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발품 / 김채영
걷자고 할 때 안 따라나선 적 없는 발
친구들이 책을 뒤질 때 나는 길을 뒤졌습니다
출세의 기원이 궁금할 때 발품을 팔았습니다
내 인생의 덫을 내가 놓았구나 싶은 날
어디라도 좀 걸어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날
한 마디 허락도 없이 들앉은 역마살을 모시고 가요
오늘 목적지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는 문경새재죠
장원급제, 금의환향, 사자성어 앞세우고
갚아야 할 전생의 책무처럼 창창한 발자국이 닦은 길
그 깃털 같은 날들이 묵향으로 번져 반질반질한 길
참새들 떼창과 굴참나무 볼레로가 덤인 길
현재를 현재라 할 수 없는 여기는 과거길입니다
돌멩이가 자라서 돌탑이 되었습니까
돌멩이 하나가 기도문이자 한 권의 책이랍니까
갈구하는 소원지들이 책바위를 호위하고 있습니다
예언처럼 흐뭇흐뭇 다가오는 빛살에 불온한 속내 감추고
불쑥 나선 길 끝에 시제 들고 갓끈 조이는 내가 보입니다
불시착한 데서 장원급제할지 몰라 자발없이 설렙니다
의도가 꼬여 지릴 것 같고 질릴 것 같을 때
따스운 오미자차 한 모금 극약처방으로 충분합니다
꿈이 범람하여 요동치면 무작정 걷습니다
삶이란 것이 결국 발품 파는 일인 것을요
콩나물 한 봉지에도 뿌듯했던 헐한 저녁이 사무칩니다
[우수상] 문경생태미로공원에서 / 권수진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이 길이 맞다 싶으면
수천 갈래로 흩어지는 길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길 위에서
방황한 적 많았었다
막다른 골목에 봉착할 때면
가끔 당황하기도 했다
살다 보니 그랬다
동쪽인 줄 알았는데 서쪽이었고
남쪽으로 걸었는데
북쪽이었다
미궁 속에 빠진 생쥐처럼
출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해보지만
길은 보이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했다
매번 선택의 기로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길
본래 인생에는 정답이 없었다
지금껏 네가 걸어온 길
그 길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우수상] 문경새재 / 최일걸
태양도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문경새재에 가려거든 길을 묻지 마라
스스로 길이 되지 않고는
문경새재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지 않고는
단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문경새재에서는 창공에 한 획을 긋는
새에게 온전히 온몸을 내어줘야 길이 열린다
높고 험하여 새의 필사적인 날갯짓이
펼쳐 보이는 문경새재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고는
넘을 수 없는 가파른 고갯길이다
바람이 통성명하며 동행을 자처하는
문경새재에선 풀 한 포기에게도
너나들이 해야만 한다
구름이 자꾸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문경새재에서는 너털웃음을 털어놓을 일이다
산 도적 같은 근심 걱정이 앞길을 막아도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보이면 그걸로 족하다
한반도의 모든 길이 모이고 흩어지는
문경새재에선 과거 시험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삶의 오묘한 이치를 묻는
선문답 같은 시험이 귓가에 맴돈다
숙성의 과정을 모두 거친 침묵만이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빼어난 경관 앞에서 감탄사마저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문경새재가
그대 빗장뼈에 걸쳐 있는데
문경새재로 통하지 않는 걸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문경새재로 가고 있다
[심사평]
문경새재문학상 공모가 어느덧 5회를 맞았다. 공모 요강에 밝힌 바와 같이 문경새재문학상은 문경새재전국시낭송대회와 함께 공모하며 당선작은 시낭송대회의 지정시로 선정하여 낭송하게 된다. 그동안 심사평에도 밝혔었지만 일반 문학상 공모와는 성격이 다른 점을 다시 한번 밝혀두고자 한다. 작품은 문경과 문경새재를 홍보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고, 시낭송에 적합한 내용이어야 한다.
이번 공모에는 92명의 응모자가 총 146편의 작품을 응모했다. 다섯 편의 작품을 보내온 응모자도 있어 큰 정성에 감사함을 느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을 장시간에 걸쳐 여러 번의 검토를 거쳤다. 하지만 올해는 다른 해와는 다른 현상이 발견됐다. 한 지도자에게 지도받은 듯한 비슷한 표현과 비슷한 기법의 시들이 제법 보였다. 그리고 말은 장황하게 많은데 실체가 없는 시들이 많았다. 그럴듯한 말을 이어 붙여 뭔가 있어 보이는데 아무리 읽어도 선명한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 시들이 많아서 심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시가 많은 것은 언어를 통한 구체적인 형상화 능력이 부족해서이다. 시가 상상의 산물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소재가 정해져 있는 시는 그저 생각만으로 써서는 곤란하다. 직접 그 장소를 방문하고 그 장소의 기운과 빛깔과 냄새를 몸으로 느껴보고 써야 한다. 추측만으로 만들어진 시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문경새재를 쓴다면 새재를 직접 걸으면서 그 길을 걸어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과 그들이 살아갔을 삶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생각으로 만들어낸 시와 직접 피부로 체험한 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공모에서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공모 세부 요강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응모하는 점이다. 응모 작품은 어떠한 형태로든 발표되지 않은 순수한 창작물이어야 함에도 이미 발표된 작품을 응모하여 혼선을 초래하였다. 응모 시 항상 공모 요강을 꼼꼼히 읽어보고 합당한 작품을 응모하길 바란다. 당선작을 결정한 뒤 표절 검사를 실시하여 발표작임을 확인하고 당선 무효화한 작품이 있었음을 밝힌다.
최종심에 오른 6편의 작품 「문경새재의 바람」, 「눈 내리는 고모산성」, 「발품」, 「문경새재」, 「문경새재를 그리며」, 「문경생태미로공원에서」을 수차례에 걸쳐 검토하였다. 대상으로 김채영의 「발품」을 우수상으로 권수진의 「문경생태미로공원에서」과 최일걸의 「문경새재」로 심사위원의 뜻을 모았다.
김채영의 「발품」은 삶의 궤적이란 결국 발품을 팔아서 이루어 가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운을 바꾸려면 많이 걸으라고 했다. 운이라는 것은 가만히 멈춰 있으면 고이고 막히고 만다. 꿈이 범람했으니 걸어야 했으리라. 꿈을 가진 사람 누구나 와서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새재 길은 어느 사이에 타입슬립의 길이 된다. 과거의 길과 과거길이 겹쳐 장원급제 꿈에 설레보기도 한다. 숱한 선비들이 뿌려놓고 간 묵향에도 취해본다. 새재는 오랜 세월 많은 이의 발품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창창한 발자국이 만든 길에서 시공간을 넘나들며 발품 팔아 완성한 시를 이번 대상작으로 뽑는다.
권수진의 「문경생태미로공원에서」에서는 문경생태미로공원의 미로를 돌면서 우리네 삶의 길이 이 미로와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생의 길이란 미로처럼 우리를 당황시킬 때가 한두 번이 아님을, 잘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 길이 문득 막다른 길이었음을 미로를 헤매면서 다시 되새긴다. 출구를 찾기 위해 헤매던 날들 하지만 꼬불꼬불 미로를 돌아나오면 결국 내가 걸어온 길이 바로 정답이었음을 알게 된다. 문경새재를 소재로 쓴 시가 팔십 프로 이상인 응모작 중 생태미로공원과 생의 길을 겹쳐서 읽어내는 솜씨에 점수를 주어 우수작으로 뽑는다. 최일걸의 「문경새재」는 꿈을 이루기 위해 새재를 넘어가던 이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 넘어가던 이 고갯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필자는 스스로 길이 되지 않고는 문경새재에 이를 수 없다는 말로 전하고 있다. 삶의 어느 고개든 쉬운 고개가 있으랴만 익숙한 집과 고향을 떠나 거친 산을 넘어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는 아니지만 그들의 어깨를 누르던 무게를 새재를 걸으며 함께 느껴 보았다. 이 길을 걸으며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앞서간 숱한 이들의 노고와 정성이 있었기 때문임을 노래하고 있다. 막힘없이 부드럽게 흐르는 리듬감으로 낭송에 적합한 점도 높이 사 우수작으로 뽑았다.
올해도 많은 작품을 보내주신 응모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문경 지역과 문경새재에 관한 시를 공모했지만 문경새재에 관한 시가 너무 많아 다음 공모에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모 소재를 변경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개진해 보았다. 당선하신 분들께는 축하를 안타깝게 입상하지 못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를 드리며 다음 기회의 도전을 응원해 본다.
- 문경새재문학상 심사위원 일동