경의 반야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홍주종은 명확하게 어떤 경론을 배치할 수는 없지만 마조어록의 전면에 흐르고 있는 것은 능가경의 심지법문(心地法門)이나 기신론(起信論)의 일심사상(一心思想)이다. 그런데 행주좌와(行住坐臥)가 그대로 도(道)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것은 화엄의 법계연기의 극치인 성기사상(性起思想)과 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규봉이 홍주종을 제3의 직현심성종(直現心性宗)이라고 하여 교(敎)의 현시진시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의 화엄종(華嚴宗)에 배대한 것은 이를 시사해 주고 있다. 홍주종은 이상과 같이 당시의 여러 선종 중에서 화엄의 성기사상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입당(入唐)한 신라승들은 지연보다는 자국의 현실극복의 대처 방안으로 마조선계의 선법을 전수하여 입국하여 각기 산문을 개창한 것이다. 그러나 교학을 부정하는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표어는 국내의 교학자들에게 마설(魔說)로 받아들여졌다. 이리하여 극단적인 대립의 양상을 나타나게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초나 중기에도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은 전통적인 화엄교학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선은 일체의 언교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화엄과 대립한다. 그러면서도 근본원리는 화엄과 통하고 있는 것이다. 선의 근본적인 사상적 바탕에는 교학의 극치인 화엄사상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은 화엄이나 교학의 골자, 즉 반야경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나 반야(般若) 공(空), 유마경의 불이(不二), 법화경의 성구(性具), 여래장계 경전의 불성(佛性), 능가경의 심지(心地) 등을 떠나 독존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화엄교학의 배경이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사상이 없는 행동은 맹목이며, 행동이 없는 사상은 공허한 것이다. 따라서 화엄과 선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상호배타적(相互排他的)이면서도 사상은 화엄에 두고 실천은 선에 의해서 체증되는 과정에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 어떤 교학보다 예를 들면 천태(天台)나 밀교(密敎)·정토(淨土)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화엄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있을 것이다.
2) 고려중기의 선(禪)과 화엄(華嚴)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한국불교의 시원(始原)은 말할 것도 없이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통일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북종선과 남종선이 전래되어 오교구산(五敎九山)을 성립하여 선교의 갈등 현상을 겪고서 선교병수(禪敎幷修)의 과정을 거쳐 고려 중기 의천(義天)은 천태종을 개창하여 불교를 쇄신하려 교선일치(敎禪一致)주창하였고, 지눌은 정혜결사를 결성하여 불교내의 자정운동을 전개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고려말 선가 내에서 벌어진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구산선문의 통합이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에 의하여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고려 초기 혜조왕사(慧照王師)와 탄연국사(坦然國師)에 의해서 전해진 이후 고려 중기 보조지눌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진 홍주종 계통의 임제선(臨濟禪)이다. 이러한 임제선은 고려말에 그 법맥을 이어받은 것이다. 임제종 계통의 선맥이 본격적으로 전해졌던 고려말에 활약한 선승들은 태고보우(太古普愚)·나옹혜근(懶翁慧勤)·백운경한(白雲景閑)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에 있어서 사상적 바탕은 무엇인가이다.
고려의 광종(光宗, 제위년 : 950∼975)은 지방호족세력과 선종을 제거하고 제종을 재편성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지방호족과 선종세력을 등에 업고 고려를 개창한 후 그 세력으로 인하여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왕권 다툼을 겪어야만 했던 광종은 미약한 왕권 강화를 위하여 이러한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하여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로 찬유(璨幽)·긍양(兢讓)·균여(均如) 등의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성상융회적(性相融會的) 화엄사상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광종은 존숭하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에게 지종(智宗) 등 36인과 함께 유학을 시켜 새로운 선종을 선양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력에 힘입어 연수(延壽)의 법안종 사상은 고려 중·후기 및 조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여튼 고려초기에 오교(五敎)와 구산(九山)으로 가라진 불교는 정치적 배경과 맞물려 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은 성상융회(性相融會)의 화엄사상과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천태사상을 바탕으로 천태종을 개설하고 천태의 교관병수(敎觀幷修)에 영향을 받아 선(禪)을 교(敎)로 통합하려는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의천의 화엄교학은 중국의 두순과 지엄·법장·징관·정원(淨源)으로 이어진 삼관오교(三觀五敎)의 교관겸수(敎觀兼修) 또는 교관병수(敎觀幷修)라고한다. 특히 법장이 화엄의 이론에 치중한 것을 극복하여 이사무애(理事無碍)를 중시하여 화엄적 입장에서 교선일치적인 징관의 화엄을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천의 교선일치는 징관이 천태의 영향을 받아 천태와의 조화를 시도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천은 비록 천태종을 개창하였으나 어디까지나 그는 화엄학도로서 자처하였고 그의 사상의 중심은 화엄이었다고하는 것이 주목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대화엄경(大華嚴經)의 장소(章疎)로 177부 1242권을 수록하면서 균여 11부 67권이나 되는 저서를 누락시키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참학도(新參學徒)인 치수(緇秀)에게 내린 글에서 해동(海東)의 화엄교학을 비하하거나 문장을 이루지 못한 억설이라고 비판하여 조도(祖道)를 어지럽게 하고 후학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의천이 비판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주장이 있어 왔으나 아직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인가? 혹시 의천이 중국을 다녀와서 사대주의에 젖어서 국내의 교학을 비하한 것은 아닐까? 그러면 이러한 균여의 화엄교학에 대해서 해주스님의 논문을 통해 대략 살펴보기로 하자.
균여(均如)는 의상의 화엄교학을 {법계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이하 원통기(圓通記)]를 통하여 고려에 전하고 있다. 그는 {법계도}가 원교(圓敎)의 종요(宗要)를 나타낸 것이고, 원교는 융회적 성격을 지닌 선교방편으로 불리어지는데, 그것이 여래의 어업성기(語業性起)로 인한 것이라고 {원통기}에서 설명하고 있다. 균여는 또한 {법계도}의 종요(宗要)를 법계(法界)로 보고 경종(經宗)인 법계로써 제명(題名)을 삼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횡진법계(橫盡法界)와 수진법계(竪盡法界)의 원융(圓融)으로써 원교를 해석하고 있다.
즉 일명구허(一名口許)인 횡진법계(橫盡法界)를 의상(義湘)설로 하고, 자명구허(自名口許)인 수진법계(竪盡法界)를 법장의 법계설로 보아 의상의 법계관을 근간으로 횡진(橫盡)과 수진(竪盡)의 원융인 주측론(周側論)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균여가 본 의상의 횡진법계설(橫盡法界說)은 영기다라니(緣起陀羅尼)를 설하는 수십전설(數十錢說)에서 나왔으나, 일(一)에서 일체(一切)를 이끌어내는 연기사상(緣起思想)이라기 보다는 일체(一切)가 일(一)로 귀결되는 성기사상(性起思想)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실상(緣起實相)은 내증(內證)이고 수십전(數十錢)의 중즉(中卽)은 내증(內證)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균여의 원융법계관(圓融法界觀) 역시 내증(內證)으로 귀결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균여의 육종해인설(六種海印說)을 통해서 증명된다. {원통기}에서는 제5종 과해인(果海印)인 내증(內證)을 {화엄경}의 해인정(海印定)에 배대하고 십불(十佛)의 삼종세간상(三種世間相)으로 설명하고 있다. 의상이 말한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중생세간(衆生世間)·기세간(器世間)의 삼종세간(三種世間)을 각각 적화(赤畵)·묵자(黑字)·지(紙)에 비유하고 3세간이 원융무애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법계해인(法界圖印)을 불해인(佛海印)·중생해인(衆生海印)·기계해인(器界海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단지 석가불해인(釋迦佛海印)으로 나타낸 것은 망념(妄念)이 다하여 마음이 맑아진 의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마음이 있는 자는 모두 부처의 지혜를 포함하고 있으나 다만 망상으로 전도(顚倒)되고 덮여서 자기의 해인삼매가 본래 저절로 원명하여 부처와 다르지 않는 줄 알지 못하며, 부처는 망녕된 분별을 쉬어 삼세간을 나타내고 해인 가운데 나타나기도 하는 이것이 곧 자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증분법성(證分法性)이 법신(法身)이고 또한 나의 다섯 자의 몸이라고 한 {법계도}의 내용과 동일한 의미이다. 따라서 균여는 법장의 성상융회(性相融會)적 사상과 아울러 의상의 법성원융(法性圓融)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원통기}에 보이는 균여의 원융법계관(圓融法界觀)은 그가 중시한 중도설(中道說)에서도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 균여는 {법계도}에 설해진 중도설를 먼저 소개하고 그것에 대해서 칠중중도설(七重中道說)로 설명하였다. 즉 1) 인과양위(因果兩位) 성재중도(性在中道), 2) 일승삼승(一乘三乘) 부즉불리지중도(不卽不離之中道), 3) 인중실제중도(印中實際中道), 4) 정의정설(正義正說) 일무분별중도(一無分別中道), 5) 이사무분별중도(理事無分別中道), 6) 일다불이(一多無二) 일무분별중도(一無分別中道), 7) 심상재중도(尋常在中道) 등을 설하면서 일체법이 중도아닌 것이 없다고 하여 무주법성중도(無住法性中道)로 귀결시키고 있다. 이 무주법성(無住法性)을 십불(十佛)이 증(證)하면 내증(內證)이 되고, 보현이 증(證)하면 외화(外化)가 되어 내외(內外)에 치우치지 않는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외화에 내증에 무애한 구래중도(舊來中道)와 같은 것으로 {법계도}에 7중(重)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균여는 이러한 칠중중도(七重中道)의 설명에 일관되게 무분별(無分別)을 중시하면서 무주법성중도(無住法性中道)로 통일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因)과 과(果)·일승(一乘)과 삼승(三乘)·증(證)과 교(敎)·이(理)와 사(事)·십불(十佛)과 보현(普賢)·내증(內證)과 외화(外化)가 모두 불이무분별(不二無分別)하여 원융하지만 어디까지나 내증인 증분(證分)·법성(法性)·중도(中道)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재중도(性在中道)·실제중도(實際中道)·구래중도(舊來中道)·이사무분별중도(理事無分別中道 ) 등의 무주법성중도(無住法性中道)에 궁좌(窮坐)하는 바로 그때가 구래부동불(舊來不動佛)이라는 것이다.
균여는 또 의상의 구래성불의(舊來成佛義)에 대해서 삼덕(三德)을 갖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번뇌(煩惱)가 끊어져 다한 것은 단덕(斷德)이고, 복(福)은 은덕(恩德)이며, 지(智)는 지덕(智德)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덕(斷德)은 법신(法身)이고, 지(智)는 응신(應身)이며, 은(恩)은 화신(化身)이 되며 법신(法身)은 본유(本有)이고 응신(應身)은 수생(修生)이라고 한다. 따라서 별교일승(別敎一乘)의 성불(成佛)은 수생(修生)과 본유(本有)를 구족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번뇌단진(煩惱斷盡)하여야 비로소 성불인 어찌하여 구래성불(舊來成佛)라는 질의에 대해서 {법계도}의 도신장(道身章)을 인용하면서 구래각(舊來覺)인데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우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치한 자가 어떻게 구래각(舊來覺)을 얻는가에 대하여 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즉 사람이 잠자면서 꿈꿀 때는 있던 것이 잠을 깨고 나면 꿈속에 있던 것이 사라지는 것처럼, 중생도 본래시불(本來是佛)이지만 번뇌망상의 꿈으로 인하여 구래불(舊來佛)인 줄 모르다가 번뇌를 끊어 다한 대몽(大夢, 윤회 속의 삶)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부처인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균여는 일념성불(一念成佛)과 원돈성불(圓頓成佛)의 일단일체단(一斷一切斷) 일성일체성(一成一切成)을 설하여 종래시각(從古是覺)과 본래시불(本來是佛)인 구래불(舊來佛)을 밝히기는 하였으나 신성불(新成佛)·수생불(修生佛)을 내세우지 못하여 의천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하지만 균여는 의상의 구래불(舊來佛)을 본래불(本來佛)로 계승하여 증분법성내증(證分法性內證)의 성기사상을 보조선(普照禪)에 접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것은 바로 선교병수(禪敎幷修) 또는 양립을 지향하면서 보현행자로서 이독체(吏讀體, 이두체)로 보현행원가를 지어 일반 민중에게 화엄의 세계를 이해하게 하고 몸소 화엄삼매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균여로부터 보조선에 접맥된 의상의 화엄사상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고려중기 선종계의 거봉(巨峰)인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 등 삼문(三門)을 세워 돈오점수(頓悟漸修)에 입각한 정혜쌍수(定慧雙修)·선교일치(禪敎一致)의 정혜결사를 결성하여 수행의 자내증적인 지도체계로 삼아 한국선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지눌은 먼저 규봉종밀의 선교일치사상을 이어 선교상자(禪敎相資)의 원칙에 의하여 정혜쌍수문(定慧雙修門)을 정립하고 선(禪)과 교(敎)의 대립을 지양(止揚)하여 지도이념을 세운다.
그리고 이통현장자의 {신화엄론(華嚴新論)}에 의지하여 대심범부(大心凡夫)를 위하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지어 원돈관행문(圓頓觀行門)을 세운 것은 화엄교학을 하나의 돈오원수(頓悟圓修)의 선문으로 회통시킨 것이 바로 회교귀선문(會敎歸禪門)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대심범부(大心凡夫)가 이 원돈문(圓頓門)에 의지하여 자성이 곧 보광명부동지불(寶光明不動智佛)임 돈오(頓悟)하고 일념부동(一念不動)의 삼매를 여의지 않고 보현만행(普賢萬行)을 원수(圓修)한다 하더라도 지해(知解)와 사의(思義)에 걸려 있게 되면 일념돈오(一念頓悟)와 만법적멸(萬法寂滅)의 실상(實相)을 바로 증득(證得)할 수 없다하여 그러한 알음알이와 생각의 범주를 초월하여 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증입(證入)하는 방편으로써 송(宋)의 대혜(大慧, 1088-1163)의 간화선(看話禪)을 받아들여 경절문(徑截門)을 세워 사교입선(捨敎入禪)케 하였다.
이러한 지눌은 의상의 화엄의 성기사상을 선에 일치시켜 전승시키고 있다. 지눌은 그의 저서 화엄관계 10권 가운데에서 의상의 {법계도}를 5회 인용하고 있는데, {원돈성불론}에서 2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서 3회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 인용문에 해석을 가하고 있다. {원돈성불론}에서 지눌은 {법계도}의 원융법성(圓融法性)을 자성청정원명체(自性淸淨圓明體)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자성청정원명체(自性淸淨圓明體)란 법장에게 성기관(性起觀)의 대표적 저술인 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에서의 일체(一體)인 성기체(性起體)를 가리킨다.
이 체(體)에 의하여 용(用)이 일어남을 성기(性起)라고 한 것이다. 중생의 본유진성(本有眞性)은 원명청정(圓明淸淨)하여 더러움에 있어도 때묻지 않는다. 자심(自心)의 청정한 각성(覺性)을 반조하여 망념이 다하고 마음이 맑아지면 만상(萬像)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이 해인삼매와 같다는 것이다. 의상이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 한 것은 이와 같이 자성(自性)이 본래 담적(湛寂)하여 이름을 떠나고 모양이 끊어진 곳을 몸소 증득하여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근원을 삼았기 때문이라고 지눌은 법성게(法性偈)를 이해하고 있다. 증분(證分)의 4구(句)가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근원을 표출한 것임을 거듭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지눌이 파악한 {법계도}의 법성성기사상(法性性起思想)은 보조선(普照禪)에 수용되어 돈오점수(頓悟漸修) 또는 돈오원수(頓悟圓修)의 내용이 되어 설잠(雪岑)에게 영향을 미친다.
Ⅴ. 결 론
이상과 같이 의상의 화엄사상이 선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기 위해 중국의 화엄교판과 관법을 개관하여 화엄과 선의 통로를 추적해 보았다. 그리고 해동의 화엄초조인 의상의 화엄교학의 핵심 주제인 성기사상을 개관해 보았다. 비록 의상이 성기(性起)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연기의 극치로 무주(無住)의 법성(法性)인 성기가 의상의 화엄사상의 핵심인데, 이러한 성기사상은 신라에서 의상의 후학들에 의해서 면면이 이어져 화엄과 선의 통로를 제시하였고 고려초기 균여(均如)에 의해 선교병립(禪敎竝立)기를 거쳐 고려중기 지눌에 의해서 완전한 선교일치(禪敎一致)라는 자내증(自內證)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특히 나말려초에 자발적인 선의 도입은 화엄과 사상적으로 연관이 깊은 홍주종(洪州宗)의 선법(禪法)을 들여와 대립의 양상을 보였지만 고려에 들어와 화엄과 선이 대립과 조화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일치에 이른 것이다. 즉, 선(禪)은 일체의 언교(言敎)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화엄과 대립한다. 그러면서도 그 근본원리는 교학의 극인 화엄과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은 원리에 있어서 교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화엄과 통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과 화엄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상호 이질적인 면을 내포하면서도 교학의 한계와 선의 한계 상황에서는 서로 조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수행체계에서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상의 화엄사상이 연기의 극치인 성기(性起)라고 할지라도 체증을 요하는 언어적 이론으로 미칠 수 없는 실증적 안티테제인 것이다. 또한 선의 실증을 위해서는 화엄의 내용이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의 극복은 지눌에 의해서 체험적으로 완전히 해소되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지눌의 정혜쌍수는 선교일치의 이념과 돈오점수의 수행법에 입각한 것인데, 이는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두순이 제시한 법계관문(法界觀門)인 진공관(眞空觀)·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과 오교지관(五敎止觀)을 비롯하여 지엄의 통관(通觀)과 이중관(二種觀)과 공관(空觀) 등과 오중관(五種觀)·18관법(觀法), 법장의 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으로 6종관법(種觀法)과 10종유식관(種唯識觀), 징관에서 종밀로 이어진 사법계관(四法界觀), 종밀이 의지한 하택신회의 공적지(空寂知) 등과 의상이래 전개된 성기무주법성(性起無住法性)의 오관(五觀)과 오중해인(五重海印) 등을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수증(修證)에 의한 실증(實證)으로 삼아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실현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불교 본래의 의미를 찾아 한국불교사에 면면이 이어져 환란(患亂)의 조선기를 지나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사상의 내용은 바로 의상조사께서 {법계도}와 {법성게}에서 제시한 실천과 사상인 것이다. 물론 이 밖에 원효를 비롯한 여타스님들의 사상과 실천이 있겠으나 화엄의 성기관(性起觀)이 부처님의 본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서로서로 소통하는 주변홤용(周遍含容)과 망진환원(妄盡還源)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의상의 화엄사상이 선(禪)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 보았다. 여기서 고찰해 본 것들은 이미 연구되어진 내용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것도 대략적으로 용어를 보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다면 화엄교학(華嚴敎學)에 천착(穿鑿)하여 연구해 볼 것이다. 아울러 덧붙인다면 화엄의 세계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이며 우주의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교학은 바로 우리 한국불교의 선사상에 녹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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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삼매(海印三昧)에 관해서 {諸經典에 보이는 海印三昧 小考}(白蓮佛敎論集 別冊, pp.79-83)에서 해주스님은 여러 典籍을 들어 자세히 밝히면서 해인삼매의 의미(意味)와 대용(大用) 그리고 해인삼매에 드는 인연을 기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바다에 모든 영상이 다 나타나는 것처럼 일체 색상이 보리심해중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여 해임삼매라고 한다고 하고, 2) 모든 물이 흘러서 큰 바다에 들어가는 것처럼 한량없는 일체제법도 다 법인(法印) 가운데 들어가므로 海印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3) 대해(大海)에 모든 용왕과 신중(神衆)이 머물며 큰 보배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이 삼매도 일체법과 모든 선교방편이 쌓여 있는 곳이므로 해인삼매라고 한고 하였다. 따라서 이 해인삼매는 십불보현(十佛普賢)의 해인(海印)이요, 석가불해인(釋迦佛海印)이고 정각해인(正覺海印)이며 제불여래응공등정각보리이며 무상보리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본각(眞如本覺)이며, 일체지(一切智), 대지(大智), 시성정각불심(始成正覺佛心), 증분내증(證分內證), 여래성기심(如來性起心)으로서 온갖 근기에 응하여 화현하지는 않지만 보리(菩提)의 무심돈현(無心頓現)이 바로 해인삼매라는 것이다.
* 삼문은 1)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은 하택신회(荷澤神會)와 규봉종밀(圭峯宗密)의 결택요연(決擇了然)한 지해(知解)에 의해 자심(自心)인 공적영지(空寂靈知)를 돈오(頓悟)한 영향을 받아 정혜쌍수(定慧雙修)로 망념훈습(妄念熏習)을 점손(漸損)하는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이며, 2) 원돈신해문(頓信解門)은 이통현장자(李通玄長者)의 화엄관(華嚴觀)에 입각하여 자심(自心)의 무명분별(無明分別)이 곧 제불(諸佛)의 부동명지(不動明知)임을 원돈신해(圓頓信解)하여 의성수선(依性修禪)하는 법이다 그리고 3)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은 대혜종고의 선사상(禪思想)에 입각하여 상기 이문(二門)의 지해분별(知解分別)을 마지막으로 탈각(脫却)하는 선문활구(禪門活句)를 간(看)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