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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있는 성벽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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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황 : 전체적인 모양은 삼각형의 형태이며 언뜻 보기에는 규모가 작은 망루형 산성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망루로 보이는 곳은 장대지이며 장대지 아래로 삼각형의 형태로 별도의 성벽이 석성으로 축성되어 있다. 남서쪽성벽은 삼중으로 축성되어 있으며 길이 약 10M 높이 약 4M 정도의 성벽이 원형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며 남동쪽 성벽에도 일부 원형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나머지 성벽은 모두 허물어져 성의 형태만을 보여 주고있다.
성의 남쪽 및 서쪽과 동쪽에 치성 및 문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성벽의 축성은 옥천의 환산성 및 이백리산성 노고성등과 같이 백제계로 확인되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백제계 성벽으로는 옥천군의 여러 백제계성을 포함하여 제일 높게 축성되어 있다.
쇠정골산성은 성의 남동쪽에 있는 자무실고개(탄현추정)를 지키기 위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서의 전망은 대전시가지가 잘 보이며 삼정동(판암IC부근)에서 자무실고개로 올라오는 골짜기가 한눈에 보여 성의 축성 목적을 알게 한다. 한편 이곳에서 옥천쪽의 자모리 골짜기는 보이지 않아 의문이 가며 성에서 약 200M 동쪽에 있는 봉우리(이곳에서는 자모리 골짜기 전체와 환산성과 이백리산성, 자모리산성등이 잘 보인다)에 별도의 망루가 있을 것으로 보이나 흔적을 찾지 못 하였다.
한편 쇠정골산성을 탐방하게된 동기는 탄현으로 추정되는 자무실고개를 탐방하던중 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쇠정골산성은 대전시와 옥천군의 경계에서 대전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성이라 아쉬움이 남으며 옥천의 인근성으로서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성이라 탐방기를 싣는다.
■ 문제점 : 이 성은 규모가 비교적 크고 탄현으로 추정되는 고개를 지키는 요충지에 축성되어 있으나 대전쪽에서 발간되는 산성의 책자나 학계의 자료에는 전혀 언급이 없으며 성의 이름도 본인이 출입구로 생각되는 쇠정골 마을 이름 따 쇠정골산성이라 명명하였으며 훗날 본래의 이름을 찾기를 바란다.
■ 찾아가는길 : 자무실고개에서 식장산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약 300M 정도 가다 왼쪽으로 능선을 따라 200M 정도 가면 성에 다다른다.
이제 국사봉으로 오르려면 이 곳에서 오른쪽으로 오릅니다. 깔딱고개라는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이 깔딱고개가 끝나는 지점 정상으로 가는 길이 오른쪽이고, 보통사람들은 정상보다 편한 왼쪽 옆길로 갑니다. 그러나 국사봉을 가고자 하면 오른쪽 가파른길 정상쪽으로 오르세요
임금을 사모하는 제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는 국사봉입니다. 옥천에서는 이곳을 식장산망루지라 부릅니다. 이곳은 주변에 상당히 많은 성이 있는 곳으로 제사터로만 보기에는 어렵고 식장산 모든 산성의 중심인 독수봉산성을 보호하는 보루시설로 생각이 됩니다. 그 이유는 상중리산성과, 국사봉보루, 쇠정골산성이 옥천쪽이 전망이 되지않는데 있습니다. 즉 부분적이 작전 수행만 가능한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돌을 쌓은 흔적이 아래 사진과 같이 있습니다.
국사봉에서 나무사이로 전망 할 수 있는 곳입니다. 통신탑과 판암동 아파트촌이군요...
국사봉에서 독수리봉산성으로 올라가는 도중의 자모리 계곡모습입니다. 고리산이 중앙에 보입니다.
그리고 독수리봉입니다. 독수리봉산성의 남아있는 성벽의 일부입니다. 보호가 되어야 할 유적입니다.
독수리봉 정상에서 주운 토기조각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관헤 조일권씨가 옥쳔신문에 기재한 내용을 보면
독수리봉산성지(鷹峰山城址)
■ 위치 :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 구절사 뒤 산봉우리
■ 시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해발 : 587M
■ 형태 : 테뫼형 석축산성
■ 둘레 : 약 300M
■ 탐방일시 : 2001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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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 성벽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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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황 : 독수리봉산성지는 군서면 상중리 구절사 뒤 산 정상에 축성되어 있으며 대전시와 옥천군의 경계선에 접해 있다. 식장산 산줄기가 ‘Y’자형을 이루며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그 가운데에 해당되며 옥천쪽에서 식장산을 바라볼 때에는 제일 높은 봉우리가 된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삼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옥천쪽인 동쪽은 절벽과 같은 매우 급경사면이고 서쪽은 상대적으로 다소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축성 형태는 사양성 및 노고성과 같은 축성 방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쪽사면에 원형의 모습이 약간 남아 있다. 능선과 맞닿는 남쪽과 북쪽에 문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성의 가운데에는 장대지가 있는데 그 넓이는 인근의 다른 성에 비하여 대단히 넓다.
독수리봉산성지는 식장산의 한 가운데에 해당되며 북쪽으로는 환산성과 이백리산성 그리고 노고성 등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멀리 서산성과 관산성이 보이며 제일 가깝게는 용봉산성이 마주 보인다. 남쪽으로는 사양성이 보이나 서쪽의 대전쪽의 계족산 줄기에 있는 산성은 숲에 가려 확인하지 못 하였다. 한편 성의 서북쪽 능선을 따라 500M 정도 떨어진 약간 낮은 산봉우리에 둘레 약 30M 정도의 망루지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쇠정골산성지와 함께 탄현(장고개=자무실고개)을 경계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수리봉산성지는 환산과 식장산 줄기에 있는 백제계 산성들 중에 성의 규모도 제일 크고 위치도 제일 높으며 또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다른 여러 성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가 서산성과 관산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옥각리와 월전리에서 공격을 한다면 백제쪽 지휘소는 독수리봉산성지가 지휘소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곳에서는 토기조각등 유물은 발견하지 못 하였다.
■ 문제점 : 독수리봉산성지는 옥천군지나 대전쪽의 산성자료에는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으며 대전시와 옥천군의 경계선이 성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나 성의 출입로가 군서면 상중리가 해당되어 옥천군에서 관리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편 휴일이면 대전쪽의 수많은 식장산 등산객들로 인하여 출입로가 훼손되고 있으며 성의 서쪽 숲에는 각종 오물등으로 어지럽혀 있다.
■ 찾아가는길 : 군서면 상중리에서 구절사 올라가는 등산로를 따라 구절사 까지 올라가서(몇년전에 올라갔을 때에는 길이 상당히 좋았으나 지금은 여름을 갓 지나서 그런지 구절사 바로 밑에서는 풀밭으로 변하여 길이 끊어져 있었다.) 절 뒤편의 산봉우리로 올라가면 된다. 다른 길로는 군북면 자모리 마을이나 대전의 세천수원지위에서 장고개(탄현?)에 올라 남쪽 능선의 구절사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이 독수리봉산성에서 옥천쪽으로 전망되는 사진입니다. 무중골, 구진벼루, 관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독수리봉산성은 식장산의 모든 산성의 중심인 것 같고, 옥천군 군서면이 다 보입니다. 관산성 전투의 후반부, 백제가 관산성 2차 공격 시 이곳에서 백제군 최고의 지도자가 전투의 모든 것을 보면서 지휘를 했을 것 같습니다. 클릭하시면 원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옥천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독수리본산성에서 구절사 쪽으로 오다보면 아래 사진과 같은 지형이 나옵니다. 중간길로 가면 길이 혼동이 됩니다. 왼쪽으로 가세요.
그리고 등산로사거리에서 아래 사진 '등'이 있는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래의 사진은 할애비산성 가기 전 506고지 정상의 언급되지않은 산성의 사진입니다. 바로 아래 2장의 사진과 같이 산정상을 두르는 퇴뫼식으로 흐터진 성벽이 있고, 정상에는 완전한 약 60Cm-1m 높이, 직경 10m의 원형 성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506고지는 상중리와 할애비산성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독수리봉에서의 명령을 전달하는 봉화 및 교통로 역활과 상중리와 할애비산성쪽으로의 병력 통제를 했을 것 같고, 위기 시 독수리봉산성의 방어도 이 산성의 역활중 하나였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지난 8월 3일 현철백작과 이곳으로 올라오지않고 옆길로 접어들면서 상중리로 내려갔습니다.
506고지에서 내려보이는 관산성과 구진벼루, 사진 아래 보이는 마을은 오동리 무중골입니다. 참고로 무중골은 백제군이 주둔을 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아래 사진은 구글지도에 506고지와 할애비산성사이 작은 점에 위치한 성벽입니다. 그러나 이것외의 성벽은 없고, 성벽 위는 길입니다. 그리고 아래 사진과 같은 경사가 60-70˚ 가 되는 계곡이 있습니다. 무중골에 병력이 배치되어 있어 이곳까지 신라군의 소수특공대 공격을 대비하여 만든 성벽같진 않습니다. 반면에 이곳으로 많은 병력이 이동하다 보니 골이 깊은 곳의 계곡위 길의 파손이 되는 경우가 있어 병사들의 다리는 길을 보완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할애비산성(숯고개산성) 입니다. 할애비를 한자화하여 노구산성이라고도 하고, 할매산성과 사이에 숯고개가 있었어 숯고개산성이라고도 합니다.
할애비산성에서 본 관산성과 구진벼루입니다.
할애비성에서 본 서산성과 진터벌입니다.
할애비성에 관하여 조일권씨는 자모리성으로 가칭하였고, 옥천신문에 기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자모리성(自慕理城 ) (속칭 할애비성)
■ 위 치 : 오동리 무중골과 이백리 갯골 사이의 숯고개 서쪽 500M 산정
■ 높 이 : 해발 511M
■ 형 태 : 퇴메형 석축산성
■ 시 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둘 레 : 약 3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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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 망대지의 남쪽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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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황 : 전체적인 모양은 'C'자 형태로 남쪽 성벽이 안으로 굴곡진 형태의 석성이며 성의 남쪽 방향을 경계하기 위하여 축성되었고 이웃 노고성이나 환산
성과 같은 형태의 축성법을 보여주고 있다.
식장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온 산 능선중 오동리 점말 부락과 자모리 윗자모실 부락과의 경계면에 동서로 능선을 따라 길게 축성하였으나 남쪽 성벽의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져 원형의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성벽은 남쪽 방향은 능선에서 5-6M 아래에 높이 약 3M 정도로 축성하였으며 북쪽 성벽은 이웃 환산성과 같이 능선에서 약 20M 정도 아래에 축성을 한 흔적이 있으나 동쪽 망대지 부분을 제외하고는 무너진 돌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성의 서쪽 부분에 장대지가 있으며 동쪽 부분에는 망대지가 있다. 한편 장대지 부분에는 돌로 쌓인 지름 약 2M 정도의 안쪽이 움푹 들어간 원형으로 된 시설물이 있는데 후기에 봉화터로 사용하지 않았나 한다. (주민의 말로는 이성에 봉화터가 있다고 함.) 또한 성의 내부 곳곳에 주거지로 보이는 움푹 파인 지형이 곳곳에 있다.
이곳에서의 전망은 동북쪽으로는 노고성과 환산성이 동남쪽으로는 서산성과 관산성이 남쪽으로는 용봉과 동평성이 잘 보인다. 한편 서쪽으로는 탄현(炭峴)으로 추정되는 고개인 윗자모실 마을에서 대전시 삼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잘 보이며 고개 너머로는 대전시가지 일부가 보인다.
자모리성은 백제계의 성으로서 이웃 노고성과 함께 성의 남쪽인 옥천 - 군서간의 통로를 방어하며 윗자모실 마을에서 대전시 삼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탄현의 입구인 자모리 골짜기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 문 제 점 : 이 성은 규모가 비교적 큼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이름을 갖지 못하고 노고성의 부속 망루정도로 옥천군지등에 기록되어 있으나, 금번 탐방 결과 오히려 노고성을 능가하는 규모인지라 이웃 노고성과 구별하여 본인이 우선 성의 출입로로 추정되는 마을이름인 '자모리' 마을 이름을 따 '자모리성'이라고 성의 이름을 붙여 보았으며 훗날 원래의 이 성 이름이 밝혀지길 바란다.
■ 찾아가는길 : 이백리 갯골과 무중리 사이의 고개인 숯고개에서 식장산 방향인 서쪽으로 500M 정도 능선을 따라가면 자모리성의 동쪽 망대지에 다다른다.
할애비산성과 할매산성 사이에 숯고개가 있습니다. 이 고개는 이백리 갯골에서 오동리 무중골로 연결하는 고개로 경사가 급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숯고개를 탄현이러고 하나 탄현이라 하기에 고개가 급하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개에 지나지않기에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고개는 관산성 전투 시 전략상 중요한 거점 이었을 것입니다.
할매산성(노고산성)을 가는 도중에 비가 내려 할매산성에서는 사진도 제대로 찍지못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빗속에서 찍은 할매산성입니다.
노고성(老姑城)
■ 위 치 : 오동리 무중골과 이백리 갯골 사이의 숯고개 동쪽 400M 산정
■ 높 이 : 해발 410M
■ 형 태 : 석축산성(본인표기 일자형)
■ 시 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둘 레 : 약 25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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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 성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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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황 : 석성으로 동서로 능선을 따라 길며 전체 적인 모양은 남쪽 방향이 튀어나온 삼각형의 모양으로 남쪽 방향은 수십길의 절벽이라 장대지 부분만 일부 석축을 하고 나머지 부분은 축성치 않았으며 북쪽 방향은 길게 석축을 하였다.
환산성과 마찬가지로 자연 석재를 사용하여 높이 3-4M 정도로 축성하였으나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분만 남아있다. 동쪽과 서쪽에 문지가 있으며 서쪽에 장대지로 보이는 넓은 대지가 있고 북쪽에는 길게 넓은 대지가 있어 병영지로 보인다.
한편 성의 남쪽 절벽을 비스듬히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어 군북명의 이백리와 군서면의 오동리에서 이 오솔길을 사용하여 성을 오르내렸다고 생각되며 이 성에서는 토기편을 발견할 수 없었다.
노고성은 성의 남쪽인 옥천 - 군서간의 통로를 방어하며 동쪽으로는 건너편 환산성과 함께 옥천 - 대전간의 통로도 방어하고 최전방 백제계 성인 서산성과 관산성을 지원하는 등 식장산 줄기의 여러 성, 보 중 제일 동쪽에 축성되어 백제의 주요한 성이라 하겠다.
■ 문 제 점 : 노고성 역시 옥천군의 안내판은 볼 수 없었으며 장대지에는 민묘가 있어 유적지가 훼손되었으며 동쪽 문지 입구에는 예비군 참호로 보이는 구덩이가 있다. 한편 옥천군지에는 성의 서편에 있는 오동리 무중골과 이백리 갯골 사이의 숯고개를 백제 충신 성충과 흥수가 지적한 탄현(炭峴)으로 일부 사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금번 탐방 결과 이 고개는 결코 백제의 충신 성충과 흥수가 지적한 탄현(炭峴)이 아님이 확실한바 옥천군지의 정정이 필요하겠다.( 이 부분에 관하여는 추후 숯고개(炭峴)편에서 자세히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 찾아가는길 : 이백리 갯골 저수지 상류에서 오른쪽으로 개울을 건너 잘 닦여진 임도를 따라 1Km 정도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숯고개로 올라가는 등산로 표시를 볼 수 있는데 이 곳에서 200M 정도 올라가면 숯고개(아무표시도 없음)에 다다르고 이 고개에서 동쪽능선으로 또 400M 정도 올라가면 된다.
할애비성과 할매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고 옥천신문에서 언급합니다.
군북면 이백리 괴목마을 뒷산과 군서면 오동리 무중골, 이백리 갯골 사이의 숯고개와 연결되는 곳에 위치한 할아비성과 숯고개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할미성은 식장산 줄기의 여러성과 함께 백제의 최전방 요새로 신라와 백제의 전쟁이 격렬해 지면서 젊은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가고 없을 때, 이 두 개의 성은 축조됐다고 한다. 결국 한쪽의 성은 할아버지들이 쌓았고 한쪽은 할머니들이 쌓았는데 할머니들이 쌓은 성이 더 튼튼하고 견고해 백제의 변방 경비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전설로 그게 성이름이 되었습니다.
황건하 문화원부원장은 "숯고개를 사이에 두고 할미성은 장병들이 머물렀고 할아비성은 장수들이 머물렀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라며 "전설과는 달리 할애비성이 할매성보다 더 큰 규모를 지니고 있다"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할애비산성에서는 구진벼루와 관산성 그리고 진터벌과 서산성이 관측이 됩니다. 구글지도를 참조하면, 독수리봉산성에서 백제의 최고지휘관이 전투의 총지휘를, 할애비산성에서 그 다음 지휘관이 관산성과 서산성쪽을 공격을 맡아 지휘를 했을 가능성이 있고, 할매산성에서는 직접 장군과 병사가 전투현장으로 출동을 하는 곳으로 생각되어지는데, 이곳에서는 이백리쪽으로도, 구진벼루쪽으로도 진격이 가능한 곳 같습니다.
여기서 이백리 승지골 전설(이야기)를 소개를 하면, 위치는 구글지도 참조,
성왕의 태자인 여창이 고리산에 주둔하고 있고, 신라군사가 이곳을 공격하려고 기어오르려다가 마침 도착한 성왕이 급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성왕은 왕과 태자가 성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하여 태자가 주둔한 성의 서쪽에 있는 노고성에 오르기 위해 이백리 갯골에 이르렀고, 이때 신라군의 급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따라서 성왕이 전사한 곳이 군서면 월전리가 아닌 군북면 이백리로 보는 견해는 상기 이야기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표조사 결과, 고리산과 고리산 부근의 성지는 규모가 너무 협소하여 백제의 많은 병력이 주둔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게 일반적인 견해로 위 이야기는 이야기(전설)로만 인정되고 있다.
독수리봉산성에서 이백리까지 내려오면서 이 이야기(전설)가 일부 와전되어 전설처럼 들릴 뿐 실제 역사적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매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군이 이백리 야산에 매복을 하고 있다가 현재의 각신로(옥각리)쪽에서 마달령쪽으로 철수하는 백제 여창의 부대를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할수 있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창의 철수로는 당연히 지금의 장고개쪽으로 철수를 하여야 하는데, 백골산 및 대전의 직동 핏골의 전설를 미루어 지금의 마달령쪽으로 한 것 같습니다. 이는 관산성 안에 있는 신라군의 병력을 마달령쪽으로 분산시킨 후 이백리 황골에서 백제군을 추격하는 신라군을 중간에 급습하여 신라군의 중심 군사력을 약화시킨 후 할매산성에서 구진벼루를 걸쳐 관산성을 공격하여 관산성을 탈환 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독수리봉산성에서 이백리 능선길을 알지못했을 때 승지골 위치를 보면서 백제군이 자모리쪽에서 신라군을 습격한다면 기습이 되지않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승지골의 위치가 잘못되지않았나 생각도 해보았으나, 할매산성에서 이백리쪽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의외로 편한 산길이고, 이백리 야산에서 승지골(황골)까지 달리면 10-15분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고 보면 이곳 할매산성쪽 이백리 야산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 되었다.
할매산성에서 구진벼루쪽으로 내려가진 못했으나, 구진벼루는 자주 가보았어 할매산성에서 구진벼루까지 산길은 언급 할 수 없으나 구진벼루쪽을 아야기 할 수 있어 언급을 하겠습니다.
할매산성에서 관산성쪽으로 가다보면 서화천이 나오는데, 그곳에 구진벼루가 있습니다.
구진+벼루, 구진(狗津) 개구자에 나루진, 건널진, 구천(拘川) 개구자에 내천자 이다. 앞의 구자가 모두 개구자로 구천을 의미하고, 그 하천의 폭이 나룻배를 이용하여 건널만한 곳이 못되어 배없이 건너는 건널진으로 해석이 되고, 벼루 병풍처럼 둘러싸인 벼랑, 구천(서화천)을 건너는 곳에있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벼랑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구진이라는 말은 일반백성에서 나온 말이기보다는 군사적인 면에서 나온 말로 생각이 됩니다. 구진이 일반 사람등에 의해 붙여진 지명이라면 일반 사람들이 서화천을 많이 건너는 곳에 구진이라는 지명이 붙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 말까지 교통수단은 비슷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구진벼루로 일반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선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척화비를 세윘는데 그곳은 삼양리삼거리(지금사거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진벼루는 일반 사람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관산성 전투 과정에서 백제군이 관산성 공격 시 진터벌에서 삼거리 토성이나 서산성쪽으로의 공격은 지형상 상당히 불리한 위치로 너저히 서화천(구천)을 건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구진벼루의 지형은 반도 형태로 서화천이 돌아 삼면으로 공격이 가능하고, 일부 지역(진덕이들)은 서화천(구천)을 건너도 야산이 아니라 들로 백제군이 다른지역보다는 신라군의 저항을 덜 받고 서화천(구천)을 건너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 그래서 이곳에 구진벼루로 구진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구진 = 구천으로 이곳에서 성왕이 전사한 곳일까?
구진은 구천을 건너는 곳 한 지점을 가르키는 말이 되고, 구천은 그 당시 백제인이 인식한 서화천, 좁게는 명경소류지가 있는 곳에서부터 삼양리 삼거리 서화천까지, 넓게는 지금의 서화천 모두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진과 구천은 같은 말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은 좀더 연구를 하여야 할 사항으로 생각합니다.
첫댓글 구진벼루는 알고 있으나,구진이란 명칭은 처음입니다.
무더위와 싸우며 대전에서 옥천까지 답사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네요.
아무튼 젊음이 샘솟는 열정이 부럽기만 합니다.
구진이라는 말은 구진벼루에서 나온 말로 "신라와백제의 격전지(관산성)지표조사보고서"66쪽을 참조하면 천(川)과 진(津)은 우리말 "내"와 "나루"로서 혼용되어 웅진과 웅천이 혼용된 경우가 있으므로 구진이 구천으로 명기 될 수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즉 구진벼루의 구진에서 구천을 추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천유원지에서 식장산의 독수리봉은 2시간 반 코스로 오릅니다. 독수리봉에서 이백리까지는 계속 내리막으로 세천유원지로 다시 돌아 내려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않습니다.
성왕은 6세기에사비천도한 백제의 중흥왕 이겠지요? 10세기에 발해도 성왕이 있었는데 .. 위치적으로 발해는 전혀 아니고....맞나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제 26대성왕은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서화천(구진벼루,구천)에서 신라군 도도장군에 전사당했답니다.
이 글을 읽고 다시 공부해 보니 삼국의 전투 시기가 맞더군요. 성왕이 조금만 앞뒤상황을 고려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텐데 ...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백제가 삼국을 통일하였으면
지금의 한국은 문화대국이라 확신합니다.
백제문화가 성왕때 융성했다지요?
아쉬움이 남는건 나도 한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