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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천보산
2024년 02월 18일(일요일)
산행코스 : 회암사(08:10) - 천보산(08:50) - 해룡산갈림길(09:20) - 해룡산(10:30) - 장림고개(11:45) - 칠봉산(12:20) - 내촌마을(13:25) - 회암사(15:00) - 회암사지박물관(15:35)
산행거리 : 21.8km
천보산 들머리
회암사지 전망대 0.1km, 덕정역 5.4km, 천보산(회암동) 정상 1.9km
들머리로 진입하지 않고 회암사로 올라갑니다.
회암사 일주문
천보산회암사(天寶山檜巖寺) 현판과 아래 양주천하제일문(楊洲天下第一門)
일주문 현판 글씨는 양수 오봉산 석굴암의 주지인 도일 스님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회암사가 보입니다.
회암사 경내
조사전
조사전에는 회암사와 관련이 깊은 네분의 고승 진영과 목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목조여래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6호)
목조여래좌상은 회암사 경내 조사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50.2cm의 불상입니다. 불상은 약간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로 얼굴과 신체의 비례가 알맞은 편입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아미타수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조사전 아미타불 목조여래좌상
목조여래좌상은 회암사 경내 조사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50.2cm의 불상입니다.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해 1755년 3월 창평 용흥사 상선암에 봉안하기 위해 상정, 유순, 우학, 칭숙 등의 조각승이 제작한 것임을 알수 있으며, 이곳 회암사로 옮겨진 시기는 알수 없습니다.
대웅전
전면 3칸, 측면 3칸의 주포식 팔작지붕의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있습니다.
삼존불과 함께 후면의 목조후불탱인 영상회상탱도 금분을 칠해서 무척 화려하게 보입니다.
관음전
전명3칸, 측면2칸 다포식 팔작지붕입니다.
관음보살상을 주불로 봉안되어 있고, 신중탱과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관음보살상
삼성각
삼성각은 산신, 칠성, 독성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사찰 당우 중 하나입니다.
내용은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3칸짜리 전각입니다.
대웅전 옆 산 능선으로 오르는 데크로 진행하면 무학대사 부도를 비롯한 화암사지 보물을 만날수 있습니다.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조선 초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 자초(1327~1405)의 행적을 담은 비로, 그의 생애와 업적, 중건비를 세우게 된 경위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조는 조선개국은 물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데 큰 역활을 한 무학대사를 왕사로 책봉하고, 묘엄존자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비문은 조선 태종 10년(1410)에 왕명에 따라 변계량이 글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세워졌으나 1821년(순조21)에 비가 인위적으로 파괴됨에 따라 1828년(순조28)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비의 형태는 낮은 지대석위에 모서리를 둥글게 한 높직한 사각 받침을 놓고 흑청석재의 비신을 세웠으며, 팔작지붕이 그 위에 놓여 있습니다.
비의 총 높이는 340cm이며, 비석은 높이 223cm, 폭 89.5cm, 두께 28.5cm입니다.
현재의 비 우측에 최초의 비석에 사용되었던 석재를 사각 받침석 위에 연꽃잎 형태의 지붕을 올려 보전하고 있는데 비신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쌍사자석등은 무학대사탑과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으로 무학대사탑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쌍사자석등은 1407년(태종7) 보물 제388호 무학대사탑과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으로 무학대사탑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석등은 어둠을 밝혀 준다는 조명의 역할 이외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불가의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쌍사자석등은 우리나라 고유의 석등 형식인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간주석이 2마리의 사자로 대처된 이형에 속합니다.
또한 목조 건축의 지붕에서 유래된 옥개석의 형태, 화사석의 창을 두방향으로만 내고 있는 점, 그리고 사자를 비롯하여 연꽃무늬 등의 표현방식에서 조선 초기의 양식적인 특징이 확인됩니다.
높이는 2.6m이며, 평면의 전체적인 기본 형태는 네모꼴을 띱니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하대석에는 모두 8판의 연꽃이 겹을 이루면서 넓적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위의 간주석은 2마리의 사자로 조각되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통일신라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하대석과 같은 형태의 연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1단의 각형 굄이 각출되어 있습니다. 화사석은 2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두 방향으로만 화창을 내었습니다. 옥개석은 보주까지 모두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목조 건축물과 같은 형태로 제작하여 옥개 받침을 대신해 목조가구에서 보이는 부재들이 표현되었습니다.
무학대사탑과 석단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제388호)
무학대사탑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1307~1405)의 승탑이며, 무학대사비(도유형문화재 제51호)에 적힌 기록을 통해 대사의 업적을 기리려고 1407년(태종 7)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학대사탑은 조선 전기 부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힙니다. 지공선사와 나옹선사 부도와 같은 구형 부도형식의 예에 속하지만, 8각의 석단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부도를 봉안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또한 표면에 새겨진 조각수법도 매우 뛰어나는 등 조선전기 석조 미술품을 대표하는 매우 뛰어난 수작입니다. 높이는 2.7cm로,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높고 널찍하게 전체8각을 이루는 석단을 마련하였습니다. 석단의 각 모소리에는 정상부를 보주 모양으로 장식한 네모난 돌기둥을 세운 뒤, 그 기둥과 기둥 사이에 넓은 장대석을 끼워 넣었습니다.
난간석을 둘렀는데, 이것은 석단 중앙에 위치하는 탑을 보호하는 일종의 장식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중심에 세우고 그 주변에 석단을 마련하는 것으로 이전 시기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형식입니다.
양주 회암사 지공산사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와 귀부
지공선사의 부도 앞에 있는 이 부도비는 지공선사의 유래를 기록한 비입니다.
원래의 부도비는 이색이 찬하고 한수가 글씨를 써서 1378년(우왕4년)에 건립하였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도비의 건립연대는 숭전기원후사무자오월 일립으로 기록되어 있어, 1828년 순조 28년에 중건한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 부도비 옆에는 비의 구부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지공선사 부도비의 구부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부도비 형태는 옥개석, 비신, 비좌, 지대석의 구조입니다.
규모는 옥개석이 140x78x50cm, 비신이 96.7x27.5x238cm, 비좌가 147.5x78.5x63cm, 지대석이 165x211x19cm로 총높이는 379cm 입니다.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석등은 4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4각의 상, 중, 하대석 위에 2매로 된 화사석을 마주 붙여 화창이 앞뒤 두 곳만 나 있습니다. 화사석 위로는 사각의 옥개석이, 옥개석의 꼭대기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구슬 장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공선사 부도
1326년(고려 충숙왕 13)부터 약 2년간 고려에 머물면서 당시 불교사상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의 승탑과 석등입니다. 승탑은 팔각원당형을 기본구조로 하여,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모두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팔각 지대석 위에 3단의 기단을 두고 그 위로 탑신부와 상륜부를 올렸는데, 파손이 거의 없는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탑신은 전체적으로 둥글고 넓적하며, 지붕돌인 옥개석과 머리장식 받침인 노반은 팔각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에 3단의 둥근 테인 보륜을 더하여 장식한 수 끝이 봉긋하게 솟은 구슬모양의 보주를 얹었습니다.
부도는 불교에서 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승탑이라고도 불립니다. 석등은 어둠을 밝혀 준다는 조명의 역할 이외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불가의 중요한 상징돌입니다.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석등은 4각의 상, 중, 하대석 위에 2매로 된 화사석을 마주 붙여 화창이 앞뒤로 두 곳만 나 있습니다.
화사석 위로는 사각의 옥개석을, 옥개석 위로는 상륜부를 가지런히 올렸습니다.
나옹선사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고려후기의 승려인 나옹의 승탑과 석등으로 나옹선사는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로 인도고승 지공선사를 따라 국벙의 정맥을 이어왔으며, 1376년 우왕의 명을 받아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승입니다.
승탑은 8각을 기본으로 하는 팔각원당형으로, 전통적인 통일신라 팔각원당형 승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다소 경직되고 평면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 말기 승탑 양식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높이는 약 3.5m이며, 상, 하대의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망바위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불곡산 방향 파노라마
당겨본 수락산
회암사, 회암사지, 양주옥정신도시와 그 뒤로 수락산, 도봉산, 불곡산
당겨본 도봉산, 북한산, 사패산
양주옥정신도시, 불곡산, 도락산
당겨본 불곡산, 임꺽정봉
도락산
당겨본 도락산
선각왕사비 방향에서 오르는 등로와 만납니다.
천보산정상 0.1km, 회암사 0.7km, 회암사지 1.4km
천보산 정상이 보입니다.
장림고개 1.3km, 회암사 0.8km, 회암사지 1.5km, 회암고개 1.4km, 회암사약수터 0.8km
천보산 정상
천보산에서 바라본 포천시 방향 파노라마
당겨본 해룡산
아기봉, 수원산, 주금산
당겨본 아기봉
당겨본 수원산
천보산맥 좌측으로 포천시와 그 뒤로 주금산, 주엽산
당겨본 주금산
당겨본 주엽산
당겨본 포천시
천보산에서 바라본 양주시 방향 파노라마
검단산, 수락산, 도봉산
당겨본 검단산
당겨본 수락산
양주옥정신도시와 그 뒤로 도봉산, 앵무봉, 불곡산, 도락산이
당겨본 도봉산, 북한산, 사패산
불곡산, 도락산
당겨본 불곡산, 임꺽정봉
당겨본 도락산
회암사, 장림고개 갈림길
천보산 5보루
삼국시대(고구려), 석축보루 해발 420m, 둘레 212m, 면적 3303㎡
해룡산 갈림길
천보산, 해룡산정상 3.0km, 동광교(종주끝) 44.1km, 장림고개(칠봉산입구) 0.7km, 일련사입구(종주시작) 6.2km
장림고개(칠봉산입구) 1.4km, 해룡산 정상 2.3km, 장림
해룡산임도입구
장림 0.65km, 장림고개(칠봉산입구) 1.65km, 일련사(종주시작) 7.1km, 오지재고개 7.4km, 해룡산정상 2.1km
임도(해룡산), 해룡산 정상, 장림고개, 칠봉산입구
해룡산 정상 1.2km, 장림고개(칠봉산입구) 2.5km
해룡산정상 1.0km, 장림고개(칠봉산입구) 2.7km
저멀리 천보산이 보입니다.
헬기장
해룡산정상 0.6km, 장림고개(칠봉산입구) 3.1km
해룡산정상 0.3km, 장림고개(칠봉산입구) 3.4km
해룡산 정상은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정상 부위를 우회하여 돌아갑니다.
음지 눈길은 빙판길입니다.
해룡산 정상이 보입니다.
해룡산
해룡산 정상은 군부대가 있습니다.
장림고개를 향하여 왔던 등로를 따라 다시 돌아갑니다.
장림고개(칠봉산입구) 3.4km
저멀리 장림고개가 보입니다.
장림고개(칠봉산입구) 2.7km
해룡산임도입구
천보터널, 해룡산임도입구 0.6km
탑동석불
탑동석불(동두천시 향토유적)
고려시대 말기의 추정되는 석불좌상입니다.
장림고개
예봉산 정상 3.75km, 칠봉산 정상 1.15km
장림고개
저멀리 솔리봉이 보입니다.
장림고개에서 바라본 양주시 방향
칠봉산정상 0.5km, 칠봉산 삼거리 1.5km, 장림고개 0.6km
나무사이로 해룡산이
칠봉산 정상까지는 쉼없는 오르막길입니다.
군사시설물이 보입니다.
칠봉산 정상 0.3km, 장림고개 0.8km
솔리봉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준비를 하는 곳
칠봉산 정상, 장림고개 1.1km, 청풍동(청풍동계곡) 3.5km, 봉양서거리(평화로) 4.0km
칠봉산 정상이 보입니다.
칠봉산정상(돌봉)
임금께서 이 곳을 떠나며 이 곳에 돌이 많다고 하시어 붙어진 봉우리.
원래는 석봉이라 불러야 하나 이미 칠봉산안에 석봉이 있으므로 돌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함
칠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불곡산 방향 파노라마
솔리봉, 죽엽산, 천마산, 검단산
당겨본 주금산, 천사봉
당겨본 백운봉, 죽엽산과 그 뒤로 내마산, 천마산
당겨본 천마산 양자산, 백봉산과 그 앞으로 고래산
저멀리 검단산, 수락산, 도봉산
당겨본 검단산과 그앞으로 용암산, 마구산
당겨본 불암산, 수락산
수락산, 도봉산, 불곡산, 고령산, 도락산
당겨본 불곡산, 임꺽정봉과 그 뒤 홍복산, 일영봉, 챌봉, 우측 고령산(앵무봉)
당겨본 도락산과 그 뒤 좌측 고령산, 팔일봉
당겨본 3번국도 소래산과 소래터널
당겨본 비학산
진달래바위
말봉
내촌마을(버스종점) 1.65km, 칠봉산정상(돌봉) 0.07km, 봉양사거리 3.87km, 청풍계곡 2.37km
헬기장
투구봉
임금이 이 곳에 쉬며, 군사가 갑옷과 투구를 풀어놓은 곳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제1호)
칠봉산전투(1950.06.25~26)
한국군 7사단 1개 연대 및 포병대대와 북한군 4사단이 이곳 칠봉산에서 대치하여 치열한 전투를 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석봉
임금께서 돌이 많다 하시어 붙여진 봉우리로 아래서 위까지 돌로 이뤄져 있음
투구봉 0.6km, 칠봉산정상(돌봉) 0.9km, 청풍계곡 1.6km, 봉양사거리 3.1km
깃대봉
칠봉산정상 0.9km, 대도사갈림길 0.7km, 일련사입구(종주시작) 3.5km, 제생병원입구 2.8km
아들바위
소원을 빌어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 있는 바위
치성바위, 칠봉산정상 1.3km, 봉양사거리 2.7km, 청풍계곡 1.1km
청풍계곡 1.1km, 칠봉산정상 1.4km, 평화로 2.6km
청풍계곡으로 하산합니다. 평화로 방향은 발리봉, 매봉(응봉)으로 가는 등로입니다.
각계전투 훈련장을 지나갑니다.
청풍계곡 150m, 칠봉산정상 2.4km
내촌마을 0.5km, 칠봉산정상 2.8km
내촌마을에서 바라본 칠봉산, 천보산
김삿갓 쉼터
천보산 정상 1.6km, 덕정역 5.0km, 김삿갓 쉼터 0.4km, 김삿갓 향기 쉼터 0.1km
천보산 정상 1.3km, 회암사 0.7km, 김삿갓 향기 쉼터 0.4km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와 모조비
고려 말 고승 선각왕사 나옹(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말 유학자 이색이 짓고 권중화가 써서 왕사가 입적한 이듬해(1377년, 우왕 3) 건립한 비로 1963년 보물 제3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비신과 머릿돌인 이수가 별개의 돌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1997년 천보산에서 발생한 불로 보호각이 불에 타면서 비신이 심하게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복원한 후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비신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1999년 원래의 비를 대신해 그 옆에 모조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석각왕사비 건립 당시는 중국에서도 예서가 쓰이지 않았던 때였기에, 당시 우리나라의 예서 연구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규모는 전체 높이 315cm, 너비가 106cm, 두께가 22cm이고, 이수 부분 높이는 82cm입니다. 거북 받침은 높이 71cm, 가로 171cm, 세로 222cm이며, 비석 받침은 높이 16cm, 폭 124cm, 두께 50cm입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 있으며, 1999년 원래의 위치 앞쪽에 원형을 본 따서 만든 모조비를 세웠습니다. 위치는 회암사 대웅전의 왼쪽 약 100m 지점의 언덕에 세워져 있습니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1997년 천보산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해 보호 비각이 불타면서 비석 역시 심하게 파손된 선각왕사비 귀부
회암사
회암사지 들머리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왕실의 원찰로 삼았던 거대한 사찰터로서 전성기에는 무려 3천명의 승려가 거처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빈 터만 남아서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보물 제2130호)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은 조선전기 왕실에서 발원하여 건립한 석가모니 진신사리탑입니다.
사리탑의 높이는 5.89cm이며, 팔각의 형태를 기본으로 2층의 기단부와 원구형의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단에는 용과 기린 연꽃무늬, 연잎넝쿨무늬, 넝쿨무늬, 신장상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양식과 기법, 세부 문양들이 조선 전기 왕실 발원 석조물과 친연성을 보이며, 규모, 치석 상태, 결구 수법 등을 고려할 때 당대 최고의 석공이 설계, 시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리탑의 형식과 불교미술의 도상 및 장식모양 등 왕실 불교미술의 여러 요소를 알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조선 전기 석조미술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유물입니다.
기단부 용
사리전지
보광전지
보광전은 광명으로 불법을 시방 세계에 두루 널리 비추는 의미로 대부분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보광전은 정면 5칸으로 "천보산회암사수조기"의기록과 일치합니다. 보광전지의 남쪽에는 월대가 있습니다.
우물지
규모는 지표에서 내부 바닥면까지의 깊이가 8m정도 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부분의 깊이는 약5.3m정도입니다.
최상부 석축부분의 직경은 2.8m이며, 우물의 하부는 자연암반을 약2.4m 정도 파내고 암반 위에 6각으로 목재를 결구하여 약 0.9m 정도의 높이로 3단을 쌓았습니다.
맷돌(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호)
남북으로 나란히 낳아 있는 2기의 화강암 맷돌로, 곡식을 가는데 쓰이며, 위, 아래 두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둥이가 길어 타원형에 가까워서 주둥이가 짧았던 조선시대 맷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쪽을 고정시키기 위한 매함지와 맷돌을 함께 만들고, 맷돌을 돌리는 맷손을 중심부에 박아 놓은 모습 또한 특이합니다.
맷돌의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장실 앞쪽
화장실터
평면형태는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기단 규모는 가로 14m, 세로 4.7m입니다. 측면 중앙칸이 지하 석실형태로 되어 있으며, 지하석실 규모는 가로 10m가량, 세로 2.5m가량, 깊이는 약4m로 석실 내부로 퇴적토 일부를 채취하여 기생충 검사를 실시한 결과 채취한 시료에서 기생출안이 검출되어 이곳이 화장실로 활용 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최대 16명까지 사용이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회암사지 당간지주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15m 거리에 있는 담장 지대석 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원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아마도 화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였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당간지주는 2주가 세트를 이루어 하나로 구성되기 때문에 본래 2쌍으로 모두 4주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주는 누가 가져갔는지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괘불대
괘불대는 기우제나 수륙제, 영산재 등 불교도들이 야외에서 지내는 대규모 법회나 의식에서 예배 대상물이 되는 괘불을 걸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하는 시설물입니다. 따라서 괘불대는 당간이나 당간지주와 그 형태가 유사합니다. 하지만 꼭대기에 용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당이 중심에 있고 당에 깃발과 같은 불교 장엄물이 걸리는 당간지주와는 달리, 괘불대에는 불화를 건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당간지주는 사찰의 초입부에 위치하지만, 괘불대는 사찰의 주요 불전 앞에 자리합니다. 발굴조사 결과 원래의 위치로 확인되었으며, 통돌을 이용해 만든 점이 특징적입니다.
회암사지(사적 제128호)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 최대의 왕실사찰로서 종교적인 공간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왕의 별궁으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동시에 살필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아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회암사지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