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14
또다시 수능일이 다가왔다. 사람살이는 통과의례로 채워지는 듯하다. 봄 다음에 여름이 오고, 가을 다음에 겨울이 오듯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치러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이태원 참사, 오봉역 역무원 사망사고, 영등포역 무궁화호 탈선 등 수많은 재난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세상의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통과의례로 치러야 할 일 중 하나가 수능시험이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시국이 어수선해서 불안할 것이고, 준비가 덜 되어서 심란할 것이다. 세상 밖은 시끄럽지만 그동안 수많은 날들을 공부하며 준비했으니 수험생들은 끝까지 힘을 내서 완주하기를 기원한다.
공부가 힘들 때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책 속에 있는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저 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는 것만큼 행복하게 느끼는 경우다. 이응록(李膺祿·1808~1883년 이후)이 그린 ‘책가도(冊架圖)’ 10폭병풍은 두 가지 생각이 모두 반영되어 있는 그림이다. 책가도는 책장을 그린 그림이다. 가구 자체를 그렸다는 뜻이 아니다. 책장 안의 책과 문방구 그리고 향로, 도자기, 시계, 청동기, 잔 같은 기물들이 진짜 주요 소재다.
‘책가도’는 10폭으로 된 병풍인데 중앙의 5, 6폭을 중심으로 완전히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다. 좌우대칭은 보는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는 구도로 균형미를 중요시한 궁중회화의 특징이다. 책장의 형식은 2폭과 9폭만 4단이고 나머지는 3단이다. 4단의 경우에도 중간의 칸막이를 제거함으로써 변화를 주었다. 그 덕분에 답답하지 않고 3단 같은 느낌이 든다.
‘책가도’에는 하나의 소실점에 시선을 고정하는 일점투시도법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서양화법에 적용된 똑같은 형식의 원근법은 아니다. 책장 안의 물건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다시점(多視點)의 투시도법이다. 즉 5, 6폭의 2단 가운데를 중심으로 맨 위의 단은 아래에서 위로, 맨 아랫단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렸다. 공간감과 깊이감은 칸막이의 옆면을 통해 드러내었다. 칸막이의 바깥쪽은 갈색인 반면 안쪽은 조금 더 어두운 색을 칠해 원근법의 효과를 시도하였다.
‘책가도’는 책장을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책이 가장 중요하다. 그림 주문자는 자손들이 그림 속의 책을 보면서 책과 친숙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책은 지금처럼 세로로 세워놓는 식이 아니라 바닥에 뉘어놓는 식으로 배치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책도 중국책과 조선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이즈가 크고 개별적으로 놓인 책은 조선책이다. 사이즈가 작고 포갑(包匣)에 둘러싸인 책들은 중국책이다. 포갑은 책갑이라고도 하는데 책이 찢어지지 않게 비단으로 배접한 상자이다. 조선책은 닥나무 껍질로 만들기 때문에 튼튼해서 판형이 크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책들은 얇은 종이로 만들어 작고 얇기 때문에 잘 찢어진다. 그래서 포갑에 넣어서 보관한다. ‘책가도’에서는 책장에 중국책과 조선책을 진열해놓음으로써 그림 소장자의 지적 허영심을 과시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요즘 서재에 한국어책 뿐만 아니라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로 된 원서들을 장식해놓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서재의 주인이 실제로 그 나라 언어들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 책을 소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 이응록. ‘책가도’. 종이에 색. 152.4×351.8㎝. / 국립중앙박물관
책과 꽃
그러나 이응록의 ‘책가도’는 장식적인 목적이 더 강하다. 책과 함께 진열한 소품들이 희귀하고 값비싼 골동품이거나 수입품이기 때문이다. 1폭의 2단에는 진달래가 꽂혀 있는 노란 화병이 등장한다. 이렇게 목이 가늘고 스카프를 두른 것 같은 화병은 청대 초기에 제작되었다. 공작새 깃털이 꽂힌 화병, 불수감을 담은 소반, 가로로 잔대 위에 놓인 잉어장식, 수선화가 담긴 수반 등등은 모두 중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수입품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메이드 인 차이나’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시 중국산은 고급스러움의 상징이었다.
이런 기물들은 장식적인 목적 외에도 당시 사람들의 기원과 염원이 담겨 있다. 수선화(水仙花)는 ‘물의 신선의 꽃’이라는 용어 뜻 그대로 장수를 상징한다. 진달래는 새로운 기운이 가득 담긴 봄을 상징하고, 석류는 씨앗이 많아 다산을 기원한다. 불수감(佛手柑)은 부처의 손가락이 붙은 모양새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복과 장수를 상징하고, 모란 역시 꽃 중의 꽃으로 인정받아 부귀화(富貴花)로 사랑받았다. 여기에 국화를 그려 넣음으로써 주렴계(周濂溪)와 도연명(陶淵明) 이후 은일(隱逸)하는 지식인의 품격도 갖추고자 했다. 수석(壽石)은 문인들이 취미생활로 수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돌은 단단한 속성 때문에 장수를 상징했다. 시계가 걸린 산호와 공작의 꼬리 깃털 역시 귀한 보석으로 중국에서는 높은 관직에 오른 관리들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 고위 관직에 오르고자 하는 당시 사대부들의 욕망을 담고 있다. ‘책가도’에 담긴 책과 문방사우가 선비들의 거처인 서재를 충실하게 표현했다면 나머지 기물들은 다산과 장수, 출세와 부귀 등의 길상을 반영하였다. 이런 길상적 의미와 장식미가 결합되어 책거리 그림인 책가도는 사대부에서 민간에까지 널리 향유되었다.
그런데 9폭의 두 번째 단에 있는 인장함에는 6개의 도장이 담겨 있다. 그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도장은 옆으로 뉘어져 있고 찍는 면에 ‘이응록인(李膺祿印)’이라고 새겨져 있다. 작가가 이렇게 은밀하게 자신의 사인(sign)을 새겨넣는 것을 은인(隱印)이라고 한다. 이응록은 원래 이름이 이형록(李亨祿)이다. 그는 20여 차례에 걸쳐 도감의궤를 제작하였고 철종 어진 제작에도 참여한 자비대령화원이다. 그런데 이형록은 두 차례에 걸쳐 이름을 개명했다. 첫 번째는 56세 때인 1864년에 이형록에서 이응록(李膺祿)으로, 두 번째는 63세 때인 1871년에 이택균(李宅均)으로 개명했다. 따라서 이응록이라는 도장이 찍힌 ‘책가도’는 1864년부터 1871년 사이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형록은 16명의 화원(畫員) 화가를 배출한 유명한 전주 이씨 집안이다. 조부인 이종현(李宗賢)은 정조가 뽑은 초대 자비대령화원이었고 아버지와 삼촌, 사촌은 물론 세 아들이 모두 화원이었다. 이들은 중첩된 혼인관계를 통해 화원 집안의 명성을 유지하였다. 책가도는 이형록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가업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었다.
문예군주 정조의 탄식
책거리 그림이 유행하게 된 것은 책을 가까이하고 사랑한 선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책거리 그림은 학문을 중요시했던 조선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책거리 그림은 언제부터 그려지게 되었을까. 이정은은 ‘이형록과 19세기 조선 화단’(2017)에서 책거리 그림이 정조의 명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분석했다. 정조는 문예군주답게 책을 무척 사랑했다. 뿐만 아니라 책이 그려진 책거리 그림까지도 제작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에게 책가도를 그리게 하여 어좌 뒤를 장식하게 했다. 원래 어좌 뒤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를 세워놓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조는 일월오봉도 대신 책거리 병풍을 장식하게 한 다음 대신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예전에 정자(程子·程顥, 程頤)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책방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정조의 말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책가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책을 직접 읽는 것도 좋지만 책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정조의 말은 참된 애독자의 모습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그런데 정조가 일월오봉도를 책가도로 바꾸면서까지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책을 읽으며 마음을 추스르는 대신 호화스러운 물건을 소유하려는 사치풍조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시와 산문을 엮은 ‘홍재전서’에는 다음과 같은 정조의 탄식이 기록되어 있다.
“근래 사대부들은 풍습이 아주 괴상하여 우리만의 형식을 꼭 벗어던지고 멀리 중국인들이 하는 짓을 배우려 한다. 서책은 물론이요 일상의 그릇과 집기도 모두 중국산 제품을 사용하고 그것이 고상한 취향이라고 경쟁한다. 먹, 병풍, 붓걸이, 의자, 탁자, 고가의 골동품 따위의 갖가지 기교를 부린 물건을 좌우에 늘어놓고,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는 그런 자가 많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구중궁궐 깊이 앉아 있는 나까지도 풍문에 들었으니 낭자한 폐해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정조의 한탄처럼 영·정조 시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함께 사치풍조가 경화세족은 물론이고 중인층과 민간에까지 만연했다. 이것은 완물상지(玩物喪志)를 경계하던 유학의 이념과는 한참 동떨어진 사회현상이었다. 완물상지는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소중한 자기의 본마음을 잃어버리는 일을 경계하기 위한 용어다. ‘서경’에 기록된 이후 제왕과 대신, 유학자와 선비들이 금과옥조로 삼은 사자성어였다. 검소함과 절약을 중요시하던 성리학적 가치관이 호화사치품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다. 이응록의 ‘책가도’는 당시 사대부의 소비문화를 대변하는 역사적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정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가을에 그만큼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응록이 활동했던 19세기에 책가도가 유행했던 이유는 정조처럼 책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책과 함께 그려진 중국산 사치품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게 작용했다. 어떤 유교적 이념이나 사상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사치풍조와 그에 대한 동경이 책가도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듯 문화현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고 기대된다. 우리 시대에 책가도를 그린다면 그 안에 어떤 내용과 소망을 담을 수 있을까. 며칠 후면 수능시험을 끝마치게 될 수험생들에게 책가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