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네 가족이 다녀갔다. 지난 일월 시작한 식당이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적지않은 이익을 남긴다는 말이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동생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다. 앞니 하나가 빠져서 웃을 때마다 징그럽다. 원래 말랐던 녀석인데 이제는 입던 바지가 하나도 맞지를 않아서 제수씨의 바지를 빌려 입는단다.
나나 동생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들 세살 밑의 동생을 형으로 본다. 머리는 흰머리가 맥없이 정수리쪽으로 밀려 올라가 있다.
녀석의 절약하는 모습은 가이 초인적이다. 옷을 생전 사는 적이 없고 어떤 물건이던 고장나면 기어이 고쳐서 그 물건이 스스로 녹아버릴 때까지 쓰고야 만다.
오십에 처음으로 얻은 네살짜리 아들을 끔직이도 사랑한다. 아이가 깨어있는 동안은 내내 아빠를 때리고, 만지고, 끌고, 부르고 근처에서 맴돌며 웃고 비명을 지른다.
이제 네살인 조카는 아주 영특하다. 식당에 매일 데리고 나가는데 아주 작은 구석방에서 열시간 정도를 태블릿을 보며 혼자 논단다. 아이가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사정을 다 알고 눈치를 채고 나이가 든 할아버지의 영혼으로 인내하는 셈이다.
그 아이를 보면 동생의 어릴 적 모습이 상상된다. 어머니의 회상에 따르면 아주 갓 태어날 적부터 울었던 기억은 없고 방긋방긋 웃기만 했단다.
동생네가 떠나고는 큰아이 부부가 왔다. 결혼한지 만 육년만에 첫아이를 가졌는데 비교적 건강해 보이고 마음이 안정된 모양이 우리를 안심시켰다.
나는 원래 형제도 모여사는 것이 꿈이었고 아이들도 한 도시에서 살기를 원했었다. 그런데 너무 가까이 너무 자주 만나도 갈등이 일어나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몇 시간 거리에 떨어져 살면서 서로 안부를 주고받고 몇 달에 한번씩 모여 반갑게 해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요즘은 한 달이면 새로운 사람들을 약 수십명씩 만난다. 그 한사람 한사람이 온전한 우주이다. 그 우주에 대한 관찰과 이해만으로도 삶은 재미있고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한여름의 새벽은 황홀하고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