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이 끝났습니다. 여당(국민의 힘) 참패라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슬아슬하게 진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책 줄거리를 요약 포스팅합니다. 저자의 고향인 미국 캔자스주에서 실제 유권자들의 정치 신념을 추적해 분석한 흥미로운 책입니다.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 사회적 경제적 약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미국의 민주당입니다. 그러나 미국 캔자스를 비롯한 낙후된 지역이 자신의 이익과 상관이 없는 부자들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인 공화당을 지지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의 가난하고 힘없는 노인, 저소득층, 농어민의 유권자들이 보수정당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선거에서도 약자와 서민, 중산층을 대변하고 사회개혁을 주도하는 것을 표방하는 진보 정당이 정작 선거에서는 빈곤층, 사회적 약자가 많은 지역에서 보수정당이 승리하는 곳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경제 상황이 점점 더 악화(惡化)되면 될수록 유권자들은 점점 더 정치와 사회에 대해 냉소적(冷笑的)이고 훨씬 더 보수적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보수정당이 집권하는 경우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대기업적 정책을 펼칩니다. 저자 프랭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저자의 고향인 ‘캔자스주’를 중심으로 시민단체와 풀뿌리 운동가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 하나 밝힙니다. 캔자스에서 보수 반동의 물결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민영화, 규제 철폐, 노동조합 폐쇄로 이어지는 자유시장의 합의를 이루어 냅니다. 자유시장이 실패하고, 자유주의 계획이 좌초되고 그들의 신경제가 붕괴(崩壞)되었는데도 미국공화당 후보가 계속 당선됩니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보수(保守)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 사랑처럼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보수정당의 행동은 기업과 부자들의 위함뿐이라고 역설합니다. 가치는 유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보수파가 선거에서 이기는 순간 전통적 가치들보다 돈이 더 중요합니다. 이는 수십 년 지속된 현상의 기본적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보수의 수법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하며 환상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자, 프랭크가 인용한 역사가(歷史家) ‘버넌, 패링틴’의 말을 인용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정치적 태만 때문에 스스로 사회에서 언제까지나 단조롭고 고된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가 착취 기제를 완성하는 동안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본 주위에 잡아먹힐 살찐 거위였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실제로 자기 목을 매달지도 모를 밧줄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재산을 강탈해 갈 철도를 놓기 위해 공유지를 포기하는 데 찬성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는 세금으로 기생하는 카운티 중심도시들을 자랑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로 도시 출신의 법률가를 사법부와 입법부에 보냅니다. 가난을 모르고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합니다.
그들은 중산층 신문을 읽었고 은행가와 정치인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망치는 결과밖에 초래할 수 없는 보수당의 정책에 표를 던졌습니다.
저자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여러, 광경들을 면밀하게 파헤치면서 민중의 착란 현상을 조장하는 미국의 보수 우파의 교묘하고 은밀한 집권전략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결국 정당의 선택도, 선택한 정당의 정책에 대한 감시와 그에 따르는 결과를 감수하는 것도 다 국민이며 유권자의 몫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캔자스주‘ 젊은이들은 말합니다.
젊은 우리의 미래를 왜 나이 많은 노인들이 결정하느냐고 항변합니다. 노인 복지정책을 세우지 않는 공화당을 왜 지지하느냐고 울분을 토합니다.
우리나라 사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1,000만 명에 가까운 우리나라 노인 중 70% 가까이가 절대 빈곤 노인들이라는데 그들 대부분은 보수정당을 지지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몰라서 그럴까요?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인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고 합니다. 옛말에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른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머리가 있어도,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분별(分別) 능력이 없어서인지 미국 ‘켄자스’ 유권자와 많이 닮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