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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출 3:12)고 하시는
하나님에게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하고 묻자,
하나님은 에예 아셰르 에예(출 3:14)라고 하신 뒤에
당신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라는
4개의 자음을 주셨다(출 3:15).
언약을 맺는 시점에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로 나타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맺을
자격을 밝힐 필요가 생겼다는 뜻이다.
여호와라는 칭호는 아들을 구원할 자격이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자격이다(출 3:15).
히브리어에 있는 네 개의 침묵 문자 중
‘우주의 주인을 의미하는’15 후음 알레프를 제외한
세 개의 침묵 문자로 이루어진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는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하나님의 칭호이다(출 3:15).
여기 ‘영원한’으로 번역된 올람은
‘감추다’라는 뜻인 알람과 동족어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인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감추고 있는 이름이다.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에
감추어진 뜻이 무엇일까?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발음하지 않고
주(Lord)를 뜻하는 아도나이로 읽고,
천주교나 개신교에서는
야훼 또는 여호와로 읽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네개의 자음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한글 알파벳에서 자음을 읽을 때는
첫 번째 모음인 ㅏ를 붙여 읽는다.
우리말 자음의 명칭은
‘그느드르’가 아니라 ‘가나다라’이다.
히브리 자음 22개의 명칭은
모음 ㅏ를 붙여 읽는 자음이 10개요,
ㅔ를 붙여 읽는 자음이 7개요,
ㅣ와 ㅗ를 붙여 읽는 자음이 2개씩이요,
ㅜ를 붙여 읽는 자음이 하나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네 개의 자음(YHVH)에 모음을 붙여 읽었다면
‘아ㅎ바ㅎ’라고 소리냈을 가능성이 45%요,
‘에ㅎ베ㅎ’로 읽었을 가능성이 32%요,
이ㅎ비ㅎ나 오ㅎ보ㅎ로 읽었을 가능성이 9%요,
우ㅎ부ㅎ로 읽었을 가능성이 5%이다.
히브리 자음에서 ㅏ 모음이 많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ㅏ가 말을 배우는 아기들이
처음 내는 소리라는 것을 감안할 때
‘아ㅎ바ㅎ’라고 소리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 있는 Y로 인해 ‘야ㅎ바ㅎ’라 했더라도
반모음 ‘ㅣ’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으므로
반모음을 빼고 읽으면 ‘아ㅎ바ㅎ’가 된다.
후음인 ㅎ이 종성으로 사용될 때는
뒤에 자음이 거센소리로 바뀌고,
뒤에 자음이 없으면 묵음으로 처리된다.
따라서 요드 헤이는 ‘아ㅎ’로,
바브 헤이는 ‘바ㅎ’가 되는데
그것이 한국 사람에겐
‘아바’ 또는 ‘아빠’로 발음된다.
아바나 아빠는 세계 공통어라 할 만큼
널리 사용되는 말로서 아버지를 뜻한다.
자녀가 학교에 가서
부모의 이름을 말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
자녀는 아빠나 엄마 외에 다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자녀가 부모를 부르는 이름은 아빠나 엄마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는 이름은
여호와이다(사 42:8a).
관계를 호칭으로 사용하는 나라가
몇나라나 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나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호칭으로 사용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여호와라는 이름이 아버지를 뜻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때까지 전능자로 나타났을 뿐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출 6:3)하였으나
그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
그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다는 것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실 수 있는 자격,
즉 자식을 구원하실 아버지로 제시된 이름이다.
뿐만 아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창 2:24)
언약을 기억나게 하는 이름이다.
언약을 KJV성경은 신약에서
testament(마 26:28)라고 했는데
testament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데케를
우리말 성경은 히브리서에서
그것을 유언으로 번역했다(히 9:16, 17).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기억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유언 때문이었다.
유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유언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며,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알려주셨다.
하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고,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출 3:14,15)이다.
나보다 못한 존재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없다.
자식이 자랑스러울 때
아버지는 ‘아무개 애비요’ 하면서 자신을 소개한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은
인간을 타이틀 삼아 자랑하시는 분이다.
우리말로 ‘스스로 있는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예 아셰르 에예에서
에예는 to exist(존재하다)를 뜻하는
동사의 일인칭으로서 I am이다.
그리고 아셰르는 관계대명사로서
문장에 따라 who, when, where, which가 될 수 있는데
제이 그린(1918~2008)이 번역한
<히브리-영어성경>은 에예 아셰르 에예를
I am that I am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우리말로 ‘나는 나다’는 뜻이다.
‘당신 누구요?’ 하고 물을 때
나야 나(I AM WHO I AM)라고 대답하실 분은
아버지밖에 없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표호니라”(출 3:15).
여기 표호로 번역된
히브리어 제케르는 ‘표하다’ ‘남자로 태어나다’
‘기억하다’는 뜻을 가진 자카르의 동족으로서
‘기념비’를 뜻한다.
<히브리-영어 성경>은 아래와 같이 번역했다.
“And God said to Moses again, ...
Jehovah the God of your fathers,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
This is my forever, and this is My title
from gereration to generation”(Exo 3:15)
여호와라는 이름은
인간이 대대로 기억할 타이틀이다.
우리 집에서 나의 타이틀은 아내에겐 남편이요,
자녀들에겐 아버지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인간과
하나님 간에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타이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타이틀이 아버지임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 6:9)로 가르쳐주셨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셨다(막 14:36).
아바 아버지는 인간이
긴급 상황에서 부르는 이름이요,
자녀를 구원할 수 있는 자격이다.
부모가 아니라면 악당에게 사로잡힌 자식을
내 아들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시 106:8)
자신을 위하여 인간의 죄를 기억지 않으신다(사 43:25).
나의 죄를 기억지 않으시는 분은 부모뿐이다.
부모가 자식의 허물을 도말할 권리를
타인과 나누지 않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심으로 받는 영광을
결코 우상과 나누지 않으신다(사 42:8b).
아브라함 헤셀은 ‘위대한 이름인
네 글자(ה ו ה י)를 발음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연민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사실을
배워서 알고 있다’16고 말한다.
랍비 마빈 토케어는
엘로힘은 정의라는 뜻이요
발음할 수 없는 네 글자는 자비라고 말했다.17
정의는 보편적인 도리이지만,
연민이나 자비는 아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성경에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말씀이
개정개역 성경에 71번 나오는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고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고(13번),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을 보고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고(21번),
당신 백성의 원수를 심판하시는 것을 보고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고(30번),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시는 것을 보고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고(5번),
안식일을 주신 것을 보고 여호와인 줄 알리라(2번)고 하셨다.
구원하는 것, 징계하는 것, 심판하는 것,
축복하는 것, 힘들 때 쉬라고 하는 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요 배려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도탄에 빠지면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구원하고,
아들이 잘못하면 징계하고,
아들을 괴롭히는 자를 심판하고,
아들에게 축복하고, 아들이 힘들게 일하면 쉬라고 한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자격을 묻는 모세에게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라는
네 개의 자음을 주셨을까?
그리고 왜 그것을 아버지로 읽는 것일까?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는
히브리어에서 to live를 뜻하는 동사
하야(היה, chayah)와 하바(הוה, chavah)에서 뽑아주신 것으로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생명을 주신 분’이라는 뜻이다.
네개의 침묵 문자가
아버지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아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아버지이기 때문이요,
자녀의 삶을 책임질 이름으로
아버지를 대체할 이름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CBS TV에서 방영하는 <새롭게 하소서>나,
CTS의 <내가 매일 기쁘게> 등을 들으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것일까?
어느 순간 ‘성경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의 삶이 뒤집어졌다면
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것이다.
구약성경에 71번이나 사용된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를
그냥 읽으면 아무 감동이 없지만,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내가 아버지인 줄을 알리라’로 바꾸어 읽으면,
왜 하나님이 인간을 그토록 구원하고자 하시는지,
왜 그의 백성을 단호하게 징계하셨는지,
왜 징계하다가도 뜻을 돌이키시는지,
왜 원수를 모질게 처단하셨는지,
왜 우상을 두고 질투하시는지,
왜 인간 때문에 근심하시는지,
왜 인간에게 쉬라고 하시는지
그 의미가 분명해지면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감동하게 된다.
자식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아버지의 고유 권한이다.
인간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심으로(창 5:2)
그 권한을 사용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1) 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셨고(막 14:36),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롬 8:15)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YHVH는
구원자가 아버지라는 것을 밝힐 필요 앞에서 주신 이름이요,
인간이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아빠’ 같은 이름이다.
자녀가 학교에 가서
부모의 이름을 기록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
부모의 이름은 아빠나 엄마다.
자녀는 그 외에 다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자녀가 부모를 부르는 이름은 아빠나 엄마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은
여호와이다(사 42:8a).
자식이 위험에 처했을 때 ‘아버지!’라는
구호 하나만으로도 자식은 황급히 건짐을 받는다.
인간에게 도움이 필요[求]할 때
구원[救]해주실 분은 아버지[父]밖에 없다는 것을
중국인들은 救라는 글자에 남겨두었다.
터키 영화 <아일라> 예고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영화를 자녀들과 함께 보시면서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돕는 일의 숭고한 가치와 함께
아버지, 약속과 같은 이름의 의미도 깊이 새겨보면 어떨까요?”
아버지, 약속과 같은 그 이름은
인간이 위험에 처했을 때 부르는 SOS요,
아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외치는
‘사람 살려’와 같은 이름이다.
성경에 여호와를 수식하는 이름이 많이 나온다.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
나를 살피시는 엘로이 하나님,
전능하신 엘샤다이 하나님,
미리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삼마 하나님,
승리케 하시는 여호와 닛시 하나님,
거룩케 하시는 여호와 카도쉬 하나님,
평강케 하시는 여호와 살롬 하나님,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 하나님,
목자이신 여호와 로이 하나님,
능력되시는 여호와 체바오트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이 모두는 아들을 위해 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들이 잘못해도 끝까지 참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살길을 돌비에 써 주시면서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출 34:6)라고 하셨다.
이 하나님의 자기 소개를 뜻으로 읽으면
‘아버지다 아버지다
자비롭게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너의 아버지다’이다.
그렇게 들어야 왜 모세가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할 때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출 33:18,19) 하시고는
품성을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이 성품이야말로 모든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사 63:16)고 기도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여호와의 이름이 아버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죄가 작으면 벌이 작고 죄가 크면 벌이 큰 것은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이 가정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자녀에게 적용되는 원칙은
‘자식이 잘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느냐 아니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적용하는 원칙은
이성적이 아니라 초이성적이다.
부자 간에 일어나는 일로 해석하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초이성적인 일이
성경 역사에서 무수히 일어남으로
성경 독자들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히브리 문자는 알파벳 하나하나에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 숨겨진 뜻은 문자적으로 보면
‘손을 보라! 못을 보라!’는 뜻이니,
이것은 못박히실 하나님에 대한 이름이요,
상징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업적이 드러나고,
연합이 드러났다’는 뜻이니,
화목제물로 오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글자 문자적 의미 상징적 의미
요드(י) hand(손) deed(행위), work(업적)
헤이(ה) lo! behold(보라) to reveal(밝히다, 드러내다)
바브(ו) nail(못) unity(연합), connection(연결)
헤이(ה) lo! behold(보라) to reveal(밝히다, 드러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깊이 명상해야 할 이름
(말 3:16, who meditate on His name. NKJV)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으면서도
그 뜻을 생각하지 못했다.
만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못 박히시는 것을 보고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로 주어진
네 글자의 뜻을 잠깐만이라도 생각해보았다면
‘못 박히시는 이 분이
과연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 를
표호로 주신 그분인가’ 하며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나님은 못 박을 때에라도
지금 손에 못 박히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글자에 그 뜻을 숨겨두었으나
어리석은 백성은 하나님의 손바닥에 못을 박으며서도
그분이 아버지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교한 일이 또 일어났다.
빌라도가 예수의 죄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는데,
그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다.
이 죄패를 보고 유대 지도자들이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했으나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요 19:21,22)고 하며 수정을 거부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의
히브리어 표기는 םידוהיה ףלםו ירצנה עושי 요,
읽으면 ‘예수아 하나짜레 바말레크 하예후딤’이다.
이 말의 첫 글자가 바로
요드(י), 헤이(ה), 바브(ו), 헤이(ה)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십자가 위에 걸린 죄패만 보고도
그분이 아버지인 줄 알도록 그것을 높이 달아두었으나
아무도 죄 없이 돌아가신 그분이
아버지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지구 별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애석한 일은
지금도 그분이 아버지이신 것을 모르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 지구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고 부르기만 해도
‘얼굴빛’(시 67:1)을 비추실 아버님이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